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83)|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4계 여록(110)|장기영

    체신장관으로 입각하면서부터 나는 다시 이 박사를 가까이 서 모시게 됐다. 이젠 국가 최고통치자인 대통령과 그를 보필하는 각 원의 관계에서. 나의 입각은 전연 뜻밖이었다. 49년

    중앙일보

    1972.06.12 00:00

  • (479)경무대 사계(106)우제하(제자 윤석오)

    오랜 투병 끝에 이 박사는 65년7월19일「하와이」의 「마우날라니」병원에서 서거했다. 만90세.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된 파란과 영욕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프란체스카」부인과,

    중앙일보

    1972.06.07 00:00

  • 우촌 전진한

    삼국지에서 보면 「인물」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우선 「뜻」이 있어야 한다. 이상이라도 좋고, 일상이라도 좋고 높은 기상이라도 좋다. 무엇을 하겠다는 「뜻」이 있

    중앙일보

    1972.04.24 00:00

  • (438)제26화 경무대 사계(65)

    2대 대통령의 취임식은 8월15일 상오 10시 서울의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정부는 환도하지 못했더라도 부산에서 이 뜻 있는 기념식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는 대통령의 고집 때문

    중앙일보

    1972.04.20 00:00

  • (311)|하늘의 전쟁(2)

    1951년10윌11일부터 강릉의 전진기지에서 「독자작전」을 개시한 한국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대는 연일 북한상공에 출격하여 주로 적 보급로를 강타하였다. 대장 김영환 대령의 본

    중앙일보

    1972.04.05 00:00

  • 닉슨 안보회의 소집

    월맹군의 비무장지대(DMZ) 남침에 깊은 관심을 쏟고 있는 「닉슨」 전대통령은 3일 고위거사 및 외교문제보좌관들로 구성된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히고 월남사태에 관한 백악관전략회의를 열

    중앙일보

    1972.04.04 00:00

  • (404)경무대사계(31)|고재봉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비서실 직원은 이 박사 말대로 완전히 「사비서」였기 때문에 4·19가 날 때까지 발령장 없이 일을 했다. 정부의 부처에서 일하던 사람이 비서실로 들어올

    중앙일보

    1972.03.10 00:00

  • (293)휴전회담의 개막(7)

    미국이나 「유엔」은 한국정부의 휴전반대 태도를 처음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과 「유엔」은 바로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적 역할을 했으며 공산침략을

    중앙일보

    1972.02.21 00:00

  • (382)-제자는 필자|경무대 사계(9)

    『귀관은 어째서 이 박사의 도미를 방해하고있나.』 『네, 죄송합니다. 그러나 각하, 이 박사는 미군정에 비협조적입니다. 군정시책의 거의 전부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방해하고 있기 때

    중앙일보

    1972.02.14 00:00

  • 한반도에 미아주 정책 성패 달려|해방직후의 미 대한 기본정책

    【워싱턴 22일 UPI 동양】「해리·S·트루먼」 전 미대통령은 지난 1946년 연합국의 반대가능성을 이유로 들어 미국은 한국이 일본배상금의 한몫을 얻도록 노력하지 않아야 된다고 결

    중앙일보

    1971.12.23 00:00

  • 김 신민 당수에 호텔 방 양보

    10일 아침8시 중앙청국무회의실에서 열린 국무위원간담회는 빵과「코피」만으로 아침을 들며 2시간 가량 비상사태선언에 뒤따를 여러 가지 행정 조치를 협의. 이 자리에는 마침 이날 오전

    중앙일보

    1971.12.10 00:00

  • (296)(8)문제안

    제1차 공위에서 소련군 수석대표 「스티코프」의 연설 가운데는 그대로 넘길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전회에서 언급한대로 「스티코프」는 『조선인민을 해방했다』고 은인을 자처하고는 이어

    중앙일보

    1971.11.02 00:00

  • 청와대에 또 하나의 경사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 날인 1일 새벽 청와대 뒤뜰에서 기르던 꽃사슴이 새끼를 낳아 또 하나의 경사가 났다. 한편 박 대통령은 30일 각국 경축 사절로부터 신임장을 받는 자리에서

    중앙일보

    1971.07.01 00:00

  • 김 내각의 새 얼굴들|신임 각료 소감과 프로필

    신임장관들은 4일 다음과 같이 취임 소감을 말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맞춰 신축성 있는 외교 정책을 펴 나갈 것이며 특히 통일 기반 조성을 위한 외교 활동을 강화하겠다. 무거운

    중앙일보

    1971.06.04 00:00

  • 협상시대로 가는 「평화」의 러쉬 아워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비신스키」 소련 외상이 대변하던 『대결의 시대』가 『화해와 협상의 시대』로 전환하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중동휴전의 성립과 독·소 불가침조약의

    중앙일보

    1970.08.13 00:00

  • (49)|남과 북의 형세 (12)|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1949년에 들어 미군의 한국 철수가 확고 부동한 정책으로 굳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미 교섭의 방향을 바꾸었다. 즉 효과가 없는 철군 반대 운동을 중지하고, 그대신 독자적인 국

    중앙일보

    1970.07.22 00:00

  • (48)|남과 북의 형세 (11)|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1948년9월 소련은 북괴 집단의 요청에 따라, 주둔군을 1949년1월까지는 북한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하겠다고 발표하고 미군도 남한으로부터 동시에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물론

    중앙일보

    1970.07.20 00:00

  • (47) 남과 북의 형세 (10)|「6·25」20주… 3천년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6·25전의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한마디로 허공에 떠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막대한 인명과 물자를 소모한 대가로 아시아에서 군림했던 미국은 중국 대륙이 공산 수중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중앙일보

    1970.07.17 00:00

  • "닉슨결단 관철여부가 문제"

    박 대통령과 육 여사는 6일 낮 청와대 출입자들을 초대, 점심을 나누면서 약 1시간40분 동안 환담.『얼굴들이 하얀데 지방으로 끌고 다니면서 까맣게 태워줘야겠어…』란「조크」로 말을

    중앙일보

    1970.05.07 00:00

  • 북폭 필요하면 계속

    【워싱턴4일AP동화】미국방성은 4일 월맹군 미사일과 대공포대에 대한 일련의 대규모 폭격을 중지했다고 발표하고 그러나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대규모의 폭격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련

    중앙일보

    1970.05.05 00:00

  • ④-가장 길었던 3일④

    25일 아침 7시 조선「호텔」을 숙소로 정하고있는 임병직 외무장관(전 대기대사·77)은 요란한 전화 소리에 잠이 깼다. 장택상씨(고인) 다음으로 2대 외무장관에 취임한 임 장관은

    중앙일보

    1970.04.08 00:00

  • 무임소 업무에 묘한 반응

    0....박정희 대통령은 13일 청와대를 방문한 자유중국 손운준 경제부장을 맞은 자리에서 『공산주의와 대결하자면 반공국가들의 경제자립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한·중 두 나라의 경제협

    중앙일보

    1970.03.14 00:00

  • 「협상 철학」재 천명

    「닉슨」대통령은 연두 교서라는 이름의 『1년지계』를 내 놓은지 한달도 못돼 미국의 『10년지계』에 해당하는 70년대 세계 정책 교서를 이례적으로 발표했다. 『공약을 했기 때문에 개

    중앙일보

    1970.02.19 00:00

  • 10년후의 세계…어떻게 되나|초대국의 한계

    외교정책이 거만스러운 신화의 영역으로 되어 있는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다른 직업에서는 거만스러운것은 「마이너스」가 된다. 그러나 외교의 분야에서는 그것은 「실로 외교관

    중앙일보

    1969.11.0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