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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혁명정부 지키기 위해 수방사 창설 … 한국군,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 계기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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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61년 6월 1일 후암동 미군부대 서 열린 수도방위사령부 창설식. 사령관 김진위 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는 5·16의 산물이다. 탄생의 산파역은 5·16의 기획연출자 JP(김종필)다. 5·16 거사의 분기점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체포(18일 새벽)다. 그 직전까지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궐기군 진압을 구상했다. 그 의욕의 근거는 작전지휘권. 주한미군 사령관(유엔군 사령관 겸직)은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보유했다. 6·25전쟁 직후 대통령 이승만은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넘겼다(1950년 7월 15일, 대전 협정). 후퇴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박정희의 궐기군 출동은 작전지휘권의 침해, 위반이다. 매그루더는 분노했고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한림 체포 뒤 달라졌다. 그는 ‘현상 인정’ 쪽으로 선회했다. 양측은 상황 정리안을 모색했다. 대장 매그루더의 카운터 파트는 중령 JP다. 미군 측 요구는 상처 난 지휘권의 회복, 한국군 지휘부의 재발 방지 약속이었다. JP는 선·후로 대응했다. “군사 혁명정부를 보호할 수 있는 군사력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런 뒤 동원한 전투부대는 돌려보낸다. 앞으로 미군 사령관의 작전지휘권은 지켜주겠다”고 했다. 그 ‘군사력 편성’이 수방사 창설(사령관 김진위 소장)이다. JP는 구체안을 제시했다. “전방의 비전투부대인 헌병부대를 차출하고, 후방의 예비사단 일부 부대를 뽑자”고 했다. 매그루더는 “굿 아이디어”라고 동의했다. 그때까지 서울엔 특정 방어부대가 없었다. 건군 초기 수도경비사령부가 있었지만 수도사단에 편입됐다. 그 후 6관구 사령부(영등포)가 서울까지 담당했다. 26일 장도영과 매그루더 이름으로 3개 항의 공동성명안이 발표됐다. 내용은 ①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 복귀 ②해병 제1여단과 6군단 포병단의 원대복귀 ③ 제30, 33사단(후방 예비사단, 일부 부대 5·16에 합세), 제1공수여단 및 전방 5개 헌병중대를 국가재건최고회의 통제하에 둔다 였다.

 수방사의 새로운 창설은 ③항에 따른 것. 수방사와 공수부대에 대한 독자적 작전권 행사가 가능해졌다. 30, 33사단에서 1개 대대씩 차출했다. 그 부대가 30대대(그 후 30경비단), 33대대(33경비단)로 재구성됐다. 헌병중대는 제5헌병대가 됐다. 후암동 미군부대에서 창설식을 가졌다. 그 후 부대 이전(62년 6월 필동, 현재 남태령), 명칭 변경과 확장(63년 수경사, 5공 때 군단급 수방사)을 거듭한다. 처음엔 혁명 지원·수비대 창설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권 친위부대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30, 33 대대의 임무는 청와대 방어다. 엘리트 장교의 코스가 됐다. 대통령 전두환은 중령 시절 수경사 30대대장이었다. 수경사령관 윤필용 사건(73년)도 있었다. 12·12 때 수경사와 공수단은 전두환 신군부의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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