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101)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6·25 동란당시 주일대표부 참사관으로 있던「지미·김」(길준)은「딘」소장의 요망으로 미군 제24사단과 함께 대전전선으로 달려갔다가 부상을 당하고「딘」소장도 행방불명이 되어 사태는

    중앙일보

    1970.09.02 00:00

  • (100)해방에서 귀국까지|김을한

    이 대통령이 일본정부에 반환을 요구한 재산 중에서도 동경의 영친왕 저는 더구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동경 아까사까(적판)에 있던 그 집은 (지금의 적판 프린스·호텔)지난날

    중앙일보

    1970.09.01 00:00

  • (99)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6·25동란 당시의 주일공사는 김용주씨였다. 김용주씨는 대한해군공사 사장으로 있던 것을 신흥우박사가 주일대사를 사임하자 허정 교통부장관의 추천으로 외교관이 된 사람이었다. 김 공사

    중앙일보

    1970.08.31 00:00

  • (96)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다음은「맥아더」원수의 수기의 일부이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분명한 정책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덜레스」 는 동경에 돌아와서 국무장

    중앙일보

    1970.08.27 00:00

  • (95)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1950년 6월26일 아침 동경의 각 신문에는라는 제목으로 6·25 한국동란의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아사히(조일) 신문에는 제1면 톱기사로 경성에 위기 일발 38도선 총공격 침

    중앙일보

    1970.08.26 00:00

  • (94)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그같이「지미·김」(길준) 이나 홍사익 중장의 불행한 최후는 영친왕에게 크나큰 타격을 주었거니와 그 보다도 더욱 영친왕을 놀라게 하고 또 슬프게 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가 와해되고 그

    중앙일보

    1970.08.25 00:00

  • (92)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죽은「지미·김」(길준)과 그의 부인 그리고 어린 아들의 세 유해는 동경에 있는 미국인 교회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요꼬하마」(횡빈) 화장 장에서 불살랐다. 그

    중앙일보

    1970.08.22 00:00

  • (91)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그후 대한민국이 탄생하자 구 왕실의 재산은 동산이고 부동산임을 막론하고 전부 국 유로 되었고 구 왕족의 생계는 국가에서 보장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운현궁만은 사정이 달랐으니 그것은

    중앙일보

    1970.08.21 00:00

  • (83)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일본 황족들의 신적 강하로 소위 「왕공가 규범」에서 벗어나 「이은」「이방자」의 제3국인이 된 영친왕부처는 재일 한국인으로서 구역소 (구청)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일본천황이 「인간

    중앙일보

    1970.08.11 00:00

  • (77)해방에서 환국 까지|김을한

    영친왕은 생각하였다. 『그렇다.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만 한 줄 쓰여지고 말 자기의 생애. 그렇지만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을 위해서 일할 자리가 어딘가 있지 않을까? 그것은

    중앙일보

    1970.08.04 00:00

  • (72)|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은 일본 육군 사관학교 제29기생인데 동창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재다능한 영친왕은 일본 무용과 가요 곡에도 취미가 많아서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고 한다. 대판의 「다까라쓰까」

    중앙일보

    1970.07.29 00:00

  • (69)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이 재1항공군 사령관에 취임한 것은 1943년7월20일이었는데 태평양전쟁의 양상은 더욱더 가열해져서 일제는 그후 꼭2년만에 무조건항복을 하여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중앙일보

    1970.07.25 00:00

  • (67)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당시 영친왕의 생각으로는 부의황제를 만나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부의황제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대위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의 후손이요 자기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중앙일보

    1970.07.23 00:00

  • 해방에서 환국까지|인간 이은(63)/김을한

    쌓이고 쌓인 10년간의 괴로움 오늘 가시어, 소리 높은 아기 소리 아아 반갑도다. 이것은 둘째 아들 구씨를 낳았을 때 영친왕비가 읊은 화가인데 오래간만에 얻은 아들 구가 무럭무럭

    중앙일보

    1970.07.18 00:00

  • (61)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구라파」여행은 1927년5월23일, 동경을 출발하여 그 이듬해 4월10일에 돌아왔으므로 거의 l년 동안을 여행한 셈인데 그때의 일을 방자비는 자신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중앙일보

    1970.07.16 00:00

  • (57)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8·15 해방이 되어 독립만세의 우렁찬 소리가 3천리 방방곡곡에 소용돌이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필자의 머리에 떠 오른 것은 해외에 있는 망명영수들의 모습이었다. 미국의 이승만 박사

    중앙일보

    1970.07.11 00:00

  • (52)-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때 송병준은 『신에게 두 가지 대책이 있사옵니다만 도저히 청허 하시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무엇이고 말해보라.』 『이번 해아 밀사 사건은 폐하께서 잠깐 실수를 하신 것

    중앙일보

    1970.07.06 00:00

  • (50)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제1회 만국 평화 회의는 1899년에 화란국 해아에서 개최되었고 제2회 평화 회의는 1907년에 역시 해아에서 개최되었는데 한국 황제 고종의 밀사가 해아에 나타난 것은 제2회 때의

    중앙일보

    1970.07.03 00:00

  • (48)해방에서 환국까지

    민규수는 그후 해방되던 다음해인 1946년 5윌에 귀국하였는데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것은 바로 8·15해방 전날밤의 일이었다. 당시 상해는 폭격도 뜸하고 공습도 별

    중앙일보

    1970.07.01 00:00

  • (42)해방에서 환국까지

    시노다(소전)차관이 이렇게 대어드니 궁내성 관리도 약간 당황하면서 그렇지요. 개인의 자격으로 가신다면 구태어 반대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면 그렇게라도 곧 양행 수속을 해 주시오.

    중앙일보

    1970.06.24 00:00

  • (41)해방에서 환국까지

    그러면 영친왕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구라파(구주)여행을 고집하였던가? 1923 관동대진때에 저희 나라의 혁명을 미리 방지하기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의 유학생과 노동자를 수

    중앙일보

    1970.06.23 00:00

  • (41)해방에서 귀국까지

    그러면 영친왕은 대체 무엇때문에 그토록 구라파(구주)여행을 고집하였던가? 1923 관동대진때에 저희 나라의 혁명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의 유학생과 노동자를 수

    중앙일보

    1970.06.23 00:00

  • (40)해방에서 환국까지

    평소에는 아무 말이 없고 웬만한 일은 다 순순히 양보하던 영친왕이 구라파여행에 한해서만은 그같이 강경히 주장하여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나는 꼭 가고야 만다』는 태도를 보인 데는

    중앙일보

    1970.06.22 00:00

  • (38)해방에서 환국까지

    1923년 9월 초하루날의 일이었다. 그날 일본에서는 소위 관동 대진재가 일어나서 동경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수만명이 불에 타 죽는 비극이 발생했다. 인심이 극도로 흉흉하여 눈

    중앙일보

    1970.06.1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