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1165)|국립경찰 창설(3)|김태선

    해방이 된 8월15일부터 미군이 진주한 9월9일까지 24일간의 치안 공백기간에 국내에는 동 단위로 조직된 청년단체나 야경 원·치안대 등 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저마다 치안을 받는

    중앙일보

    1974.10.16 00:00

  •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존재·도명을 밝힌다.(52)|김광서의 항일투쟁

    1919년 초겨울 무기구입「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당령으로 들어간 김광서는 그 곳의 교포사회가 「시베리아」출병중인 일군들에 의해 무참한 학살, 압박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했다.

    중앙일보

    1974.08.31 00:00

  • (49)|제8장 「김일성 장군」의 정체|「김일성 장군」에 관한 전설과 증언

    우리는 이제까지 48회에 걸쳐 김성주의 경력이 철저히 날조된 것이었음을 보아왔다. 그러나 역사의 날조자들은 기를 쓰고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선전하며 김성주를 빼고는 「김일성

    중앙일보

    1974.08.12 00:00

  • (1101)제39화 범죄감식(2)|김구현

    조선총독부 법무국행형과 지문계에는 판임관 6급 상당의 주임 밑에 10명 내외의 직원들이 있었지만 초기에는 모두 일본인들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실상 지문계에서 일하기 시작한

    중앙일보

    1974.08.01 00:00

  • 아무런 이매량도 아니다.

    필자는 지난 5월23일자(일부지방 24일) 중앙일보 4면에 실린 홍종인씨의 글을 읽고 이에 대한 소감을 약간 피력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 글은 「이 무슨 망량이냐」는 제 하에

    중앙일보

    1974.05.27 00:00

  • (19)|그 전설·실존·오명을 밝힌다|조선 혁명군의 최후|이명영 집필

    조선혁명군의 숨통을 틀어막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일만 군경은 몇 차례에 걸쳐 대 포위공격작전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원인에 대해 대략 세 가지의 분

    중앙일보

    1974.05.13 00:00

  • (18) |조선 혁명군의 국내 진공|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 (성대 교수 정치학)

    조선 혁명군이 일제의 관동군과 교전한 대소 전투의 실적을 샅샅이 알아내기는 힘들다.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2년3월11일에 있었던 흥경성 서쪽 영릉가에서의 승전,

    중앙일보

    1974.05.08 00:00

  • (11)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이종락 부대의 종말

    김성주의 두목 이종락의 조선 혁명군 길강 지휘부는 중공당 만주 성위의 인정을 받지 못해 그 대원들도 개별 입당 원칙에 따른 만주 성위 예하 조직 가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

    중앙일보

    1974.04.19 00:00

  • (923)| 종로 YMCA의 항일 운동 (33)|전택부

    1921년 이승만이 신흥우에게 『의리의 지팡이』를 준 이후 국내에서는 흥업 구락부가 조직됐다. 포면상으로는 물산 장려 운동인 것처럼 ①돈을 모아 부를 이룩하자 ②국내의 물산을 장

    중앙일보

    1973.12.12 00:00

  • 천만원모금 목표세워 대학설립운동|미 교수초청 하경덕과 함께 농촌조사

    일제가 조선 민족의 반항이 무서워 마지못해 만든 복지정책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교육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사회와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 즉「사이또」(제등보) 총독은

    중앙일보

    1973.12.07 00:00

  • (915)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운동(25)|전택부

    일제의 장벽을 뚫는 또 하나의 작업은 한국YMCA가 세계연맹에 직접 가맹하지 못하고 반드시 일본YMCA를 통해서만 가맹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가맹 조항을 삭제하는 작업이었다. 창

    중앙일보

    1973.12.03 00:00

  • (913)제33화 종로YMCA의 항일운동(23)|전택부

    1914년이다. 이번에는 세계대전이 터졌다. 전쟁은「유럽」에서 일어났지만 그 불꽃은 조선 땅에 까지 튀어올 정도로 번져갔다. 월남은 멀리 이 불길을 바라보면서, 안에서는 학생들과

