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1947]

    1947. 1. 03 북조선소비조합 제5차 확대위원회 개최, 양곡수매사업에서의 농민의 자원원칙 결정 1947. 1. 07 면,리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실시키로 하고 중앙선거위원회

    중앙일보

    2005.08.09 10:40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사소송법]

    제1장 형사소송법의 기본 제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사소송법은 범죄와의 투쟁을 통하여 국가주권과 사회주의제도를 보위하고 인민들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보장한다 제2조 국가

    중앙일보

    2004.10.25 10:23

  • 남북공동 원폭피해 배상 촉구

    원폭피해자 문제와 관련, 대구지역 시민단체인 '원폭피해자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한우스님 등)은 남북한 공동으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촉구하고 배상이 실현되지 않으

    중앙일보

    2001.07.31 00:00

  • 日帝강압 산증거 검찰기록 대량발견

    친일파 이완용(李完用)총리대신 살해미수사건의 진술조서등 일제때 일본검찰의 수사기록과 정보관련 문건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대검 공안4과(丁炳旭과장)는 14일 검찰 자료보관실에 보관중

    중앙일보

    1996.08.15 00:00

  • 남녀공학 50년 연세大 행사 다채

    국내 대학 최초로 남녀공학을 실시한 연세대가 올해로 공학제 도입 50주년을 맞는다. 연세대는 16,17일 이틀간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앞으로의 도약을 다짐하는 기념식과 국제학술

    중앙일보

    1996.05.09 00:00

  • (4)"세계 원주민의 해" 특별기획시리즈|「아리랑」잘 부르는 아이누 촌로

    홋카이도에 살고 있는 60세 이상의 아이노 촌로 들은「조선의 민요」를 구성지게 부를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 리요…』해방직후까지 그들의 마을(코탄) 주변에서「조선아저씨」

    중앙일보

    1993.01.26 00:00

  • 「재일한국인 처우개선」제언 일측대표 오누마교수 동경대(일요인터뷰)

    ◎“식민지배 반성하면 「차별」없애야”/“일인 전쟁책임 정식사과 마땅/「법적지위」입법 불가능 아니다” 재일한국인 3세의 법적지위 및 대우문제가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한일간 최

    중앙일보

    1990.04.29 00:00

  • “재일교포 차별 없애야 한다”/한일 각계대표 204명 공개 제언

    ◎일선 법시안 제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문제와 관련해 일본정부의 자세를 비판하고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공개제언」이 한일 양국의 각계대표 명의로 23일 발표됐다. 민관식 아세아정책연

    중앙일보

    1990.04.23 00:00

  • "사할린 동포 귀국은 일본 책임" |내한 일 이가라시 의원 인터뷰

    『사할린에 남아 있는 한국인들을 고향에 돌아오도록 하는 일은 일본의 전후 책임에 관한 문제로그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마땅히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광복 43주년

    중앙일보

    1988.08.18 00:00

  • 장애자 대법관의 "인간승리"

    법원장서 승진한 김용준씨 『이처럼 영예로운 자리에 지명된 것은 선배나 여러 동료 법관들이 아껴주시고 도와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대법관에 지명된 김용준서울가정법원장(50)은

    중앙일보

    1988.07.08 00:00

  • "사후공개" 조건…전공화당의장이 남긴 장장 38시간의 녹음중계

    정구영씨는 정치보다는 변호사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랬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짧은 그의 정치생애다. 그는 신념에 성실했다. 그는 이 나라의 정치가 부딪쳤던 중요한 길

    중앙일보

    1984.06.07 00:00

  • (952)제34화 조선변호사회(27)

    내가 변호사로서 다룬 사건 가운데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사건 중의 하나에 흥남 질소비료공장 건설 당시 그 부지를 둘러싼 조선인 토지소유자와 그곳에 공장을 지으려던 일본인간의

    중앙일보

    1974.01.19 00:00

  • (950)제34화 조선인변호사회(25)

    수야중공 법무과장이 나에게 평양지법 진남포 지청 상석검사로 가라고 한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나를 상당히 생각해준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 무렵 조선인 판·검사는 아무리 벽지에

    중앙일보

    1974.01.17 00:00

  • (949)조선변호사회(24)|정구영

    백백교 사건이 경성지법 검사국에 계류 중이던 당시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직후 육군대장이던「하세가와」 총독을 경질하고 해군대장이요, 해군대신을 역임한 「사이또」를 새 총독으로 맞

    중앙일보

    1974.01.16 00:00

  • (943)|조선변호사회(18)-대구검사국 시절

    공소불수리사건이 있던 이듬해인 21년8월 나는 검사에 임관이 되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했다. 임지에 가보니 5명의 검사가운데 조선사람은 나 혼자 뿐이고, 판사로

    중앙일보

    1974.01.09 00:00

  • (938)-|조선변호사회(13)

    여기서 1920년 여름 일본과 조선은 물론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3·1운동 사건의 33인에 대한 공소부 수리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그 사건이 경성지방재판소에 계류 중이던

    중앙일보

    1973.12.29 00:00

  • (937)|조선변호사회(12)-경성의 사재사

    종형인 정구창은 어려서부터 교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단재 신채호와 매당 변영만(해방 후 산강이라 개호), 이기찬 등과 축일 상종하여 청국의 강유위·양계초·이홍장 등과 일본의 이등

    중앙일보

    1973.12.28 00:00

  • (936)|조선변호사회(11)-변호사 정구창

    조선인만의 「조선변호사협회」를 해체하고 일본인을 포함한 조선변호사협회를 새로 조직하자는 일본인 변호사들의 제의는 거부했지만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안을 조사할 필요가 있는 때에

    중앙일보

    1973.12.27 00:00

  • (935)

    미국인 대법원판와의 환담이외에 한가지 더 첨가해야 할 이야기는 당시 국제변호사회의에 통역으로 참석했던 수주 변형노에 관한 것이다. 수주는 물론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는 당시 불과

    중앙일보

    1973.12.26 00:00

  • (934)|조성변호사회(9)-국제변호사 대회

    초대 경성변호사회 회장에 장도변호사가 당선된 데 대해 일본인 변호사들이 불만을 품고 조선총독에게 그 인가 신청에 대한 각하운동을 벌이자 총독부는 이에 동조하여 장도회장 이하 전 임

    중앙일보

    1973.12.25 00:00

  • (933)제34화 조선변호사회(8)|정구영

    변호사법 공포 이후 한성에는 법령상「한성변호사회」를 두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상에나 있는 것이지 실제로 독립된 사무소를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종로 네

    중앙일보

    1973.12.24 00:00

  • (932)제34화 조선변호사회(7)|정구영

    초기에 변호사가 되려면 대개 구한국시대 및 통감부의 판·검사를 지낸 자이거나 대한제국이 실시한 변호사시험(단2회로 끝이 났다)에 합격한 자 또는 법부의 서기관 출신관료나 일본의

    중앙일보

    1973.12.22 00:00

  • (928)제34화 조선변호사회(3)

    3·1만세사건으로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계속 정국이 소란하자 당시 전수학교 당국은 3월3일부터 실시키로 예정했던 졸업 시험을 늦추고 미루다가 나중에는 이를 포기하고 그대로 졸

    중앙일보

    1973.12.1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