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506)-제자는 윤석오|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33)

    (8) 이 박사와 유석간의 문교장관 얘기가 간접으로 있은 한달 뒤 이 박사는 경무대로 유석을 불렀다. 이 박사는 이 자리서도 『내가 부원간 문교장관을 바꿀 생각인데 조 박사가 맡아

    중앙일보

    1972.07.10 00:00

  • (344)유격전(13)-옹진 학도병(1)

    1·4후퇴를 전후해서 2만 여명의 북한 반공 청년들은 서해안 일대 도서로 집결, 「게릴라」전을 전개했는데 이를 제일 먼저 탐지한 것은 우리 해군과 미군 정보대였다. 이 같은 사실을

    중앙일보

    1972.06.30 00:00

  • (341)유격전(10)

    단군설하구전의 바탕이 되고 있는 구월산에 접한 황해도의 은율·안악·신천·재령·장련·송화군 일대는 6·25전부터 북괴가 말하는 소위 최악의 「반경」지역으로 그들로부터 혹심한 탄압을

    중앙일보

    1972.06.23 00:00

  • (333)-Y부대(2)유격전(2)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출동의 날을 하루를 삼추 같이 기다렸다. 1951년4월29일 문천·안변·경성·회양 지구에 공작대원 1백4명이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Y부대는 첫 출동을 개시했다.

    중앙일보

    1972.06.05 00:00

  • (332)-Y부대①유격전(1)

    반만년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숱한 국난을 당했을 때마다 흔연히 일어섰던 의병의 후손들은 6.25전쟁 때도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지하에 숨어 활약하던 수많은 북한의 반공애국청년들은

    중앙일보

    1972.06.03 00:00

  • (7)에필로그

    탈냉전시대의 서막을 획함으로써 미·중공관계, 나아가서는 국제정치사에 새로운 장을 기록할 「닉슨」미국대통령의 역사적인 북경방문은 5일 후로 박두했다. 22년 간 단절되었던 관계를 청

    중앙일보

    1972.02.16 00:00

  • (290)|휴전회담의 개박(4)|개성의 함정(2)|6·25 21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한국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가 열리게 되자 온 세계는 낙관적 기분으로 들떴다. 전선의 「유엔」군 장병들은 이제 곧 고국에 돌아가게 되리라는 기대에 가

    중앙일보

    1972.02.14 00:00

  • (289)|개성의 함정(1)|휴전회담의 개막(3)

    1951년7월8일, 쌍방군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10일에 열리는 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를 준비하기 위하여 양측 연락장교들이 개성근교의 내봉장(주=6·25전 이현재씨의 개인저택)에서

    중앙일보

    1972.02.11 00:00

  • 정전위 유엔대표 머피 소장 임명

    유엔군 사령부는 임기가 끝난 군사정전위 유엔측 수석대표 프란시스·D·폴리 미 해군소장의 후임에 미 합참 연합방위국장 레이먼드·P·머피 미 육군소장이 9일 임명되었다고 밝혔다. 39

    중앙일보

    1972.02.10 00:00

  • (276)적의 춘계공세(5)

    전회에 이어 국군 제5사단과 그 우측에 인접한 제7사단의 전투상황을 살펴보겠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중공군은 춘계공세 때 중부와 중동부에 주공을 두었기 때문에 이 방면에 배치

    중앙일보

    1972.01.12 00:00

  • 민족의 증언(232)|「6·25」21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유엔」군의 총퇴각(5)|금괴반출

    육해공군·경찰로 편성된 인양 수색대가 나와 함께 백령도에 가서 47일간을 머무르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워낙 인양 기술들도 시원치 않은데다가 침몰 위치가 휴전 조인 후 이북에 전해

    중앙일보

    1971.09.24 00:00

  • (227)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9)

    「마크·클라크」대장은 1953년1월에 북괴가 남한 수용소의 포로들을 조종하여 그들을 유엔군 후방의 공산 전투원으로 사용하려던 음모에 관한 전모를 공표하였다. 공산주의 음모에 관한

