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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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같이「지미·김」(길준) 이나 홍사익 중장의 불행한 최후는 영친왕에게 크나큰 타격을 주었거니와 그 보다도 더욱 영친왕을 놀라게 하고 또 슬프게 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가 와해되고 그사이 수많은 지도자들이 연거푸 쓰러진 일이었다.
1933년 4월 29일의 일이었다. 상해 홍구 공원에서는 일황「유인」의 생일 (그들의 천장절)을 축하하느라고 굉장한 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군문의 침략정책으로 소위 상해사변이 발발한 직후이므로 일제는 그 무기를 과시하기 위해서도 이날의 식전을 더욱 성대히 하려고 하였었다. 그러하여 당시 상해에 있는 일본거류민들이 모두 참집한 것은 물론이요, 수천 장병이 보무도 당당하게 관 병 식을 거행하였었다.
식장 단상에는 일본의 유명한 군벌과 관료들이 죽 늘어앉았는데 군중 속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던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윽고 큰 폭음과 함께 단상의 모든 사람이 쓰러지게 되니 봉축식장은 갑자기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었다. 결국 일본헌병이 범인을 잡고 보니 한국인 윤봉길 의사가 수류탄을 먼진 것이 판명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시로까와」(구천) 육군대장과 일본 거류민단장은 즉사하고「노무라」(야촌) 해군대장은 한눈이 멀고「우에무라」(식촌)육군대장과「시게미쓰」(중광)공사는 각각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윤봉길 의사는 충남기산 사람으로 상해로 건너가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세탁소 점원으로 있던 중에 김구선생의 감화를 받게되어 마침내 그와 같은 대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는「임정」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던 중국의 관민으로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자기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 것이라고 해서 「임정」이나 한국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며 임정요인들의 생활비를 대어주고 또 상해에서 중경으로 천도할 때에는 임정도 함께 데리고 갔으니 윤봉길 의사의 수류탄 한발은 한국 청년의 독립정신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임정」으로 하여금 기사회생의 계기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영친왕이 상해임시정부에 대해서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역시 전기 윤봉길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이었다.
김구선생은 청년 시대에 고향인 황해도 안악에서 나라의 어머니인 명성황후를 죽인 원수라고 해서 일본인 헌병을 때려죽이고 인천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고종황제의 특사로 살아 나온 만큼「구 왕실」에 대해서는 항상 특별한 관심이 있었으며 지난날 영친왕 부처가 구라파 여행을 할 때에는 만일 상하에 상륙만 하면 일제로부터 구출코자 독립 단원들을 모아서 결사대까지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상행 임시정부에 김구씨 뿐 아니라 구한국시대에 고관을 지내어「구 황실」이나 영친왕에 대해서는 남 유다른 감회를 가진 사람이 많았으니 이시형·이동령·조완구·김의진·홍진씨 등이 즉 그들이다.
상해 임시정부가 해방된 조국에 개선한 것은 l945년 10월 23일이었는데 그것은 본국에 돌아오는데도 정치에는 직접. 관여하지를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군정당국과 타협한 연후에야 겨우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상해나 일본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에서는「임정」의 환국을『27년간 고투의 승리』라고 말했으나 실상인즉 현실정치에는 아무 실권도 없는 한갓 명목만의 개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친왕은 마음속 깊이「임정」에 큰 관심을 가졌었고 성재 이시영 선생이 인편에 『전하께서는 우리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금까지의 일본과의 공식관계를 일체 끊고 고요히 그 시기를 기다리소서』라는 전언도 있고 해서 은근히 기대를 걸었었는데 그후 백범 김구 선생은 평생의 동지였던 이승만 박사와 견해를 달리하여 이 박사는『우선 남한만이라도 독립하자』는 데 대해서 백범선생은 끝까지 남북협상을 주장하다가 1949년 6월 26일 흉한의 총탄으로 말미암아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로써 8·15해방에서 대한민국이 탄생될 전후를 통해서 가장 유명했던 지도자들을 모두 잃게 되었으니 국내에 있던 인사로는 고하 송진우, 설산 장덕수, 몽장 여운형의 3인이요, 해외에서 들어온 이로는 백범 김구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진우씨는 반탁운동으로, 장덕수씨는 미-소 공동위원회 문제로, 김구선생은 남-북 협상문제로 각각 희생된 것이었다.
그후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된 것을 보고 영친왕은 그렇지 않아도 38선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생각이 더욱 불안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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