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언론인 등 노조결성

    【마닐라7일로이터동화】「마닐라」의 신문사 「라디오」 및 「텔리비젼」방송국에 종사하는 약4천명의 언론관계자들이 지난 4일 「매스·미디어」 노조연맹을 결성했다고 이 단체대변인이 7일

    중앙일보

    1971.07.08 00:00

  • (191)방송 50년(20)이덕근

    이승만 박사가 해방직후 시민의 자격으로 귀국했을 때는 방송을 누구보다 아끼고 방송에 대해 이해가 깊었다. 이 박사는 방송시간이 10분이라면 9분 45초로 끝날 때까지 두 번이고

    중앙일보

    1971.06.28 00:00

  • (190)방송 50년(19)이덕근

    방송국에서 일본사람들이 완전히 떠난 것은 45년 10월 2일이었다. 진주한 미군은 38선 이남의 10개 방송국을 접수했는데 이에 따라서 방송내용이 미군에 의해 조정되었다. 미군은

    중앙일보

    1971.06.26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89)방송50년(18)이덕근

    일본군의 방송국 포위경계는 9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때까지도 제1방송은 일어, 제2방송은 한국어로 계속되었다. 9월 8일 밤 10시쯤에 방송국에 미군 중령 한사람이 느닷없이

    중앙일보

    1971.06.25 00:00

  • (188)방송 50년(17)이덕근

    조선「호텔」앞, 지금 왕궁다방이 있는 3층 건물은 본래「텔러·빌딩」이었다. 이 3층에 신문·「라디오」에 「뉴스」를 공급하던 동맹통신 한국지사가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전인

    중앙일보

    1971.06.24 00:00

  • 남기고싶은 이야기들(186)방송 50년(15)이덕근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총독부는 한국의 저명한 인사들을 방송국 「마이크」앞에 끌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때 방송국에 끌려나온 사람이 읽는 원고는 물론 자신이 쓴 원고도 아니며 사

    중앙일보

    1971.06.22 00:00

  • (185)|방송 50년(14)|이덕근

    (하) 먼저 검거된 것이 한국인 기술자들이었다. 성기석 이이덕 염준모 박흥인(전 개성방송국장)씨 등이 잡혀가고 뒤이어 편성과의 양제현(13회 양제현은 잘못), 송진근 박용신(해방

    중앙일보

    1971.06.21 00:00

  • (184)|방송 50년(13)|이덕근

    태평양전쟁이 중반에 들어선 1943년 3월에서 4월까지 사이에 경기도 경찰 부의 고등계 형사들이 방송국의 한국인 기술자와「아나운서」의 집을 소리 없이 급습, 약 40명을 연행해간

    중앙일보

    1971.06.19 00:00

  • (183)|방송 50년(12)|이덕근

    우리 나라 방송이 국제적으로 이용되기는 1937년7월 이른바 장고봉 사건 때이다. 장고봉 사건이란, 소련파 일본이 두만강근처 국경에서 1937년 7월11일 분쟁이 일어나 18일까

    중앙일보

    1971.06.18 00:00

  • (182)|방송 50년(11)|이덕근

    처음 일본말로 된 방송국을 세웠다가 1933년에 소위 이중 방송이라 하여 우리말 방송을 따로 둔 것은 한국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불편을 덜기 위해서였다.

    중앙일보

    1971.06.17 00:00

  • (181)|방송 50년(10)|스포츠 중계|이덕근

    1935년대에 이르러서도 방송의 정확성은 크게 의심스러웠다. 이 때쯤 시보를 알리는데는 트라이·앵글을 사용했는데 가끔 웃지 못할 난센스를 빚곤 했다. 당시에도 시보는 딩·동·댕

    중앙일보

    1971.06.16 00:00

  • 21년만에…사라지는 대공 「자유의 소리」

    『VUNC 여기는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입니다.』독특한 탁음으로 콜·사인을 보내던 귀에 익은 유엔군 방송이 6월말까지 방송을 보내고 문을 닫는다. 강력한 전파로 9백㎞나 떨어진 중국

