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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0)
60. 로드쇼와 10 ·26사태 돌이켜보면 1980년 초 도입한 복수통화 바스켓 방식의 변동환율제가 그랬듯이 모든 제도는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한때 장점으로 보이던 것도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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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0)
60. 로드쇼와 10 ·26사태 돌이켜보면 1980년 초 도입한 복수통화 바스켓 방식의 변동환율제가 그랬듯이 모든 제도는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한때 장점으로 보이던 것도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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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9)
59. 국제금융 4인방 나를 포함해 주병국(朱炳國) 전 재무차관, 홍재형(洪在馨) 전 부총리(현 민주당 의원), 이용성(李勇成) 전 은행감독원장 등 재무부 국제금융국 출신 4인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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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9)
59. 국제금융 4인방 나를 포함해 주병국(朱炳國) 전 재무차관, 홍재형(洪在馨) 전 부총리(현 민주당 의원), 이용성(李勇成) 전 은행감독원장 등 재무부 국제금융국 출신 4인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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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8)
58. 외환업무 일원화 당시엔 외자도입이라고 해 봤자 상업차관격인 연불수입 일색이었다. 연불수입은 초기엔 정부의 지급보증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종의 외상 수입이었다. 직접 투자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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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8)
58. 외환업무 일원화 당시엔 외자도입이라고 해 봤자 상업차관격인 연불수입 일색이었다. 연불수입은 초기엔 정부의 지급보증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종의 외상 수입이었다. 직접 투자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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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7)
57. 돌고 도는 환율 한국.대만.일본 등에 환율 인하 압력을 넣은 멀포드 미 재무차관보는 유대계였다. 이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멀포드가 유대 자본이 조종하는 국제통화 마피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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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7)
57. 돌고 도는 환율 한국.대만.일본 등에 환율 인하 압력을 넣은 멀포드 미 재무차관보는 유태계였다. 이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멀포드에 대해 유태 자본이 조종하는 국제통화 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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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6)
56. '연출'한 환율외교 베이커 미 재무장관을 만나고 돌아온 나는 김만제(金滿堤) 부총리(현 한나라당 의원)에게 "앞으로 환율에 관한 협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하기로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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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5)
55. 미국과 환율마찰 외자를 들여오는 것이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되도록 장기 자금을, 또 간접투자보다는 직접투자를 유치해야 하는데, 편한 맛에 단기 외자를 너무 많이 들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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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4)
54. 20년만의 환율개혁 1980년 2월 말 신병현(申秉鉉) 한국은행 총재는 재무부와 한은 양자의 입장을 반영한 환율결정 시스템의 도입을 수락했다. 그러느라 새 환율제도의 시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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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3)
53. 고정환율제로 회귀 1964년 7월엔 외국환관리법 시행령을 개정해 외환증서제도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외환증서 시장을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외환증서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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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2)
52. 변동환율제 채택 당시엔 '강철 같은 위장' 이 공무원의 출세 조건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공무원이 술을 끊는다는 것은 출세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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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2)
52. 변동환율제 채택 당시엔 '강철같은 위장' 이 공무원의 출세 조건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공무원이 술을 끊는다는 것은 출세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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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1)
51. 일생일대의 실수 1961년 제정된 외환관리법을 두번째 개정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외환관리법은 국내재산도피방지법을 사실상 내포하고 있었다. 국내재산도피방지법은 어떻게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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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0)
50. 국제금융차관보 외국 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면 국내에서 유학 경비를 부칠 수 있도록 해당 규정을 고친 덕에 많은 유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나는 자부한다. 나는 또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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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9)
49. 외환거래 자유화 권력기관 기관원, 재무부 출입기자 등의 반대 지원사격과 한국은행 외환관리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대부분의 외환거래 업무를 시중은행에 넘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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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8)
48. 암달러 시장 당시 재무부 외환과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후 민간 해외여행자를 대상으로 여행자심사위원회가 열렸다. 위원장은 외환과장이었다. 해외여행에 대해 사실상 정부의 허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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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7)
47. 외환과 명물 정주사 1950년대말 우리나라는 연간 무역액이 3천2백만 달러에 불과했고 해외여행자도 얼마 안 됐었다. 해외여행자들은 대부분 공무로 출장 가는 공무원이거나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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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6)
46. 한은 총재의 용기 5.16이 나던 해인 1961년에 외환관리법 초안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지하 문서창고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이 만들어 준 시안(試案)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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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5)
45. 미주지점 부실정리 당시 우리나라가 영국산 스카치 위스키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하면 미국산 쇠고기를 사 주지 않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통상 문제가 빚어질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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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4)
44. 소령에게 별 달아주나 영문도 모른 채 청와대에 들어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서석준(徐錫俊)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가 들어왔다. 장관이 차관인 내게 물었다.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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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3)
43. 환은과 나의 인연 조선환금은행이 한국은행에 통폐합되는 바람에 5.16 전까지 한은은 외환업무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그 후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수출 제일주의를 표방하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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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2)
42. 안기부장 부탁 거절 강경식(姜慶植) 재무장관(현 동부그룹 금융보험부문 회장)을 찾아간 나는 취임 후 첫 임원 인사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어디 보기나 합시다. " 봉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