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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다 “일제 36년, 한국인에게 이익” 망언 … 홍진기 “우리 스스로 근대화했을 것” 반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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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과 일본 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은 이승만 정부 때인 1951년 10월 20일 시작됐다. 그러나 61년 5·16 뒤 박정희 군사혁명 정부가 6차 회담을 열기 전까지 협상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채 10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 양유찬 수석대표가 이끈 1차 회담은 일본이 한국에 ‘역(逆)청구권’을 주장하면서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일본 측은 “한국이 일본에 재산청구의 권리가 있다면 일본도 식민지 시대 한국에 있던 일본인 재산에 대해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차 한·일 회담(53년 10월 6~21일)은 ‘구보다 망언’으로 협상 개시 2주 만에 결렬됐다. 일본 수석대표인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당시 51세·오른쪽 사진)는 한국의 청구권 주장에 대해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일본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한국 측 홍진기(당시 36세·왼쪽) 대표는 “마치 일본이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으나,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국 대표단은 구보다 발언을 ‘회담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묵과할 수 없는 망언’으로 규정해 회담을 중단했다. 여기에 일본 오카자키 가쓰오(岡崎勝男) 외상까지 “구보다 발언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한 것일 뿐”이라는 공식입장을 표명함으로써 한·일 회담은 이후 4년 반 동안 열리지 못했다.

 뼛속 깊이 항일주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망언에 ‘평화선’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57년 제4차 회담에 김유택 주일 대표부 대사를 보내면서 “적어도 마흔 살 이상 한국인이 다 죽은 후가 아니고서는 (한·일 국교정상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4·19혁명 후 민주당 정권은 한·일 회담에 적극성을 보였다. 60년 10월 5차 회담이 열려 대일 청구권 재산의 구체적인 목록에 대해 협상을 시작했다. 이듬해 5·16이 일어나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이케다 총리와 만나면서 회담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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