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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국가 대본에 필요하면 국민 납득시키는 게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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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1986·사진)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과 첫 만남(1961년 6월 27일)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비서실을 거쳐 안내된 100여 평이 되어 보이는 넓은 방에 들어서자 군인 몇 사람과 함께 강직한 인상의 검은 안경을 쓴 사람이 저쪽에서 걸어왔다. 박정희 부의장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방안에는 자못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박 부의장의 첫인상은 아주 강직해 보였다.”

 박정희는 “(일본에서)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병철은 “의외로 너무나 부드러운 음성에 안도감을 느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된 경제인들에 대한 변호와 함께 이들을 처벌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경제인들이 탈세와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것은 전시 비상사태하의 비합리적인 세율 때문이라고 호소했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고 세수가 줄어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이병철은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박정희가 “그렇게 되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자 이병철은 “국가의 대본(大本)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박정희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날 박정희와 만남을 계기로 이병철은 호텔 연금 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구속된 경제인들도 함께 석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부정축재자 제1호인 나만 호텔에 있다가 먼저 나가면 후일 동지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느냐. 나도 그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경제인들이 모두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벌금만은 면할 수 없었다. 삼성은 당시 전체 경제인 벌금의 27%인 103억400만환을 부과받았다. 이병철은 박정희를 다시 만나 벌금 대신 공장을 건설해 그 주식을 정부에 납부하게 하는 방안을 제의했다. 그의 제안은 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투자명령이라는 법령으로 실현됐다.

정리=전영기·최준호·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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