[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51. 도끼사건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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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고교 시절의 필자(왼쪽에서 둘째).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하류인생'을 만들 때 임권택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그 때는 젊은이 열에 예닐곱은 건달이었지." 정말 그랬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경제는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였다.

일자리가 없는 도시의 젊은이들은 거리를 쏘다니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게 일이었다. 어울려 다니다 보면 젊은 혈기에 주먹질도 하고 사고도 치는 게 다반사였다. 남보다 싸움질에 좀 더 능한 젊은이는 '조직'에 들어가 그 위세를 업고 입에 풀칠이나 하곤 했다. 조직이라고 해봐야 지금의 '조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박한 형태였다. 속칭 '오야붕' 밑에 '꼬붕' 수십명이 따라다니면서 용돈이나 버는 수준이었다.

수업료가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한 나는 당구장에서 내기 당구를 치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청춘을 축내고 있다가 건달 조직으로부터 '콜'을 받았다. 어느 날 이화룡씨 밑에 있던 신 상사가 중앙극장 뒤쪽으로 오라고 해서 가보니 내 또래 청년 7~8명이 와 있었다. 신 상사는 대구헌병학교 시절 교장 운전병으로 근무하다 직업 군인이 됐다. 상사로 제대해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먹세계에서 꽤 알아주는 인물로 나중에는 그를 사칭하고 다니며 민폐를 끼치는 이들이 나올 정도로 '신 상사'하면 다들 떨던 때였다. 오죽했으면 20여년이 지난 80년에 전두환 정권이 삼청교육대에 그를 집어넣었을까. 이미 주먹세계에서 손을 씻고 건실한 가장으로 지낼 때인데도 말이다. 그만큼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건달의 대명사'였다.

동북고에 다닐 때 그를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극장에서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시비가 붙어 손찌검을 했는데 이들이 나중에 다시 동료들을 모아 보복을 해왔다. 혼자서 상대하다 병원에 실려갈 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화가 난 나는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얼굴도 모르는 신 상사를 찾아갔다. 단지 걔들이 신 상사 조직원이라는 말만 듣고 무작정 그들의 '본거지'인 중앙극장 근처로 간 것이다. 손도끼를 옷소매에 감추고 걸어가다가 덩치 큰 사내를 만났다. 다짜고짜 "신 상사를 어디 가면 볼 수 있소" 라고 했더니 "신 상사를 왜 찾아?"했다. "손 좀 볼 일이 있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껄껄껄 웃었다. 본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미처 손도 못 써보고 제압됐다. 완력이 대단했다. "그까짓 것으로 흥분하지 말고 치료나 잘해"하면서 뒤통수를 툭툭 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를 눈여겨 봐둔 것 같았다. 신 상사가 중앙극장 뒤로 부른 젊은이들은 명동을 '접수'하려는 행동대원이었다. 이날 우리의 활약으로 이화룡 조직은 명동에 진을 치게 됐다.

50년대 주먹세계를 휘어잡은 이화룡.정팔은 모두 이북 출신이었다. 이화룡은 평양에서 월남해 대동강동지회를 만들었고, 신의주가 고향인 정팔은 압록강동지회를 결성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 두 조직을 서북청년단으로 통합해 단원들에게 전투경찰복을 입히고 간단한 사격 연습을 시킨 뒤 빨치산 토벌에 앞장세웠다. 남한 출신으로는 김두한이 '빨갱이' 색출에 공을 세웠다. 이 세 조직은 나중에 대동청년단을 거쳐 대한청년단으로 다시 합쳤다. 이화룡은 대동청년단에서 감찰부장을 맡았으나 누구 밑에 있을 성격이 아니어서 뛰쳐나왔던 것이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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