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제자=김홍일>|조선 혁명군의 국내 진공|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 (성대 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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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선 혁명군이 일제의 관동군과 교전한 대소 전투의 실적을 샅샅이 알아내기는 힘들다.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2년3월11일에 있었던 흥경성 서쪽 영릉가에서의 승전, 그리고 이 패전의 복수전을 시도했던 그달 말께의 일군과의 흥경성 전투에서의 승리 등은 만주국 수립 직후의 우리 혁명군의 불 퇴전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만주 사변 이전부터 우리 독립군을 숙적으로 삼았던 일제가 만주땅을 점령함에 있어서 그들이 이른바 「선비」라 불렀던 우리 독립군부터 소탕하려 했으며 따라서 이를 막아 싸웠던 우리 혁명군의 악전 고투 역시 만주 사변 이전의 독립군들의 고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국경 수비대 습격, 전과>
혁명군 제1사 사령을 맡았던 한검추씨 (본명 최석용·71·숭인동 거주)는 1935년 8, 9월께 통화현쾌대무자에서 일군 기병 1개 대대와 싸웠던 접전이 가장 통쾌했다고 회상했다.
적 30∼40명을 사살해 패주시켰으며 기관총 6정을 노획했는데 혁명군으로서는 아주 귀중한 기관총이 6정이나 입수됐으나 신식 총이어서 조작법을 몰라 곤란했었다고 한다. 최석용씨는 해방 후 국군에 들어가 1959년에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조선 혁명군은 만주에서 일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틈만 있으면 국내에도 진공 해 일제시설을 파괴하고 군경을 살상하기 여러 번이었다.
여러 갈래의 자료 속에 산견 되는 몇개의 사건 기록만 보더라도 그 불굴의 감투 정신은 역력하다.
혁명군의 이영걸 이하 14명의 대원은 중국인 반 만항 일 부대인 대도회군 15명과 합세, l932년9월에 평북의 초산 경찰서 및 수비대를 습격했으며 또 혁명군 제4중대장 김경근의 부하 3명은 1934년2월22일 평북 벽동군 오북면 북하동에서 경찰대와 교전을 벌였다.

<전북 일대까지 포섭 손길>
이와 같은 혁명군의 무력 진공과 함께 조선 혁명당과 군에서는 국내에 대한 정치 공작도 전개했었다. 혁명군으로부터 국내에서의 대원 모집 밀명을 받은 김현표는 국내에 들어와 1935년1월 고향인 전북 금산군 금산면 일대에서 김현두 등 여러 사람을 포섭하고 계속 이 지방 농민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면서 동지 모집에 암약하다가 체포된 일이 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상해 남경 등지에 있는 독립 운동 단체로부터 동지 모집 차 국내로 잠입하는 일들은 왕왕 있었으나 만주국 수립 후 만주로부터 국내에 잠입한 「케이스」는 이것이 처음이고 그것도 전북에까지 남하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 혁명군 김현표 사건은 총독부 측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었다.
1936년3월엔 조선 혁명 당원 유광호가 파견되어 왔다. 그는 무사히 서울로 잠입하여 조선 혁명당 국내 공작 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성공, 학생·운수 노동자들을 상대로 당원 모집에 박차를 가하다가 불행히도 발각되고 말았다. 유광호 이하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는데 서울에 국내 공작 위원회란 거점 조직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한번 총독부 측의 가슴을 서늘케 했던 사건이다.

