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배의 시사음식] 작은 닭도 맛있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다. K팝·K드라마·K뷰티·K푸드·K스타일 등 접두사 K가 여기저기 따라붙는다. 지난 10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K드라마(K-drama)·한류(hallyu)·먹방(mukbang)·만화(manhwa)와 함께 ‘치맥’(chimaek)이 등재됐다. 김치나 불고기처럼 치맥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문화로 지구촌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기사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한 맛 칼럼니스트가 “한국 치킨은 맛없다. 닭이 작아 맛없다”고 맹공하면서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이를 찬찬히 따져보자. 큰 닭이 육향이 강해서 작은 닭보다 더 맛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작은 닭은 맛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요즘 치킨에 흔히 사용되는 1.5㎏짜리 닭은 1960년대 들어 본격화한 육계 중심의 양계업과 삼계탕, 치킨 같은 대중의 기호가 서로 맞물린, 이를테면 오랜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다.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치맥’. [사진 한국치맥산업협회] 예로 외국의 닭이 큰 것은 가슴살을 선호하는 식습성에 비롯했다. 세계에서 널리 쓰는 육계(broiler)는 거의 다 비슷한 몇 개의 종이다. 육계는 자연적으로 쌍가슴이 있는 콘월(Cornish) 품종의 수컷과 크고 뼈대가 큰 흰 플리머스 락(Plymouth Rocks) 품종의 암컷 사이에서 교배한 것을 주로 사용한다. 쌍가슴 콘월에서 보듯 가슴살이 육계의 기본 조건임을 알 수 있다. 프라이드치킨도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주로 먹던 ‘영혼의 음식’이었다. 살코기가 별로 없어 백인들이 버리던 닭다리에 흑인들이 밀가루를 입혀 튀겨먹기 시작했다. 1930년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KFC)도 전환점이 됐다. 닭을 찐 뒤에 기름에 튀긴 튀김 닭이 나오면서 프라이드치킨은 미국인의 국민 음식이 됐다.   한국인에게 닭 요리는 대부분 닭을 통째로 삶아 먹는 백숙이었다. 1960년대 양계사업이 본격화하면서 ‘1인 1닭’ 할 수 있는 삼계탕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71년 국내 식용유가 출시되며 통닭의 시대가 열렸다. 닭을 쪼개 양념한 뒤 기름에 통으로 튀겨 먹는 시장통닭이다. 1970년대 말 또 다른 변화가 몰려왔다. 속살까지 염지한 커다란 프라이드치킨이 들어왔다. 닭 부위를 나누고, 이를 찌면서 튀겨먹게 됐다.   하지만 한국인은 여전히 가슴살을 퍽퍽하다고 여기고 기름지고 부드러운 다리를 선호한다. 작은 닭을 튀기면 닭고기는 물론 염지한 양념과 기름에 튀긴 탄수화물이 어울리는 매혹적인 맛이 완성된다. 이른바 한국형 치킨이다. 여기에 맥주를 곁들이면 치맥이 완성된다. 큰 닭도 맛있지만 작은 닭도 맛있다. 게다가 통째 튀긴 치킨에는 한 마리 닭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이 녹아 있다. 음식 문화는 재료를 준비하는 사람들, 소비하는 사람들의 교감이 빚어낸 집단 식성이다. 음식 앞에서 조금씩 겸손해지자.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12.08 00:15

