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121)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국적을 다시 한국으로 바꾸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한일 양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선의의 원조를 아끼지 않았거니와 그 중에 우에무라·겐따로오(상촌건태낭)라는 사람이 있다.

    중앙일보

    1970.09.28 00:00

  • (74)|해방에서 환국 까지|김을한

    그보다 먼저 영친왕이 제1항공 군사령관에 취임하자마자 서울로부터 윤홍섭씨가 왔다. 윤씨는 순종 왕비 윤 대비 마마의 친정 조카로 일찌기 미국 유학을 하였으며 설산 장덕수씨와의 친분

    중앙일보

    1970.07.31 00:00

  • (61)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구라파」여행은 1927년5월23일, 동경을 출발하여 그 이듬해 4월10일에 돌아왔으므로 거의 l년 동안을 여행한 셈인데 그때의 일을 방자비는 자신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중앙일보

    1970.07.16 00:00

  • (60)해방에서 환국까지- 김을한

    사실인즉 영친왕은 이준렬사의 무덤이 해방뒤에도 여전히 해아에 있는 것을 항상 마음 괴롭게 생각하여 필자를 보고 『왜 우리 정부에서는 이준렬사의 무덤을 속히 이장하지않느냐』고 말씀하

    중앙일보

    1970.07.15 00:00

  • (52)-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때 송병준은 『신에게 두 가지 대책이 있사옵니다만 도저히 청허 하시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무엇이고 말해보라.』 『이번 해아 밀사 사건은 폐하께서 잠깐 실수를 하신 것

    중앙일보

    1970.07.06 00:00

  • (45)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일행이 구라파여행을 떠난 것은 1927년 5월이었는데 그보다 7년전인 1920년 6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되는 불문잡지 자유대한(La Coree Libre)에 『강제결혼』

    중앙일보

    1970.06.27 00:00

  • (41)해방에서 귀국까지

    그러면 영친왕은 대체 무엇때문에 그토록 구라파(구주)여행을 고집하였던가? 1923 관동대진때에 저희 나라의 혁명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의 유학생과 노동자를 수

    중앙일보

    1970.06.23 00:00

  • (41)해방에서 환국까지

    그러면 영친왕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구라파(구주)여행을 고집하였던가? 1923 관동대진때에 저희 나라의 혁명을 미리 방지하기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의 유학생과 노동자를 수

    중앙일보

    1970.06.23 00:00

  • (38)해방에서 환국까지

    1923년 9월 초하루날의 일이었다. 그날 일본에서는 소위 관동 대진재가 일어나서 동경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수만명이 불에 타 죽는 비극이 발생했다. 인심이 극도로 흉흉하여 눈

    중앙일보

    1970.06.19 00:00

  • (30)해방에서 환국까지

    이본궁 수정왕은 신문호외를 읽으면서 이거 큰일났군. 독립만세로 조선은 매우 소란한 모양인데라고 걱정스럽게 말하자, 옆에있던 부인도 그러기에 내가 무어라고 말했어요. 인정 풍속이 다

    중앙일보

    1970.06.10 00:00

  • (28)해방에서 환국까지

    당시 일본은 군벌의 전성시대로 육군대장 야마가다(산현유붕)는 소위 장주벌의 대표격으로 원로적 지위에 있었고 역시 육군대장 데라우찌(사내정의)는 조선총독으로 있다가 총리대신이 되어

    중앙일보

    1970.06.08 00:00

  • (23)해방에서 환국까지

    해방전 일본의 교육방침은 되도록 조선인에게는 조선의 역사를 기르치지를 않았으므로 학교에서는 절대로 진정한 역사를 배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구왕실의 역사도 잘아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중앙일보

    1970.06.02 00:00

  • (20)|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이 항상 마음속으로 송구하게 생각하는 분이 하나있었으니 그분이 즉 의친왕이다. 의친왕(전 이강 공)은 고종황제의 제2왕자이므로 만일 순서대로 한다면 그분이 왕위계승자로 왕세자

    중앙일보

    1970.05.29 00:00

  • (16)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금릉위(박영효)는 과거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 함께 혁명을 일으킨 투사였던 만큼 사랑하는 손녀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지 이우 공에게서 받은 단자와 반지를 일

    중앙일보

    1970.05.25 00:00

  • (9)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바로 그 무렵에 나는 볼일이 있어서 동경으로부터 임시수도 부산에 온 일이 있었는데 영친왕에 대한 일반의 인기는 대단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미지수에 대한(호기심과 자칫하면 바닷속으

    중앙일보

    1970.05.16 00:00

  • (3)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패전 직후의 일본사람의 생활이란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공습으로 도시라는 도시는 모두 잿더미가 된데다가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으니 당시 9천만에 가까운 일본국민도 꼭

    중앙일보

    1970.05.09 00:00

  • (2)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은 그후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연대장과 사단장등을 역임한 후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육군중장으로 제1항공군 사령관까지 지냈는데, 해방 전에 조선인으로서 일본 육군대학

    중앙일보

    1970.05.08 00:00

  • 해방에서 환국까지

    이조왕가의 마지막 황태자이던 고 이은씨의 70평생은 파란으로 가득 점철돼 있습니다. 비록 볼모로 잡혀가 일제에 억류돼 있었지만 그런대로 황족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1945년

    중앙일보

    1970.05.06 00:00

  • 사랑과 인내로 이긴 기구한 인연|방자여사가 말하는 결혼생활

    일본 이본궁가의 왕녀였던 방자여사는 1920년 4월28일 나라 잃은 조선의 황태자 이은공의 비가 됨으로써 기구한 내조의 길에 올랐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그들 자신은 물론 주위의

    중앙일보

    1970.05.02 00:00

  • 3·1 운동 반세기에 펼치는 특집 시리즈(6)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유사이래 처음으로 간악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그 압제에 신음하다가 10년째 되는 해에 일으킨 거족적 독립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민족독립운동의 주동 세력

    중앙일보

    1969.02.22 00:00

  • (124)천연기념물194호 창덕궁 향나무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1번지. 창덕궁의 향나무가 천연기념물194호(3월4일)로 지정됐다.높이 목측6미터. 몸통둘레4미터, 수령 700년이상. 노수답게 수세는 의연하고 수형이 특이

    중앙일보

    1968.03.23 00:00

  • 위협받는 「문화유산」 「개발」의 이름으로 사라져 간다

    산업개발 및 건설 사업이 급속도로 전개되고 있는 근년, 전국 각지에 산재한 문화재는 커다란 위협을 받고 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공장건설·도로공사·개간 공사 등이 활발한

    중앙일보

    1967.05.23 00:00

  • (44) 이조 중엽∼말엽 인물 중심 - 속 도원 김홍집|유홍렬

    김홍집은 친일내각의 수반직을 떠맡은 후에도 계속 중도적인 자주노선을 간직하였다. 그는 외무의 김윤식과 재무의 어윤중으로 더불어 일제의 내정개혁안을 절충 시행하여 일제와의 충돌을

    중앙일보

    1967.03.18 00:00

  • (3)유홍열|서양과학서 얻어온 조현세자

    조국근대화의 여명기인물로서 셋째로 들 수 있는 이는 병자로 한때(1637)에 볼모로 청국심양(봉천)에 잡혀가 있다가 7년 후 북경이 함락됨에 따라 그곳에 이르러 독일신부「아담·샬

    중앙일보

    1966.03.1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