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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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시노다(소전)차관이 이렇게 대어드니 궁내성 관리도 약간 당황하면서
그렇지요. 개인의 자격으로 가신다면 구태어 반대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면 그렇게라도 곧 양행 수속을 해 주시오.
시노다차관은 비록 얼굴에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울분과 함께 영친왕이 몹시 가엾게 생각되었다. 그도 일본인이므로 만일 영친왕이 다시 한국의 황제가 되겠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과 같이 유순한 영친왕이 일상생활을 잘 아는 그이므로 일본관료들의 냉담한 태도를 볼 때에는 의분의 피가 끓어오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사사로운 개인의 여행이 아니고 공식적인 여행으로 하려고 들면 거기에는 얼마든지 방법이 있을 것이요, 영친왕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좋지못한 분위기도 일소할 수가 있지 않은가? 일본황족 프린스·오브·리는 맹방 여러나라를 방문하기 위해서 구라파로 출발하신다-. 왜 이렇게 배짱이 넓은 것을 보이지를 못하는가? 그와 같이 영친왕의 구라파여행에 대한 교섭은 이왕직차관 시노다가 맡아서 했는데 하루는 궁내성에를 갔다오더니 『전하, 이제야 양행하시는 일이 확정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런데…』하고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영친왕은 벌써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왜 그러오. 무슨 일이 있었소?』하고 물으니 시노다는 차마 말하기가 어려운 듯이
『다만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서…』라고 하면서 영친왕의 눈치를 본다.
『응, 그것, 아무 상관없소. 공식이면 도리어 거북하니까, 나는 처음부터 사적으로 가는 것을 희망하였소. 그러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겠지?』
영친왕은 비로소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시노다는 더욱 애처로와져서
『그저 공식적인 여행이 못되어서 황송합니다…』라고만 말할 뿐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도리어 잘 되었소. 공식이면 귀찮은 일이 많아서 모처럼 하는 여행이 즐겁지 못하니까 나는 처음부터 사적여행을 희망했던 것이오.』
그리하여 영친왕은 결국 한 개인의 자격으로 구라파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또 한가지 난관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본에서 배를 타고 구라파로 가자면 반드시 상해를 거쳐가야만 되는 일이었다.
당시 상해에는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었고 거기에는 이시영·이동령·조완구·김가진등 구한국시대에 고관을 지낸 사람들도 많았으므로 만일 영친왕이 탄 배가 상해에 정박하게 되어 상륙을 할 때에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므로 일본측에서는 그 점이 큰 걱정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서는 독립운동을 더욱 빛나게 하기위해서 삼일운동직후 구한국시대에 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씨를 몰래 상해로 끌어내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즉 김가진씨는 한일합병때에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을 받았었는데 70이 넘은 노인의 몸으로 당시 배재중학 학생이던 큰아들 의한만을 데리고 멀리 상해로 탈출했다는 것은 비록 전관예우로 남작은 받았을 망정 마음속 한구석엔 아직도 열렬한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본국에서 망명해온 청년지사들로 구성되었으나 만리 이역에서 적수공권으로 만든 정부인만큼 하나에도 선전, 둘에도 선전으로 무엇보다도 선전이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김가진옹과 같은 거물급인사가 망명해 왔으므로 임시정부에서는 용기백배해서 대외적으로 크게 선전하는 한편 국내에 파견된 밀사들은 또 밀사대로 군자금을 얻는데 1백% 그 사실을 이용했던 것이다.
거기에 맛을 붙인 것은 아니겠지만 임시정부에서는 이번에는 또 동농 김가진옹이상의 큰 인물을 데려 내가고자 암중비약을 하였으니 의친왕(전이강공)의 탈출미수사건이 즉 그것인 것이다.
상해임시정부에 호응해서 국내에서는 전협·정남용·황옥씨등이 비밀결사 대동단을 조직하고 그 첫 착수로 김가진옹을 망명케 한후 이번에는 구왕족으로 의친왕을 탈출시키고자 비밀리에 맹렬한 활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의친왕은 고종황제의 둘째 아드님으로 영친왕의 가운데 형님인데 선풍도골에 총명한 재질을 타고났건만 나라가 망한 것을 통분히 생각하여 일생을 풍류로만 보낸 분이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열렬한 애국심이 있었으므로 대동단의 요청을 듣고 그의 처남 김춘기(적십자사 사무총장으로 6·25때 납북되었음)와 함께 방갓을 쓴 상제로 변장하고 국경을 넘어가다가 그만 안동현에서 이동경찰에 발견되어 그 계획은 아깝게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그러한 일이 있었으므로 일본 궁내성과 총독부 당국에서는 영친왕이 상해를 통과할 때에는 임시정부의 독립당에 납치나 유인되는 일이 없도록 특별한 경계를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종로서 고등계주임으로 악명높은 미와(삼륜)경부를 일부러 특별히 수행케 하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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