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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전쟁영웅 백선엽의 휴전회담 일지 "국군은 강해져야 하고, 힘만이 모든 걸 해결한다"
1951년 7월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왼쪽에서 넷째)과 함께 한 유엔군측 휴전협상 대표. 왼쪽 셋째가 백선엽 장군. [중앙포토] 6ㆍ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오랫동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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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70년대 한국 외교 기반 닦은 최장수 외교 수장
1977년 1월 27일 박동진 외무장관(왼쪽)이 외무부 업무계획을 보고받기 위해 서울 세종로 중앙청(1995년 철거)으로 들어가는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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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어보 드디어 환수한다
6·25전쟁 당시 미국으로 불법 반출된 문정왕후 어보가 60여년 만에 한국으로 반환된다. LA카운티박물관(LACMA)은 19일 한국의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스님)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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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미술관 "어보 도난 입증 자료 더 필요"
김정광 미주불교문화원장, 안민석 민주통합당 의원, 혜문스님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김준혁 경희대 역사학 교수(왼쪽부터)가 11일 문정왕후 어보 반환 문제를 놓고 LA카운티미술관(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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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재평가는 학자들에게 맡겨둬야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성균관대 사학과 서중석(63·사진) 교수는 “세계사에서 한국·일본·중국은 근대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나라들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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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53) 다시 만난 맥아더
1953년 5월 미국을 방문한 백선엽 장군(앞줄 왼쪽)이 미 웨스트포인트를 찾아가 50년 8월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에 맞서 함께 싸웠던 존 마이켈리스 준장과 악수하고 있다. 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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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1128일의 기억]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8) 워싱턴서 전우들과의 해후
1953년 5월 미국을 방문했던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정면으로 걸어오는 사람 중 오른쪽)이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생도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 미 육군참모총장 로튼 콜린스의 초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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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한표욱 前 유엔대사 별세
"해방 이후 숨가빴던 시절 한국 외교사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영원한 외교관'을 잃었습니다." 25일 오전 3시30분 한표욱(韓豹頊) 전 유엔대사가 87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윤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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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한일 회송(93)
내가 미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본부에서는 조정환장관서리가 1년4개월간의 서리생활을 끝내고 56년12월31일 정식으로 장관에 임명됐다. 또 일본에서는 「하또야마」정권이 물려나고「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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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3)제80화 한일회송(92)
한일회담이 교착된 55, 56년 2년간 나는 이대통령의 엄명에 따라 주한미대사관측과 한미우호통상및 항해조약체결에 진력해 56년 가을에는 그 서명절차만 남겨두었다. 이대통령은 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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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5) 제80화 한일회담(84)화해분위기 깨져
북한 인정발언, 회담재개 전망에 찬물 54년12월초 사회당의 지지를 얻어 자유당의 「요시다」 (길전무) 수상으로부터 정권을 쟁취한 민주당의 「하또야마· 이찌로」일본수상은 12월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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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7)제80화 한일회담(76)-미국의 중재
미국측의 한일회담재개를 위한 집요한 권유와 조정활동에 못마땅해하던 이대통령의 분노는 54년7월27일「아이젠하워」미국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극적으로 폭발했다. 후술할 터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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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2)-제80화 한일회담(21)|수석대표 양유찬씨
이승만대통령이 한일회담을 불과 1주일 남짓 앞두고 양유찬주미대사를 수석대표에 전격적으로 임명한 것은 이박사다운 포우이었다고나 할까. 하옇든 세간의 화제를 낳기에 족했다. 우선 뜻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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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2)-제80화 한일회담(11)
국회는 51년7월16일부터 3일간 대일강화조약초안을 토의했다. 국회는 임정이 2차대전중에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실지로 중국에서 참전한 사실을 들어 우리가 정식으로 조약조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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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2)동사이몽-제80화 한일회담(1)
「한일회담」의 집필을 맡은 현민 유진오박사는 51년 1차 한일회담대표, 50년대말 재일교포 북송반대를 위한 국제회의에 참가, 민주당정권시절 제5차 한일회담수석대표를 맡아 한일회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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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9)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집필을 마치며
나는 60년2월말 3·15총선거전이 시작될 무렵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일시 귀국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진해별장으로 귀국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이대통령은『곧 정·부통령선거가 있 으니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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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7)제74화 한미 외교문화요람기(84)
양유찬 대사와 내가 워싱턴에서 하도 일본을 비난하고 다녔더니 정년초 「델레스」 국무장관은 양 대사를 세 차례나 불러 일본을 너무 욕하지 말라고 귄유했다. 「덜레스」의 충고에도 꺾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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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4)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81)
예비회담에 이어서 열린 제1차 한일회담은 52년4월21일까지 계속되었다. 우리측에서는 예비 회담 때 교체 수석대표였던 신성모씨가 빠지고 김용식 주일대표 부 공사가 교체수석이 되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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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재한 일 재산권: 포기조약 찬 약에 명시|연합국 일원으로 참석은 실현 안돼|옵서버 자격으로 임병직 대사 등 3명을 파견
정부는 미국의 대일 평화조약 초안과 관련한 대미각서를 보낸 것과 비슷한 시기인 51년7월20일, 유진오 고려대 총장과 임송본 조선식산 은행총재를 일본에 보내 한일회담에 관한 사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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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9)|제74화 한미외교요람기|재한일재산권 문제|미와의 협정근거, 이미 한국귀속 주장
주미 대사관이 한일 문제 때문에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5l년 3월게 부터였다. 그때 미국은 「애치슨」국무장관의 진두지휘아래 「덜레스」특별 보좌관과「앨리슨」차관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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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외신기자 클럽 연설|이 대통령 미 의회 연설을 중점 해명
한미 양측 대표들이 합의해 작성한 회의 의사록의 주요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① 한국은 유엔을 통한 통일노력에 있어 미국과 협조한다. ② 유엔군 사령부가 한국의 방위 책임을 부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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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4화 한미외교 요람기(69)|험악한 정상회담 분위기|「아이크」가 한-일 정상회담 필요성을 강조하자|"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 이 대통령 퇴장
「아이젠하워」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 직전에 서울에서 중립국 감시의원만의 공산측 대표단을 내쫓게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치밀한 계획 하에 단행한 외교적 술수였다. 이 대통령은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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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이대통령 방미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는 나의 주미대사관 시절을 통틀어 가장 감격적이고 희열에 찬 행사였다. 방미를 전후해 이대통령은 미국매스컴에 거의 매일 오르내렸으며 특히 휴전협상과정을 통해 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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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이대통령 방미 초청
휴전회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끈질긴 고집 앞에 몇번이나 가슴을 죄었던 미국은 한국정부가 3개월 시한부의 휴전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응했던 제네바정치회의가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