    중앙일보

    1973.11.30 00:00

  • (910)| 종로 YMCA의 항일 운동 (20)|전택부

    전회에서 말한바와 같이 유신회 일파가 합법적으로 YMCA를 점령하려던 흉계는 회원들의 힘으로 일단 제거되었다. 그러나 폭력으로 하는 그자들의 파괴 행위에 대해서는 YMCA는 견디

    중앙일보

    1973.11.27 00:00

  • (909)| 종로 YMCA의 항일 운동 (19)|전택부

    일제의 침략 행위를 제지하기 위한 회원 총회는 두번 있었다. 한번은 김린을 파면 결의한 이사회를 뒷받침해 주기 위하여 있었고, 다른 한번은 유신회 일파가 헌장을 뜯어 고쳐서 YM

    중앙일보

    1973.11.26 00:00

  • (873)골동품비화40년(14)|박중래(제자 박중래)

    우리조상이 쓰던 밥사발 국사발을 들고 가보라고 황공해 하던 일본사람의 기호는 실로 그 내력을 소상히 알면 이해가 갈 만도 하다. 일인들은 막연히 고려소가 기가 막히다는 얘기만 들

    중앙일보

    1973.10.15 00:00

  • (835)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4)

    서울 등지에서의 김일성의 포악하고 추잡스런 약탈행위는 말이나 글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6·25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 쳐지는 당시를 되새길 수

    중앙일보

    1973.08.30 00:00

  • 이우적 통해서 박 만나러 상경했으나 라이벌파인 이정윤 아지트로 안내돼

    죽창훈련을 받으러 가는 틈을 타 도망칠 기회만 느리다 해방이 됐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한동안 멍했다. 그러나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밤 늦게 동네에 돌아와보니 동

    중앙일보

    1973.04.11 00:00

  • (712)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30)예심의 올가미

    박헌영의 공판에 앞서 일제가36년의 통치기간동안 한국사람들의 사상동향에 따라 별별 이름의 법과 제도를 만들어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물론 온 국민에 대한 탄압을 어떻게 가중해왔는

    중앙일보

    1973.03.27 00:00

  • (711)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29)6월 사건

    1926년4월25일 이조의 마지막황제였던 순종이 승하했다. 순종의 승하는 나라를 빼앗긴 민중의 슬픔을 한층 더해 돈화문 앞에는 3천리 근역 백성의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국장 날에

    중앙일보

    1973.03.26 00:00

  • (640) |조선어학회 사건 (25)|정인승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옥살이였다. 함흥 구치소 2층 맨 첫 방이나, 다음이 이희승 최현배 이극노의 순서로 독방을 차지하고 들어 앉아 있었다. 옆방과의 사이 벽에 천장 아래

    중앙일보

    1972.12.20 00:00

  • (635) |조선어학회 사건|정인승

    한글의 맞춤법 통일안·표준어·외래어 표기법 등 사전 편찬의 기초 작업은 모두 완성되었으나 실제의 사전 편찬 업무는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다. 1929년10월31일 서울 수표동 「조

    중앙일보

    1972.12.14 00:00

  • (632)조선어학회 사건(17)|정인승(제자 정인승)

    「가갸날」은 1931년까지 음력으로 지켜오다가 1932년에 학회는 우리의 문학생활이 모두 양력으로 표준하는 현대에 있어 「가갸날」을 음력으로 지킨다는 것은 시대사조에 어긋나는 일

    중앙일보

    1972.12.11 00:00

  • (630)제29화 조선어학회 사건(15)

    일제경찰은 또 조선어학회의 자매기관인 조선기념도서출판관과 양사원의 설립에 대해서도꼬투리를 잡았다.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이란 1935년 조선어학회가 부설로 설치한 기관으로 돈 많은 유

    중앙일보

    1972.12.08 00:00

  • (629)제29화 조선어학회 사건(14)

    조선어학회는 실제로 1921년12월3일 휘문의숙(현 휘문 중·고등학교)에서 「조선어연구회」란 이름으로 처음 탄생했다. 그 당시 사립학교 조선어선생을 지내던 임경재(휘문학교 교장)

    중앙일보

    1972.12.0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