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제26화>경무대 사계(106)우제하(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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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거와 장례>오랜 투병 끝에 이 박사는 65년7월19일「하와이」의 「마우날라니」병원에서 서거했다. 만90세.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된 파란과 영욕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프란체스카」부인과,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간 양자 인수씨가 임종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척과 친지들은 이화장에 빈소를 차렸고 운구를 위해 황규면씨와 임철호씨가 다음날「하와이」로 떠났다. 황씨는 「마담」의 부름으로 「하와이」에서 비행기표를 보내 떠난 것이며, 임씨는 자비로 간 것이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불명예스런 퇴진을 했다하더라도 독립운동을 한 공로나 초대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을 감안해 으례 장례는 국장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20일 국무회의는 장례를 「국민장」으로 양해했다. 정부당국의 얘기는 국장을 고려했으나 4월 혁명단체의 극한적인 반대로 이렇게 됐지만 국장 못지 않은 예우를 하겠다고 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이화장 호상소는 물끓듯했다. 결국 나와 몇몇 사람이 국장이 안될 바에는 가족 장으로 하자고 강력히 주장해 이화장은 별도로 장례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가족 장을 할 채비를 차렸다.
나는 그 다음날 오후에 열린 장례준비회의에서 국민장을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석제 총무처장관=부득이 국민장을 해야겠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장을 하더라도 국장 못지 않게 하겠읍니다.
나=국장을 안해준다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정부가 국장을 할 생각이 없지 않은데 반대단체가 있어 못한다면 국민장을 국장 못지 않게 하면 거기에도 반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불상사라도 난다면 이 박사 유지에 어긋나는 일이니 국민장은 필요 없습니다. 가족 장으로 하겠읍니다.
윤치영 서울시장=우제하씨, 당신이 뭐요. 미망인이 국민장을 좋다했으니 그 뜻을 받아줘야지 이화장 호상소의 친척들이 무슨 권한이요.
나=윤 시장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나 국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읍니다.
동산(윤치영)은 그후에도 몇 차례 나와 인수씨에게 국민장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했으나 우리는 완강히 가족장을 고집했다.
국내에서 장례절차문제로 옥신각신하는 동안 「하와이」에서는 운구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존슨」미국대통령은 운구를 위해 미 공군 특별기를 제공했다.
22일 「호놀룰루」의 한인교회에서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충격과 피로에 지친 「마담」은 쓰러져 졸도 직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이 박사의 주치의였던「토머스」민의 만류로 영구환국행렬에 끼지 못하고 영결식이 끝난 뒤 인원 했다. 한인교회에서의 영결식에서 이 박사의 관은 황규면·「월버트」최·오중정·김현철·김학성·최백열씨에 의해 운구됐다. 이 영결식에는 인도주재 총영사인 임병직씨와 전「유엔」군 사령관「밴폴리트」장군 및 미국·월남·일본·「파키스탄」등의 대표가 참석했다고 한다.
「밴폴리트」장군은 14명의 영구환국 호송행렬에까지 끼여 이화장에 왔다.
23일 오후 김포공항의 유해 봉영식에는 삼부요인·외교사절·일반시민 등 5천여명이 나왔으며, 이화장까지 이르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만 유감된 것은 교통혼잡을 염려한 당국에서 운구 행렬을 시속 40㎞이상으로 몰아쳐 일반시민들이 추모의 정을 표시할 새가 없었던 점이다. 운구는 해왔으나 이화장엔 병풍·돗자리는 물론 그릇도 없어 우리 집에서 모두 가져갔다.
가족장을 하기로 정한 우리측은 정부의 지원을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정부측은 장례보조비 5백만원·꽃차·3군의 장대를 떠맡기다시피 했다.
장지는 할아버지가 대통령 때부터 스스로 정해놓았던 국립묘지의 공작봉 중턱으로 정부측이 배려해 줬다. 이곳이 안되면 양녕대군 묘소 근처로 장지를 정할 준비까지 했었다.
이 박사가 공작봉 중턱을 자신의 묘지로 봐놓은 경위는 대충 이렇다.
6·25가 끝난 뒤 이 박사는 국군 묘지터를 잡기 위해 몸소 엄홍섭 육군 공명감과 황 비서를 데리고 「헬리콥터」로 관악산일대·남한산성·망우리둥지를 답사했다.
결국 세 번째 답사 끝에 국군묘지가 동작동으로 결정됐다. 국군묘지 터를 둘러본 이 박사는 공작봉 중턱 2백70여평의 터를 가리키며 『후에 저 자리엔 내가 들어갈 수 없겠나』하고 엄공병감에게 말해 그후 이 박사 묘지 터로 유보해 두었던 것이다.
27일의 장례에도 당국에서는 교통혼잡을 줄이기 위해 이화장→돈화문→중앙청→시청→청파동굴다리까지는 도보로 가고 다음부터는 군용차편으로 동작동까지 가는게 좋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우리는 거절했다.
아침8시에 이화장을 떠난 장례행렬은 종로5가→광화문→이화여중→정동교회→시청→동작동「코스」를 장장 8시간동안 도보로 갔다.
하관할 때 별안간 한줄기 소나기가 내렸다. 우리는 90평생을 조국만 생각한 거인의 죽음에 하늘도 슬퍼하는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다. <끝>

<편집자 주>1백6회로 「경무대사계」의 본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은 경무대사계의 「여록」으로 이 박사를 국내외에서 가까이 모셨던 몇 분의 『내가 아는 이 박사』를 실어 이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첫 번째 집필해주실 분은 체신장관 등을 지낸 장기영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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