  • [박정배의 시사음식] 달콤한 K푸드

    박정배 음식평론가 ‘오징어 게임’의 성공 덕에 달고나(dalgona)가 세계적인 먹거리로 떠올랐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을 때 짜파구리와 같은 꽃길을 걷고 있다. K콘텐트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문화적·심리적인 장벽이 걷히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시작된 한식의 세계화도 활짝 꽃을 피울 태세다.   최근에는 한식(韓食)보다 K푸드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인다. 한식에서 K푸드로의 이동은 단순히 영어 단어 사용 차원이 아니다. 내용적으로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준다. 한식이란 말은 대한제국(1897~1910) 시기에 처음 등장한다.  바로 『각사등록(各司謄錄)』 1900년 8월 기록에 나온 ‘음식은 한식(食韓食)’이다. 한식은 일식이나 청식(淸食)·양식의 상대개념으로 쓰였지만 당시 한식은 ‘복잡한 음식, 자양분이 없는 음식을 많이 먹는지라 우리의 신체도 역시 복잡하며 무기력하도다’라고 한 열등한 음식이었다.   해방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식은 외국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한 운동선수나 교민들이 먹는 한국인만의 음식으로 소개됐다. ‘외국을 다녀본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한식의 값은 왜식에 비해 너무나 싼’(1972년 8월 1일자 조선일보) 싸구려 음식 취급을 받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지난달 말 열린 한식 시식회에 등장한 달고나. [연합뉴스] 한식이 외국인의 관심을 본격적으로 받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다.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도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함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 발아한 한류와 K팝이 아시아와 세계로 퍼지면서 K푸드라는 단어도 새롭게 떠올랐다. 한식이 외국 음식에 대한 상대적 개념을 기반으로 한 한국인 중심의 먹거리라면, K푸드는 미국·유럽 등의 다양한 음악을 한국식으로 소화한 후 독창적인 선율과 리듬으로 다시 창출해낸 K팝처럼 지구촌의 다양한 음식 문화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해석한 독창적인 음식문화다.   예로 라면을 보자.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상품화한 인스턴트 라면을 우리는 한국식으로 끌어올려 세계인의 미뢰를 자극했다. 우리 라면 기술에 쇠고기를 얹은 짜파구리 같은 한국형 변종도 큰 성공을 거뒀다. 포르투갈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화한 달고나는 이제 달고나 커피에서 드라마·게임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조선시대에 허균의 집안은 일본과 중국을 다녀온 당대의 세계인이었다. 허균은 유배지에서 쓴 조선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에서 “우리나라는 외진 곳에 있기는 하지만 바다로 둘러싸였고 높은 산이 솟아 물산이 풍부하다. 만일 (중국의) 하씨(何氏)나 위씨(韋氏) 두 사람의 예(例)를 따라 명칭을 바꾸어 구분한다면, 아마 역시 (음식 이름이) 만(萬)의 수는 될 것이다”고 말했다. 허균이 상상했던 만 가지 K푸드세계가 지금 기세 좋게 열리고 있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11.10 00:19

  • [박정배의 시사음식] 개 식용 단상

    박정배 음식평론가 개 식용 문제가 다시 공론대에 올랐다.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언급하면서다. 오랜 논란이 재차 불거지는 모양새다. 식용견 농장주로 구성된 대한육견협회와 ‘케어’ 같은 동물복지단체가 개 식용 문제를 둘러싸고 뜨거운 법제화 논쟁을 벌이고 있다.   개 식용 논란은 복합적이다. 우선 개를 먹을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관습적 갈등이 있다. 관련법 사이의 충돌도 있다. 개를 가축으로 규정한 축산법과 개가 가축으로 규정되지 않아서 도축과 유통을 법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축산물위생관리법이 상충한다. 동물단체들이 추진 중인 ‘법적 근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동물의 살상을 금지하는 ‘동물보호법 개정안’과 ‘개를 가축에서 제외하는’ 축산법 개정안 등을 둘러싼 다툼도 얽혀 있다. 현재 약 11만7000가구로 추산되는 전국 식용개 사육농가의 생존권 문제도 걸려 있다.   서울 시내에 설치됐던 개고기 반대 광고판. [중앙포토] 개 식용 논란은 연원이 깊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회 문제가 됐다. 문화적 충돌 때문이다. 일례로 1954년 5월 서울경찰국장은 개장국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향이 컸다.   이후 개장국은 보신탕으로 이름을 바꾼다. 닭으로 만든 닭개장이나 닭보신탕도 새롭게 등장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는 영국 등 해외에서 개 식용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개 식용에 관한 첫 기록은 13세기 중반, 고려 후기 태안 마도3호의 목간에서 나온 구포(拘脯·개고기 포)다. 개장국은 ‘자궁(慈宮)에게 가장증(家獐蒸·개고기 찜) 진찬(進饌)하였다’(1795년 6월 18일, 『일성록』)처럼 왕실 행사에도 등장했고,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 이르러 개장국을 사 먹고’(1777년 7월 28일, 『속명의록(續明義錄)』처럼 외식으로도 먹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 개는 복날 시식이었다. 선풍기도 아이스크림도 없던 시절, 초복에 개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즉 절박함이 깃든 음식이었다. 19세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개고기를 파와 함께 푹 삶은 것을 개장(狗醬)이라고 한다. 개장국을 만들어서 산초가루를 치고 흰밥을 말면 시절 음식이 된다. 이것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물리치고 보신도 된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개를 꺼린 사람들이 있었다. 소고기로 개장국을 따라 만든 육개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영양 부족이 해결됐고, 여름 나기도 수월해졌다. 반려견 인구가 급증했고,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의식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수천 년 이어온 개 식용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과 다른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10.13 00:20