    중앙일보

    1971.06.16 00:00

  • (180)|방송 50년(9)|이덕근

    경성방송국은 l935년쯤에 이르러 요람기를 벗어나게 된다. 부산방송국 등 지방 국이 생김에 따라서 아나운서의 교류도 있게 됐다. 이해에 편성을 보아 오던 이하윤씨는 컬럼비아·레코

    중앙일보

    1971.06.15 00:00

  • (179)방송 50년(8)|이덕근(제자는 필자)

    일본 사람들이 경성 방송국을 세운 목적은 한국 민족의 이른바 황국 신민화를 위한 식민 계획의 하나에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따라서 방송이 생긴 1927년부터 방송내

    중앙일보

    1971.06.14 00:00

  • (178)방송 40년(7)|이덕근(제자는 필자)

    경성방송국이 27년2월 방송을 시작할 때의 출력은 말코니 송신기 1㎾였다. 실패와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33년4월에 제2방송이 생길 때는 10㎾로 출력이 늘어나고 33년7월에

    중앙일보

    1971.06.12 00:00

  • (177)방송 50년(6)이덕근(제자는 필자)

    개국 초 연예 프로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음악이었다. JODK는 개국한해의 3월에 청취자들에게 왕복엽서를 이용하여 청취율을 조사해 본 일이 있었는데 42개 종목 중에서 뉴

    중앙일보

    1971.06.11 00:00

  • (176)방송50년(5)|이덕근(제자는 필자)

    연극이 처음으로 전파에 실린 것은 1925년의 여름, 방송국 개국을 앞둔 시험방송 때였다. 시험방송 중이던 체신국 청사(지금의 종합청사자리)뒷방에서 조선 극우회가『새벽종』이란 연극

    중앙일보

    1971.06.10 00:00

  • (175)방송 50년(4)|이덕근(제자는 필자)

    27년에 생긴 경성 방송국은 l933년까지 5년 동안 일본어 단일 방송을 하다가 33년4월26일에 소위 이중 방송의 실시로 한국어 방송과 일본어 방송이 각각 독립했다. 단일 방송

    중앙일보

    1971.06.09 00:00

  • (174)방송 50년(3)|이덕근

    처음 방송이 시작됐을 때는 「콜·사인」을 부르는 소리가 독특했다. 마치 지금 각 역에서 열차의 발·착을 알리는 소리처럼 『제이-오우-디-케이』라고 길게 뽑았다. 그리고는 『고찌라

    중앙일보

    1971.06.08 00:00

  • (173)-제자는 필자>|방송50년(2)

    첫 방송이 시작된 이때는「스피커」조차 드문 때여서「라디오」는 신기한 요술 소리통이었다. 「라디오」를 갖고 있는 사람은 방송국의 가입과에 등록해야 했는데 그 수는 한국인이1천3백23

    중앙일보

    1971.06.07 00:00

  • (172)-제자는 필자|제13화 방송 50년(1)

    ※편집자주=이덕근씨는 1943년 경성방송국에 입사, PD 또는 아나운서로 활약하다 해방 후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서라벌예술대학 방송학과 교수로서 계속 우리나라 방송문화에

    중앙일보

    1971.06.05 00:00

  • 운전사의 아내

    육거리 앞 PP백화점에 들어갔다. 남편 여름「잠바」를 고르며 숙은 연방 조잘댔다. 그런 그의 모습은 학창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금 후 조잘대던 숙은 「라디오」에서 정규방

    중앙일보

    1971.05.26 00:00

  • (4)디자이너 「노라·노」 여사

    딸보다는 어머니가, 어머니보다는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더욱더 멋장이였다고 생각하는 모녀3대가 있다. 구한말 정삼품 벼슬에 있었던 이학인씨의 부인 강정애 여사, 중앙방송국장이었던 노

    중앙일보

    1971.05.12 00:00

  • TV

    69년 5월5일 첫 방영을 시작한 이래 만 2년 동안「텔리비젼」 아침 「프로」의 왕좌를 지켜온 동양 TV의 「굿모닝」(월∼토 아침 7시30분∼8시30분) 이 여자 MC에 과감하게

    중앙일보

    1971.04.2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