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155)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운현궁 흥친 왕비 이씨(87·영친왕의 백모)의 담=다시는 뵈옵지 못할 줄 알았던 왕 전하와 덕혜옹주가 다함께 귀국하신 것을 보게되니, 나는 여한이 없다고 하셨으나 한가지 큰 유

    중앙일보

    1970.11.06 00:00

  • (154)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원히 잊지 못할 어른 ▲창덕궁 김(명길)상궁(77)담=내가 열세살 때 순종황후(윤비)를 모시러 창덕궁에 들어갔을 때 영친왕은 아홉살난 어린 태자였습니다. 본래 체구는 그리 큰 편

    중앙일보

    1970.11.05 00:00

  • (148)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전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이 본 영친왕)이왕 전하 도전정순 이왕 전하는 명치30년(1897) 10월20일 어탄생, 이왕 조제 26대 이태 왕의 책7남자, 명치38년 왕세손에,

    중앙일보

    1970.10.29 00:00

  • (143)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 내외분은 l945년 4월에 은혼식을 거행하였으므로 꼭 4반세기만에 금혼식을 하게된 셈인데 1945년은 태평양전쟁 말기 즉 해방이 되던 해로 동경은 B-29의 공습으로 폐허가

    중앙일보

    1970.10.23 00:00

  • 해방에서 환국까지 |김을한

    순종황후 윤 대비가 승하하신지 1년 뒤인 1967년에는 영친왕의 혼약자였던 만년규수 민갑완 여사가 73세를 일기로 동래 우거에서 별세하였다. 이로써 영친왕과는 가장 인연이 깊고 가

    중앙일보

    1970.10.22 00:00

  • 병주는 약있다|10일 『약의 날』 맞아

    10일은 제14회 「약의 날」이다. 병을 고치기 위한 약으로 근래 매스·미디를 통한 과대선전으로 대수롭지 않게 마구 쓰여져 문제가 되고있다. 미국처럼 의사의 지시를 받아야만 약을

    중앙일보

    1970.10.10 00:00

  • (122)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은 마땅히 본국으로 돌아가셔야 될 것이라는 그날의 결정은 안동 부인을 통하여 즉시 영친왕 내외분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런 일이 있은지 수일 후에 이번에는 방자 부인이 우리들을 초

    중앙일보

    1970.09.29 00:00

  • (121)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국적을 다시 한국으로 바꾸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한일 양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선의의 원조를 아끼지 않았거니와 그 중에 우에무라·겐따로오(상촌건태낭)라는 사람이 있다.

    중앙일보

    1970.09.28 00:00

  • 택시, 연쇄충돌|등교 아동 9명 부상

    【홍천】14일 상오 8시40쯤 홍천군 두촌면 강남리 앞길에서 동신택시 소속 강원영11925흐 택시 (운전사 황태수·27)가 앞에 가던 사람을 피하려다 운전 부주의로 학교에 가던 두

    중앙일보

    1970.09.15 00:00

  • 「엑스포70」개막

    【대판=조동오 특파원】인류의 조화와 진보란 테마아래 한국을 포함한 77개국이 참가한 대판천리언덕의 엑스포70은 지난 3월15일 개막된 이래 1백83일간의 회기 중 6천4백만여명의

    중앙일보

    1970.09.14 00:00

  • (108)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당시 일본은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경제가 극도로 어려웠으므로 각종 세금이 많아서 영친왕이 저택의 본관을 참의원 의장관사로 빌려주고 삭 월세로 매월 30만원씩을 받았어도

    중앙일보

    1970.09.10 00:00

  • (103)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스즈끼」(영목일)씨는 그때까지 한국에는 한번도 가본일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건만 초대「출입국 관리국장」이 되고 보니까 일본의 출입국 사무란 대부분이 한국 사람에 관한 일이요, 모

    중앙일보

    1970.09.04 00:00

  • (98)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비의 말은 계속된다. 당시 주일대표부는 동경에서도 제일 번화한 긴자(은좌)4정 목 핫도리(복부) 빌딩 4층에 있었다. 핫 도리는 본래 유명한 시계 점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중앙일보

    1970.08.29 00:00

  • (93)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홍사익 중장은 해방되기 1년 전인 1944년 3월9일에「필리핀」으로 가서 그 다음해 8·15까지 포로수용소장으로 있었는데 그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중앙일보

    1970.08.24 00:00

  • (89)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당시 영친왕이 귀국을 주저하게된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소위 왕위계승 문제였다. 봉건시대와 달라서 군주가 직접 정치를 하는 것도 아니요, 1910년 한일합병과 더불어 왕실은 한

    중앙일보

    1970.08.19 00:00

  • (74)|해방에서 환국 까지|김을한

    그보다 먼저 영친왕이 제1항공 군사령관에 취임하자마자 서울로부터 윤홍섭씨가 왔다. 윤씨는 순종 왕비 윤 대비 마마의 친정 조카로 일찌기 미국 유학을 하였으며 설산 장덕수씨와의 친분

    중앙일보

    1970.07.31 00:00

  • (68)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은 그해 12월에 육군중장에 승진하고 다음해 7월에는 우도궁 제51사단장에 임명되어 8월에는 벌써 부대를 이끌고 북지의 금주로 출발하였다. 소위 만주사변이 일어난지도 벌써 1

    중앙일보

    1970.07.24 00:00

  • (61)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구라파」여행은 1927년5월23일, 동경을 출발하여 그 이듬해 4월10일에 돌아왔으므로 거의 l년 동안을 여행한 셈인데 그때의 일을 방자비는 자신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중앙일보

    1970.07.16 00:00

  • 찰즈 파트너는 닉슨 딸

    【워성턴4일로이터동화】닉슨 대통령 가족들과 백악관 사교 및 의전 보좌관들은 오는 16일 찰즈 영국 황태자와 「앤」공주의 방문을 앞두고 영접 준비로 분주하다. 황태자와 공주의 3일간

    중앙일보

    1970.07.06 00:00

  • (52)-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때 송병준은 『신에게 두 가지 대책이 있사옵니다만 도저히 청허 하시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무엇이고 말해보라.』 『이번 해아 밀사 사건은 폐하께서 잠깐 실수를 하신 것

    중앙일보

    1970.07.06 00:00

  • (49)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옥은 불난서를 위시해서 영국,서서,백이의,이태리,화난, 정말, 「노르웨이」, 서전, 파난,오지리,애급등 여러나라를 두루 시찰하고 그 이듬해 4월10일에 들아왔는데 비록 개인자격

    중앙일보

    1970.07.02 00:00

  • (41)해방에서 귀국까지

    그러면 영친왕은 대체 무엇때문에 그토록 구라파(구주)여행을 고집하였던가? 1923 관동대진때에 저희 나라의 혁명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의 유학생과 노동자를 수

    중앙일보

    1970.06.23 00:00

  • (41)해방에서 환국까지

    그러면 영친왕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구라파(구주)여행을 고집하였던가? 1923 관동대진때에 저희 나라의 혁명을 미리 방지하기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의 유학생과 노동자를 수

    중앙일보

    1970.06.23 00:00

  • (40)해방에서 환국까지

    평소에는 아무 말이 없고 웬만한 일은 다 순순히 양보하던 영친왕이 구라파여행에 한해서만은 그같이 강경히 주장하여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나는 꼭 가고야 만다』는 태도를 보인 데는

    중앙일보

    1970.06.2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