  • [박정배의 시사음식] 추석 선물의 변천

    박정배 음식평론가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 맞는 두 번째 추석이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달 13일부터 이달 6일까지 추석 선물세트 매출을 살펴본 결과 와인(51.5%), 스테이크(20%), 애플망고·샤인머스캣(27%) 세트가 작년 같은 기간보다 두 자릿수 이상 늘어났다고 밝혔다.   아무리 어려워도 한국인은 추석 음식 선물을 포기하지 않는다. 6·25 전쟁 중에도 ‘이 나라의 후방에서 소위 사과 선물 가격이 평시에 두 배’(1952년 10월 4일자, 경향신문)였다.     예나 지금이나 추석 선물의 베스트 스테디 셀러는 소고기다. 당시 서울에서 ‘하루 30여 마리밖에 잡지않던 소를 (추석 때에는) 300여 마리를 잡아도 잘 팔리고’(1956년 9월 19일자, 경향신문) 있을 정도였다. 1950년대 선물이 주로 농수축산물이었다면 60년대에는 가공식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60년대 초반 간장에 이어 통조림(63년), 미원(64년), 햄 소시지 세트(66년), 설탕(67년), 과자종합선물세트(69년)이 연이어 등장했다. 60년대 후반에는 설탕·조미료·밀가루 등 식료품이 주류로 떠올랐다.   부산 농산물시장에서 추석 선물을 고르는 사람들. 송봉근 기자 선물은 시대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경제 부흥, 백화점 발달과 상품권이 복합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추석 선물 시장도 비대해졌다. 70년대는 식용유·설탕·조미료에 과자까지 가세한 ‘선물세트 시대’였다. 80년대에는 경제 사정이 좋아졌다.     올림픽을 계기로 국내 농산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가공식품에서 지역 특산물·전통주·한우·굴비 등이 다시 각광을 받았다. 93년 신세계백화점이 소비자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21.4%인 133명이 추석 선물로 갈비·정육류를 희망했다. 더덕세트·자연송이 세트 등 우리 농산물·토산물을 희망하는 사람도 18.7%에 달해 ‘우리 것’에 대한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97년 말에 닥친 IMF 경제위기로 인해 분위기는 급변한다. 이전까지 ‘잘 팔렸던 100만원대 굴비, 200만원대 코냑은 자취를 감추고’(98년 9월 28일, 동아일보), 식용유·설탕·스팸·참치 등 저가 실속형 맞춤 세트가 널리 유통됐다. 2000년대 초반에는 1인 가구 등이 대거 늘어나면서 추석 선물 세트도 소규모화하는 추세다.   2010년 이후엔 추석 선물이 다양화한다. 기존 강자인 한우·과일에 와인과 디저트·바닷가재 등이 더해졌다. 2016년 ‘김영란법’ 시행 이후로는 5만원 이하의 ‘실속’ ‘알뜰’ 선물 세트가 주를 이뤘다.   추석 선물은 경제개발기인 60년대부터 본격화했다. ‘마음인가 뇌물인가’ 하는 의심도 받아왔다. 추석의 참뜻은 고대 신라에서 불린 ‘회소곡(會蘇曲)’의  노랫말 회소회소(會蘇會蘇·모이소 모이소)처럼 멀리 떨어진 가족이 모이는 데 있다. 가족 모임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 싶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09.15 00:21

