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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8)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26)고려공청동맹

    아숙원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바로 이튿날인 1925년4월18일 서울 훈정동4번지 박헌영의 집엔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꽉 들어찼다. 박의 집은 종묘 앞

    중앙일보

    1973.03.17 00:00

  • (707)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25)김재봉 당

    중국요리점 아숙원2층에는 20여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오랫동안 벌러오던 조선공산당의 결성대회를 한참 진행 중이었다. 전회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주연 상을 앞에 차러 놓고 짐짓

    중앙일보

    1973.03.13 00:00

  • (706)내가아는 박헌영

    1925년4월17일 하오1시쯤, 지금 서울을지로1가에있는 중국음식집 아숙원2층의 연회실에는 20여명가까운 청년들이 점심을 겸해서 연회라도 하는듯이 모여 앉아있었다. 요리가 연방

    중앙일보

    1973.03.12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705)|내가 아는 박헌영(제 31화)

    민중 운동자 대회 이른바 사회주의 사상운동이 국내에 널리 전개되자 「코민테른」의 대한국 관계기관인 「꼬르뷰로」(고려국)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안에 공산조직을 만들려고 광분했다.

    중앙일보

    1973.03.10 00:00

  • (702) 내가아는 박헌영(20) 박갑동

    신문기자시대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박헌영은 1924년 9월께 조선일보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무렵 송병준이 경영하던 조선일보는 경영난에 빠져 동아 영업국장으로 있던 홍증식이 신석우의

    중앙일보

    1973.03.07 00:00

  • 본사부설 동서 문제연구소 제2회『세미나』북한체재|정권의 형성|주제발표 오병헌(성대교수) 신승권(중앙대 교수)

    오병헌 교수가 발표한 「공산주의 지배체제의 비교연구」는 주로 정권의 형성·성장과정에 주목할 만한 논문이었다. 오 교수는 세계의 14개 공산당 집권국가(「칠레」포함)를 무려 7개의

    중앙일보

    1973.03.03 00:00

  • (699)제 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7)배성회(배풍회)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청년회이외에 국내에는 일본유학생들로 구성된 배성회(배풍회)가 또 하나의 유력한 청년단체로 등장했다. 북풍회는 전회에서 잠깐 얘기한 것처럼 일본 유학생출신인 김야

    중앙일보

    1973.03.03 00:00

  • 서울청년회

    지금까지는 박헌영이 서울을 떠나 상해를 무대로 고마공산당의 조직활동에 가담, 훈련을받그 다시 국내에 잠입할때까지의 경위를 대충 이야기하였다. 그럼 박헌영이 해외에 나가 있는동안 국

    중앙일보

    1973.03.02 00:00

  • (697) 내가하는 박헌영(15) 박갑동

    첫국내잡인 극동인민 대표회의에 참석한 박헌영은 귀로에 「이르쿠츠크」에 들러 1주일 가량 머물렸다. 물론 「모스크바」에 갈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공책원인 김태연(단야) 임원근과 셋이서

    중앙일보

    1973.03.01 00:00

  • (684)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2)추종의 계기

    내가 처음 박헌영의 노선을 따르고 그를 추종하게 된 것은1936년 일본 「와세다」(조도전 대학)의 제1고등학원에 입학하고서부터였다. 입학시험은 당시 한국 안의 각 고보를 졸업한 학

    중앙일보

    1973.02.14 00:00

  • 겹쓴「궁 감투」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맹자가 그린 대장부상이다. 『거천하지광거, 입천하지정위, 행천하지대도, 득지여민유지, 부득지독행기도, 부귀불능음, 빈천불능이, 굴무불능이

    중앙일보

    1973.01.30 00:00

  • (644)서북청년회-제30화

    유혈의「스타트」그날밤 우리 일행은 대뜸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열기로 결의해 버렸다. 그 날 낮 3·1절 식전에서 이북 실정에대한 고발이 없어 화가 치밀어 있