    중앙일보

    1971.09.14 00:00

  • (223)|거제도 폭동91)|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5)

    도드 준장의 피납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소요가 비로소 외부세계에 알려졌지만 실은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거제도수용소 안에서는 살

    중앙일보

    1971.09.04 00:00

  • (221)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3)|「도드」준장의 피랍(2)

    「유엔」군 사령관직을「마크·클라크」장군에 인계하던 중 도드 준장 피랍사건에 직면한 「매듀·B·리지웨이」대장은 이 사건을 자기 책임 하에 단호한 태도로 해결할 결심으로 한국에 비래했

    중앙일보

    1971.08.30 00:00

  • 정전 위 내 1일에 유엔 측 수정 제의

    유엔군사령부는 공산 측이 28일 열자고 제의한 제3백21차 군사정전위 본회의를 오는 9월1일에 열자고 28일 수정 제의했다.

    중앙일보

    1971.08.28 00:00

  • 정전위 수석에 한국인 곧 임명

    【워싱턴21일 동화】주한 유엔군사령부는 곧 한국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한국인 장교를 임명할 것이라고 21일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플·스코트」씨가 보도했다. 스코트 씨는 이날 그

    중앙일보

    1971.07.22 00:00

  • (204|)제4야전군의 출현(하)|중공군 개입(3)|6.25 21주…3천 여의 증인회견,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

    10월 24일부터 전개한 유엔군 총 추격전의 최종목표인 한·만 국경에 제일 먼저 도달한 부대는 국군 제6사단 2연대 수색중대의 제3소대였다. 20명으로 된 이 3소대는 10월26

    중앙일보

    1971.07.21 00:00

  • (203)|제4야전군의 출현(상)|중공군 개입(2)|3천 여의 증인,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 북평 정권은 두 단계로 나뉘어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첫 단계는 유엔군이 10월24일 청천강에서 총 추격을 전개 할 때이고 두 번째이며 최종적인 개입은 이로

    중앙일보

    1971.07.20 00:00

  • (202)|중공군 개입(1)|운산의 첫 나팔소리|「6·25」21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미국이나 우리 한국이 가장 염려했던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그 동안의 구구한 억측을 깨고, 10월25일 실제 전투에서 확인됐다. 중공정권은 이미 9월 중순부터 북평 방송의 공식성명

    중앙일보

    1971.07.16 00:00

  • 정전 위 마비

    유엔군사령부는 18일 상오 11시 판문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군사정전위 제3백91차 비서 장 회의를 최근 북괴 측이 판문점에서 벌인 반미 난동 때문에 취소한다고 17일 하오 북괴

    중앙일보

    1971.06.18 00:00

  • (190)38선 돌파와 북진(6)

    (3) 미 제1기병사단이 적2개 사단을 포위한 금 천 지역의 섬멸전은 10월13일부터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두 석 산을 정면으로 공격한 미 제8기병 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중앙일보

    1971.06.18 00:00

  • 중공, 정전 위 복귀

    주한 유엔군사령부 대변인은 16일 군사정전위 중공대표가 지난 12일자로 교체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대변인은 지난 5년 동안 중공대표로 있던 정감여가 하거약과 교체됐다고 판문점을 통

    중앙일보

    1971.06.17 00:00

  • VUNC 폐쇄

    주한유엔군 사령부는 15일하오 주한 유엔 군 총사령부 방송(VUNC)을 오는 30일부터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조치는 유엔군사 예산절약과 한국의 관민시설이 발전됨에 따라 취

    중앙일보

    1971.06.16 00:00

  • 북괴에 비무장지대 활용 제의

    【판문점=조성각기자】군사정전위 유엔군 측 수석 대표 「필릭스·M·로저즈」소장은 12일 북괴에 대해 『비무장지대로부터 모든 군인과 무기를 제거하고 모든 요새와 기지 및 군사 시설을

    중앙일보

    1971.06.1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