  • [박정배의 시사음식] 기후재앙과 대체육

    박정배 음식평론가 미국 해양대기국(NOAA)이 전 세계 육·해상의 올 7월 평균 기온이 20세기의 7월 평균 15.8도보다 0.93도 높았다고 지난 13일 발표했다. 역사상 가장 더웠던 2016·2019·2020년 7월을 0.01도 상회, 관측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각국은 탄소 순배출량 ‘제로(0)’, 이른바 탄소중립을 주요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지구온난화 주범으로 이산화탄소가 지목되면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 세계에서 배출된 온실가스 371억톤 중 동물성 식품이 22%를 차지했다. 그중 소가 축산업 온실가스 배출의 주요 원인(65~77%)으로 꼽혔다.   하지만 육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1970년 세계 육류 소비량은 약 1억톤 정도였다. 2000년 2억3200만톤, 2018년 3억4100만톤으로 상승했다. 최근 온실가스는 물론 동물 복지, 축산 질병 등이 대두하면서 대체육이 주목받고 있다. 전체 인구의 30~40%(4억2000만~5억6000만)가 채식주의자로 추정되는 인도를 제외하고도 2017년 기준 지구촌 채식 인구는 비건을 포함해 2억34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식물성 대체육 제품들. [뉴시스] 대체육은 식물성 대체육, 식용 곤충, 배양육 세 갈래로 발전하고 있다. 동아시아 식물성 대체육의 역사는 길다. 한반도·만주 지역에서 자생한 콩은 식물이면서 단백질을 40%까지 함유한 독특한 식물이다. 장과 두부 모두 콩으로 만든다. 불교의 영향이 강했던 중국 송대에는 비싼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서민들을 위해 가짜 고기가 만들어졌고, 두부도 그런 영향의 결과였다. 현재도 대체육의 상당수가 콩을 원료로 한 대두 단백질이다. 고기의 질감과 향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진전을 보고 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에 꼬리칸 사람들의 식량으로 등장하는 곤충은 신소재 식품(novel food)이다. 소고기 등 육류보다 단백질 함량이 최대 77% 높다. 같은 양의 단백질을 생산하는 데 이산화탄소는 6분의 1 정도 배출해 기대감이 크지만 식용 곤충에 대한 인간의 거부감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배양육은 살아 있는 동물 세포를 채취한 뒤 세포공학 기술로 식용 고기를 배양·생산하는 것이다. 도살 과정이 없어 이슬람의 할랄 같은 기피 조건이 없지만, 이 또한 생명윤리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당장 대체육 시장은 한계가 있다. 특히 인구·소득이 증가하는 개도국의 육식 수요를 현재의 축산 시스템으로 충족시키기가 어렵다. 하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다. 지난해 대신증권은 전통 육류 점유율이 2025년 90%에서 2040년 40%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식물성 고기는 25%, 배양육은 35%로 늘 것으로 내다봤다. 대체육은 성큼 다가온 미래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08.18 00:16

