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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8기 경쟁률 10대 1 … 졸업생 1263명 최다
육사 8기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태릉 육군사관학교 본관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8기생은 졸업생이 1263명으로 역대 육사 기수 중 가장 많았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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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머런 등 총리만 18명 배출한 영국 명문 학교
JP가 청년 시절 동경했던 이튼(Eton) 스쿨은 런던 서쪽 소도시 이튼에 있는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다. 정식명칭은 이튼 칼리지(College)다. 1440년 헨리 6세가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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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총리 퇴진시키고 장도영 옹립’ CIA 서울 요원 또다른 쿠데타 준비
1961년엔 박정희 소장이 준비하던 5·16 말고도 또 다른 쿠데타설이 난무했다. 해병대 궐기설, 족청(族靑)계 거사설 등이다. 김포의 해병1여단에선 오정근 대대장, 조남철 부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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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창설자 JP "국정원 수사권 검찰에 넘겨야"
김종필(얼굴) 전 국무총리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국가정보원의 수사권을 검찰에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대공수사권을 폐지하고 해외·대북정보 기능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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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79호실·정보연구위 정보부 만들 때 참고 안 했다"
1961년 중앙정보부 출범 전에도 국내에 정보기관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국방부 ‘79호실’과 장면 정권의 총리실 직속 ‘중앙정보연구위원회’다. 두 기관 모두 책임자가 이후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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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돌발 하야 성명 … 김용식 '외교 논리'에 퇴진 번복
5·16 나흘째인 5월 19일 돌발사건이 있었다. 오후 8시30분 윤보선(사진)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전날 장면 총리 내각이 총사퇴한 지 32시간 뒤다. 성명은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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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혁명정부 지키기 위해 수방사 창설 … 한국군,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 계기 돼
1961년 6월 1일 후암동 미군부대 서 열린 수도방위사령부 창설식. 사령관 김진위 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는 5·16의 산물이다. 탄생의 산파역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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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에 피신한 장면 총리 '54시간 부재' … 궐기군 진압 무산 … 반전의 기회 사라졌다
1961년 3월 장면 총리(왼쪽)가 이한림 제1군사령관(중장)과 함께 원주 국토건설사업 시공식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 사령관은 한국 최대 규모 실병력인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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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간절기'는 없다
옷 입기가 참 애매한 계절이다. 아침에는 영도 가까이 떨어지다가도 낮에는 10도를 넘어 20도 가까이 오르는 등 일교차가 매우 커서다. 아침을 기준으로 두꺼운 옷을 입으려니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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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소장 좌우에 박종규 소령, 차지철 대위 … '장면 체포' 임무는 실패 … 권력 이미지는 강렬
5·16 광경은 사진으로 존재한다. 한강 인도교 총격전은 가장 긴박한 순간이다. 하지만 선봉대인 해병1여단의 한강 돌파 사진은 없다. 소장 박정희(당시 44세)와 양쪽에 경호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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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윈, 첫 쿠데타 땐 민간에 정권 이양 … 2년 뒤 2차 궐기 땐 원대복귀 안 해
이집트 나세르(1952년), 이라크 카심(58년), 태국 사리트(58년), 파키스탄 아유브 칸(58년), 라오스 콩레(60년). 1950년대와 6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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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육성증언 영상⑨ "그만두겠다는 박정희한테 매달렸다"
-김종필 전 총리: 박(정희) 대통령이 (5·16 성공 뒤 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그런 압력에 굴해가지고 자꾸 그만두려고 했거든. 그때마다 내가 가서 막 매달려가지고 무슨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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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거사 빨리 하려 5·16 택일" … 이한림 "군 지휘부 공백 노려"
5월 12일 거사 계획이 새어 나가자 5·16 주체세력은 거사일을 5월 16일로 조정했다. 16일은 화요일이었다. 16일 택일에 대해 김종필 전 총리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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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신망·조직력 갖춘 군인 없다" … 청년 장교 자극한 미 상원 보고서
1960년 ‘사상계’ 1월호(사진)는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 보고된 한국 정세 분석을 번역해 실었다. 보고 시점은 이승만 정권 말기인 59년 11월. ‘콜론 보고서’로 명명된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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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7일 명동 호텔 옥상서 박정희 옹립하던 날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해병대 훈련을 참관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오른쪽). 바로 뒤는 김종필 중정부장. 왼쪽은 의전비서관 조상호 중령. [중앙포토] 박정희와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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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35세, 육사 8기 주축 … 국회의원만 15명 배출
김제민 공수단 대대장 1961년 4월 7일 서울 명동 회합에 참석한 5·16 주체는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예비역 중령을 포함해 총 29명이었다. 초기부터 가담한 멤버들이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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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총리 만나고 온 최경록 육참총장 '김종필 군복 벗겨' 메모
5·16 거사 석 달 전인 1961년 2월 김종필(JP) 중령은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로 강제 예편됐다. JP는 “군을 관둘 생각은 없었지만 조흥만(사진) 헌병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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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 700명 풀어 박정희 결딴내겠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은 김종필(JP) 전 총리가 군에서 강제 예편돼 민간인 신분일 때 일으켰다. JP는 “60년 4·19 이후 정군(整軍)운동에 앞장섰는데 이른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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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1월 거사 모의" … JP "모임 없었다"
“1960년 11월 9일 9명의 장교는 박정희 소장 집에 모였다. 신당동에 회합한 혁명동지들은 정군과 구국을 위한 혁명을 다시 확인하고 거사를 위한 동지의 조직에 전력하기로 서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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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참의장 용퇴 요구 … 군법회의선 "무죄"
최영희“한국군은 젊은 장교들의 선동으로 고위 지휘관들이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유능한 장성에게 압력을 가해 강제로 예편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1960년 9월 21일 미국 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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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왜 이 지경" 박정희 술자리 울분 … 숙군의 덫에 걸렸다
1951년 말 육군정보학교장 박정희 대령(오른쪽)과 특무대장 김창룡 대령(가운데)이 대구 육본 정보국 앞에 나란히 서 있다. 김 대령 왼쪽은 이승철 중령. [중앙포토]박정희 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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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위기서 살아난 박정희
JP는 “자신이 박정희를 구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이지만 실제론 백선엽 장군이 다 했다”고 말한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가담 혐의로 체포됐을 때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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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내 남로당 준동, 반란 … 진압 후 대대적 좌익 소탕
48년 10월 19일 육군 14연대가 일으킨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한 국군토벌대. [중앙포토]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육군 제14연대에 비상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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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빨갱이 아니었구먼요"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 소령(왼쪽)이 송호성 사령관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에 복귀한 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