    중앙일보

    1972.12.25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643)서북청년회(3)문봉제

    첫눈에 비친 46년 봄의 서울은 꼭 사공 없는 나룻배였다. 굳게 믿었던 10만 광복군은 헛소문에 불과했고 장안의 거리는 치열한 좌·우 공방의 무대로 변해 있었다. 당시는 박헌영의

    중앙일보

    1972.12.23 00:00

  • (642)서북청년회(2)문봉제

    서청은 평남 동지회→호안 청년회→서청으로 이어지는 전사가 있다. 평남 동지회와 평안청을 서청의 전신이라고 내세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두 모임이 서청의 모체였음은 틀림없다. 다

    중앙일보

    1972.12.22 00:00

  • 새로운 도전속 세계의 기업(3)|동서 경제 교류의 확대 (하)

    현재 서구에는 『붉은 「세일즈맨」』의 활동이 눈부시게 전개되고 있다. 1848년 「카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유럽」에 공산주의라는 요괴가 배회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지

    중앙일보

    1972.11.10 00:00

  • |한 여인의 시한부 삶

    TBC-TV는 오늘부터 이재우 극본의 새 매일연속극 『생명』(본방 월∼금 밤9시, 재방 화∼토 아침 9시30분)을 방영한다. 지난 6일 1백34회로 마지막회를 낸 『외아들』에 이어

    중앙일보

    1972.10.09 00:00

  • 한국 고대사 무엇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당면한 민족적 과업이다. 이 과업의 추진을 위해 중앙일보사를 비롯한 4개 신문사는 공동으로 한국사 연구사업을 벌인다. 학계와 언론계가

    중앙일보

    1972.10.02 00:00

  • 남·북 생활의 단층을 깊었다|직접 대했던 이들이 말하는 북의 사람

    『북의 일행』54명이 서울에 머무른 지 4박5일-. 먹고 자고 보고 말하면서 그들이 남긴 일거일동은 분단 27년이 빚은 남북생활의 거리를 역력히 드러낸 것이었다. 숙소에서, 나들이

    중앙일보

    1972.09.18 00:00

  • 뜻밖에 받은 「북의 안부」

    장벽은 막혔어도 북에서 전한 안부는 금새 남쪽에서 화답이 나왔다. 살아 있는 사람끼리 주고 받는 맘이 전해진 것이다. 31일 하오 「조국통일민추전선」의 창단의 한 사람인 노량과 용

    중앙일보

    1972.09.01 00:00

  • (540)제26화 경무대 사계 여록 내가 아는 이 박사(167)

    이 박사가 김성수를 총리로 추천한 나의 끈질긴 주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조민당 당수 조만식을 고집한데는 또 다른 숨은 사실이 있다. 평양의 조만식과 서울의 이 박사 사이에는

    중앙일보

    1972.08.21 00:00

  • (539)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166)|윤치영

    대한민국의 수립과 관련한 두개의 명 연설을 이 박사는 자주기억하곤 했다. 하나는 한국문제가 「유엔」의제로 정식 상정되게 한 「로물로」「필리핀」대표의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메논」

    중앙일보

    1972.08.18 00:00

  • (537)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164)|윤치영

    이 박사의 민주의원으로 하여금 비로소 한국은 독립전취의 국제무대를 열고 나가게 됐다. 임정과 독립 촉성회와 기독교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국내정당·사회단체들이 미·소 공위의 소위조선민

    중앙일보

    1972.08.16 00:00

  • (536)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4계 여록|윤치영|

    45년12월30일 아침 고하 송진우가 괴한의 총에 쓰러졌다. 해방과 더불어 가장 기복이 심했던 독립전선의 최 일선에서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잊고 활약한 정치인이었다. 바로 전날 그는

    중앙일보

    1972.08.15 00:00

  • (535)(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62)

    4대국이 한국을 신탁관리 하겠다는 소식은 해방의 해가 넘어가기 전에 전파되었다. 우익계의 정당·사회단체는 물론 미군당국에서도 임정의 법통론이 한창 무르익어 경교장과 한민당은 독립의

    중앙일보

    1972.08.1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