  • [박정배의 시사음식] 북한의 식량위기

    박정배 음식평론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5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지난해 태풍 피해로 알곡 생산계획에 미달한 것으로 하여 현재 인민들의 식량 형편이 긴장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또 북한은 지난 13일 유엔 고위급 정치포럼(HLPF) 화상회의에서 ‘자발적 국가별 검토(VNR)’ 보고서를 처음 공개했는데 “올해 곡물 700만톤 생산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며 “2018년 495만톤 생산 이후 최근 10년간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최고 지도자와 정부가 잇따라 식량 문제를 이례적으로 공식 언급한 것은 북한 식량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올해 북한의 곡물 부족 수요를 110만톤으로 예상했다. 수입분 20만톤을 제외하면 85만8000톤이 부족해 8~10월 심각한 상황에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FAO와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등이 공동 발간한 ‘세계 식량 안보와 영양 수준 2021’ 보고서에서도 2018∼2020년 북한의 영양부족 인구를 10명 중 4명 꼴(42.4%)인 1090만 명으로 추산했다.   식량 증산을 촉구하는 북한의 선전 포스터. [사진 조선의 오늘] 북한의 식량난은 1990년대 동유럽 붕괴 이후 구조적인 만성을 보여왔지만 최근 들어 제재·봉쇄·재해가 겹치면서 더욱 심화했다. 코로나19에 따른 국경 봉쇄로 중국과의 교역이 급감했고 지난해 태풍·홍수 등 잇따른 자연재해로 총 곡물 생산량이 전년 665만톤에서 552만톤으로 감소했다. 북한의 2020~21년 곡물 수급은 옥수수 221만톤, 쌀 140만톤, 감자 67.7만톤으로 옥수수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옥수수는 비료가 필수적이다. 북한은 지난 4~5월 중국으로부터 인산암모늄을 약 868만 달러어치, 질소비료 등 비료 관련 제품을 204만 달러어치 수입했다.   곡물의 절대 부족과 더불어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영양의 질도 문제가 되고 있다. FAO에 따르면 북한의 최다 가축이던 닭은 2001년 토끼에게 추월당한 이후 그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토끼고기가 16만7000톤으로 1위를, 돼지고기가 11만5000톤으로 2위를 차지했고, 닭은 3만톤 정도에 머물렀다.   이 밖에도 북한은 연어·보가지(복어)·넙치·칠색송어·누에 양식까지 단백질 보충을 위한 보급 투쟁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고 있지만 국제 정세에 취약한 북한의 ‘먹는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일례로 지난 9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7월 하순~8월 북·중 육로 무역 재개’ 소식을 알렸지만 중국의 지원은 인도적 지원이 아닌 동아시아 전략에 의한 것일 뿐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인도적 차원의 남북 식량 협력 제안 등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답이 없다. 북한에 있어 먹는 것은 ‘국력이고 사회주의’지만, 같은 민족의 인도적 지원은 끊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07.21 00:20

  • [박정배의 시사음식] 문화재가 된 막걸리

    박정배 음식평론가 문화재청이 최근 ‘막걸리 빚기’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한민족 정서가 밴 술을 국가가 공인했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고, 요즘 엄청나게 달라진 막걸리 시장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막걸리는 한민족의 오랜 쌀농사를 대변하는 술이다. 농작 상황에 따라 권장과 금지를 거듭해온, 이른바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음식사회학의 결정체다. 막걸리라는 단어 자체는 19세기 초 유행한 백과사전 『광재물보(廣才物譜)』에 탁주와 함께 ‘막걸니’로 처음 나온다. 한문으로 료(醪)·앙(醠)·리(醨)로 쓰고, 거르지 않은 탁하고 걸쭉한 술이란 뜻의 탁료(濁醪), 하얗다 해서 백주(白酒), 술 도수가 낮다 해서 박주(薄酒), 신맛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재를 넣은 탓에 회주(灰酒), 찌꺼기가 있는 술이라 재주(滓酒), 탁한 술이라서 혼주(渾酒) 혹은 탁주(濁酒), 농부들이 일할 때 먹는 술이라 해서 농주(農酒) 또는 사주(事酒)로 불렀다. 『삼국사기』에 이미 탁주를 뜻하는 료(醪)가 등장할 만큼 쌀농사를 기반으로 한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술이다.   [사진 박정배] 막걸리는 우리네 아픔과 함께해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반도를 장악한 일제가 1909년 주세법을 적용하면서 집에서 누구나 빚어 먹던 막걸리는 통제의 긴 터널로 빠져든다. 1916년에 28만9356명에 달했던 막걸리 판매업자는 1932년 1명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65년 양곡관리법에 따라 쌀막걸리는 법적으로 금지됐고. 살균 탁주의 공급구역 제한이 풀리면서 부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막걸리는 2008년부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2010년경 1차 막걸리 붐이 일어난다. 한류 바람도 톡톡히 봤다. 막걸리가 최근 2차 붐을 일으키고 있다. 2017년 소규모 주류제조 면허제가 시행되면서 제조 문턱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로나19로 홈파티나 홈술이 증가하면서 가격보다 취향에 맞는 술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막걸리 인기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온라인 주문이 자리를 잡고 전통주 전문 소매점이 생겨난 것도 한몫했다.   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국내 막걸리 소매시장 규모는 2016년 3000억 원대에서 지난해 5000억 원대로 확대했다. 1차 붐이 양적 성장을 주도했다면 2차 붐은 품질 향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 멀다. 그저 그런 비슷한 모양의 막걸리병과 투박한 디자인부터 풀어야 한다. 국내 쌀 사용에 따른 법적·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일본의 사케처럼 쌀 도정 문제도 안정된 질 관리를 위해 필수적이다. 막걸리 전용 쌀 개발과 국(麴·누룩)과 효모의 분리 같은 기술적 개발도 숙제로 남아 있다. 프랑스 와인, 중국 백주, 일본 사케 같은 술이 되려면 좀 더 세밀한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06.23 00:23