<중·한 항일 동맹회 조직>
이 국내 공작 위원회가 붕괴되자 그해 10월 조선 혁명당은 정치부 비서 과장인 윤영배를 다시 국내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평양까지 잠입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앞서 1934년의 일만군경추계 대 공격 작전 때에 양세봉 총사령이 전사하는 큰 희생에 언급했지만 1935년 가을에도 일만군경의 대 공격 작전이 시작되자 조선 혁명군은 다른 항일 부대와 연합하여 이에 맞서야할 필요를 더욱 절감하게 됐다. 그래서 그해 9월20일 혁명군 제1사의 한검추 사령은 인접 지대인 동변도의 중국인 반만항일군의 거두인 대도회군의 왕봉각과 집안현 제8구에서 회동하여 중한 항일 동맹회를 조직하는데 합의했다.
이 동맹회의 목적은 『일제를 타도하여 동북 실지를 회복하며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한다』에 똑바로 명시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목적 달성을 위한 정책으로서 ①본 동맹회는 세계 민족의 항일 단체와 연락을 보지하며 ②군사 정책으로서 일만군의 군사 행동 및 정치적 시설을 파괴함과 동시에 행정 수단으로서 중한 양국의 신 정권을 수립한다고 표방했다.
중한 항일 동맹회 중앙 집행 위원회에는 정치 위원회와 군사 위원회를 두어 모든 업무를 관장케 했는데 정치 위원회 위원장은 고이허, 부위원장은 염정달 (중국인)이었고, 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은 왕봉각, 부위원장은 김활석이었으며 총사령은 한검추였다.
조선 혁명군과 대도회군 (정식 명칭은 요령구국 의용군)의 동맹으로 그 산하 병력은 1천5백명이었다. 동맹회 결성이래 조선 혁명군과 왕봉각군은 서로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하면서 아무 차별 없이 한인의 농가에 숙박했으며 조선 혁명군은 왕봉각군으로부터 무기·탄약을 공급받았고 그 탄약은 왕봉각의 근거지인 통화현 3구에서 제조되는 것이었다.

<동북인 혁명군과도 협정>
조선 혁명군은 왕봉각군과 동맹을 맺는데 그치지 않고 사상을 달리하는 중공당 만주성위의 동북 인민 혁명군과도 작전 협정을 맺기도 했다. 이러한 항일 통일 전선은 1936년 봄부터 더욱 진전되어 갔다. 그것은 일만군경의 포위 압축이 강화됨에 따라 모든 항일 부대에는 불가피한 자구책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 혁명군이 왕봉각군과 맺은 중한 항일 동맹회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목적과 인적 구성에 있어서 조국 광복을 위한 우리 독립군으로서의 주체성은 굳건히 지켜지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참가하고 있던 중공당의 동북 인민 혁명군에 있어서는 한인으로서의 주체성이 조금이라도 지켜질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동북 실지의 회복과 중국의 공산 혁명」이란 목적만을 표방했고 「조선의 독립」은 도외시되어 있었다. 인적 구성 면에 있어서도 한인들은 종속적인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외인 부대 또는 용병의 신세 밖에 아니 되었다. 김성주가 항일 부대에 가담했다면 이 동북 인민 혁명군의 대원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창피한 일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가공의 「조선 인민 혁명군」이란 것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병력 보충·군자금에 애로>
1936년에 접어들면서 일만군경의 포위 공격은 더욱 치열해졌고 저들의 교묘한 치안 공작은 점점 주효해서 조선 혁명군을 비롯한 여러 항일 부대의 기반은 위축 일로였다.
더우기 조선 총독부 경찰 측의 집요한 모략 작전이 조선 혁명군 박멸에로 집중됨에 따라 혁명군에서는 병력 보충과 군자금에 큰 애로를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혁명군의 사력을 다한 감투는 국내로 향해 더욱 처절했다. 1936년9월12일엔 평북 위원서 신천 파출소를 습격했고 동 13일에는 벽동서 봉곡 출장소의 월강 내사반을 습격했다. 그리고 이해 10월9일엔 혁명군의 정운준의 4명의 결사대가 벽동 경찰서 노장 출장소를 습격하여 순사 4명과 취사부 1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1정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조선 혁명군에 의한 잇단 국경 경비소의 피습, 특히 노장 출장소가 습격되어 순사가 4명이나 사살된 데다가 기관총마저 빼앗기고만 이 사건은 총독부 측을 굉장한 흥분과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총독부 측에서는 이러한 접종되는 사건들을 만주국 측과 관동군 측에 통보하여 평북 대안의 조선 혁명군 소탕에 화급한 대책을 강구하기에 나섰다.
북한의 역사책에는 조선 혁명군의 이러한 투쟁에 대해서는 물론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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