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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회장 "한국, '제3의 개국'이 필요하다"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이 28일 “현재 한국은 아시아 최고 수준의 자유와 개방을 통해 세계의 인재와 자본을 끌어들이는 ‘제3의 개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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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첫 도착 4월 22일은 파라과이 기념일 … 2세들 국회의원 등 사회 지도층 진출 늘어”
지난해 8월 파라과이 에서 열린 ‘한국인의 날’ 행사. 한글학교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올해는 파라과이 한인 이민 50주년이 되는 해다. 1965년 4월 3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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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인력 1년 송금액 한때 GDP 4% … 지금 삼성전자와 맞먹는 경제효과”
영화 ‘국제시장’의 윤제균(46·사진) 감독은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경제학 전공자다운 관찰과 취재, 분석이 영화의 현실감·공감도를 높였다. 1400만 관객을 동원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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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 사건 후 권력의지 살아난 박정희…대장으로 전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닦는 박정희 의장. 왼쪽 뒤편은 박종규 경호대장. [중앙포토]민주공화당 창당 이튿날인 1963년 2월 2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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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한전 주식 4만 주 풀며 증시 혼란 … 강성원 전 의원 “약 20억원 갖다 썼다”
‘4대 의혹 사건’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진상 발표를 보도한 1963년 3월 6일자 경향신문 1면.증권파동의 조짐은 1962년 초 감지됐다. 1월 7일 동아일보가 2면 톱기사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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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군인당 냄새 별로 안 풍겨”
1963년 1월 18일 공화당 발기인 선언대회에서 선언문을 읽는 JP.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민주공화당 발기 선언대회가 열린 18일 오전 소공동 조선호텔은 잔칫집처럼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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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자유당 정권 왜 망했다고 보나” 예춘호 4시간 면접
“앞으로 군사정부가 큰일을 하는 데 관계해 달라.” 1962년 초 부산에서 대학강사로 일하던 예춘호는 박규상 동아대 교수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에 동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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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민소득 60 → 120달러 꿈 아니다 … 경제 5개년 계획에 담긴 의욕 무시 말라”
1962년 10월 28일 JP가 월트 로스토 의장에게 민정 이양 계획을 설명하면서 손수 그린 도표. 왼쪽 아래에 JP의 서명이 있다. [중앙포토]“내가 미국에 온 것은 돈을 구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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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김 - 오히라 메모’… 진본 찾아야
오히라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신화’라는 말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통찰이다. 1961년부터 65년까지 김종필(JP·63년 말부터는 공화당 의장) 중앙정보부장이 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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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세대와 정치인 JP…“운동권과 논쟁한 혁명 2인자 … 근대화 열정 보였다”
이영일(左), 서진영(右)1963년 10월에서 64년 6월까지 JP는 ‘캠퍼스의 정치인’이었다. 63년 10월 22일은 이른바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났던 1차 외유를 끝내고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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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권만큼 난제였던 어업협상, 막판에 타결
이동원(左), 김동조(右)‘김-오히라 메모’(1962년 11월 12일)로 대일 청구권(請求權) 문제를 해소한 한·일회담은 7차 회담(64년 12월 3일 개시)에서 마무리된다. 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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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공개 ‘김-오히라 메모’는 엉터리”
김종필(JP) 전 총리의 증언은 상식으로 자리 잡은 일반의 통념을 부순다. 한·일 회담 50년의 기억은 새로 교정되어야 한다. 2005년 외교부는 3만5000쪽 분량의 방대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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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권 8억 달러 당시 우리돈 2160억 지금 물가로 8조, 예산 기준으론 327조
1965년의 대일(對日) 청구권자금 8억 달러는 당시 환율(달러당 270원) 기준으로 2160억원에 해당한다. 몇 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현재 가치를 따져봤다. 국내 물가상승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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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다 “일제 36년, 한국인에게 이익” 망언 … 홍진기 “우리 스스로 근대화했을 것” 반박
한국과 일본 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은 이승만 정부 때인 1951년 10월 20일 시작됐다. 그러나 61년 5·16 뒤 박정희 군사혁명 정부가 6차 회담을 열기 전까지 협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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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정 주역 JP, 아베에게 충고하다
올해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된 지 50주년 되는 해다. 한·일 협상의 돌파구를 열었던 김종필(JP·얼굴) 전 국무총리는 26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대인 아베 신조(安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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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 신문 내내 묵비권 … 간첩으로 결론"
1962년 초 주한 미군은 황태성을 신문했다. 그때 조사를 담당한 사람은 502군사정보단 소속 마이클 리(82·사진)였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지난 6일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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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은 큰 간첩 … 밀사 아니다" 50년 논쟁 결말
밀사(密使)냐, 간첩이냐’-. 황태성 사건의 50여 년 논쟁의 결말을 짓는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증언이 나왔다. JP는 21일 “북한 김일성은 5·16 혁명지도자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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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입학 때, 황태성 "가서 힘을 키워 때를 기다려라"
황태성 사건에 얽힌 ‘남쪽 두 사람’ 김민하(세계일보 회장·가운데·), 권상능(조선화랑 대표)씨. 지난 8일 조선호텔에서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왼쪽)와 만나 반세기 전 사건을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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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황태성 내려왔습니다" 박정희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박정희 최고회의의장(左), 황태성 무역성 부상(右)5·16 성공 100여 일 뒤인 1961년 8월 말, 북한 무역성 부상(副相·차관)을 지낸 황태성이 휴전선을 넘는다. 그는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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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잘 안다" 김일성 남파 승인 … '밀사'로 자처했지만 간첩죄로 처형
황태성과 친구였던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황태성은 1961년 55세 때 남파된다. 그 이전 행적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제시대 경기도 경찰부가 작성한 ‘감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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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 세상을 말하다] 心平氣和
지난달 초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 김종필 회고록이 세간의 화제다. 그 동안 잘못 알려져 있었거나 또는 새로 밝혀지는 내용이 하나 둘이 아니라 독자의 관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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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 세상을 말하다] 心平氣和
지난달 초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 김종필 회고록이 세간의 화제다. 그 동안 잘못 알려져 있었거나 또는 새로 밝혀지는 내용이 하나 둘이 아니라 독자의 관심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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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국가 대본에 필요하면 국민 납득시키는 게 정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1986·사진)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과 첫 만남(1961년 6월 27일)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비서실을 거쳐 안내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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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옥 말라리아 걸리자 JP, 돌봐주다 사랑 싹터 … 박정희 "친딸 같은 조카"
김종필 전 총리가 결혼 직후인 1951년 초봄 아내 박영옥 여사와 대구 달성공원에서 포즈를 취했다.김종필(JP) 전 총리가 아내 박영옥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50년 6·25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