  • [박정배의 시사음식] 빙수 보양식 시대

    박정배 음식평론가 보양식의 계절이 돌아왔다.   날이 더워지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찬 것을 찾는다. 요즘 50대 이상은 에어컨 없던 시절을 보냈다. 여름은 고난의 시간이었다. 더위 때문에 밥은 먹기 힘들었고, 원기를 돋워줄 보양식이 필요했다.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병을 얘기하다’라는 시에서 병 고치는 법으로 보양이 가장 좋다면서 ‘인삼이나 기타 자양(滋味)물은 가난한 선비에겐 해당 안 된다’며 냉수나 생강을 씹어보라고 권했다. 당나라 의사 맹선(孟詵·621?~713)은 『보양방(補養方)』도 남겼다. 보양에 대한 욕구는 그만큼 오래됐다.   조선 세종 때 의관 전순의는 『식료찬요(食療纂要)』(1460)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음식이 가장 우선이고 약이(藥餌)가 그다음이다’라고 썼다. 음식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보양 사상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방유취(醫方類聚)』(1477)에는 ‘부족한 것을 보양(補養)하라, 이것이 치료의 원칙이다’라고 간명하게 나온다. 당시 보양의 대명사는 안정복의 시에 나오는 인삼이었다. 하지만 당시 최대 수출품인 인삼은 일반인이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여름철 서민이 애용한 최고 보양식은 단백질이 풍부한 개나 닭이었다. 닭 또한 귀한 식재료였지만 닭찜·연계찜·닭죽·닭백숙·초계탕 등을 여름에 먹은 기록은 많다.   [사진 박정배] 19세기 세시기(歲時記)에는 하나같이 개장국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게 등장한다. 파와 개고기를 넣고 푹 고아낸 뒤 고춧가루 등을 넣고 얼큰하게 끓여낸 개장국은 복날 최고의 음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개고기를 싫어한 이들이 있었기에 개장국과 비슷한 모양과 맛을 내는 육개장(肉狗醬)이 만들어졌다. 육개장은 1921년 나온 『조선요리제법』에 복중(伏中) 음식으로 소개됐다. 1929년 8월 1일 자 대중잡지 ‘별건곤’은 ‘영남지방에서는 삼복 중에 개죽음이 굉장하다. 하지만 안주의 명물로 삼복중의 닭 천렵이 대단하다’고 적고 있다. 북한 지역에서는 주로 닭을, 남한에서는 개를 복달임 음식으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삼계탕은 비싼 인삼 가격과 귀한 닭 때문에 인삼의 전매 제한이 풀리고 양계산업이 본격화되는 1960년대 이후에 여름 보양식의 황제로 등극한다. 삼계탕 이전에는 민어탕이 유명했고, 남해안 사람들은 장어를 먹어왔다.   단백질을 탕으로 먹는 이열치열 음식과는 반대로 이냉치열 음식도 있었다. 여름에 흔한 밀로 만든 밀국수를 얼음물이나 우물물에 말아 먹는 콩국수가 대표적이다. 수박 화채·미숫가루 등도 힘든 여름을 버티게 한 음식이자 약이었다. 반면 단백질이 풍부해진 요즘 보양식은 여름철 미식으로도 떠올랐다. 10~20대 청춘들은 갖은 고명을 얹은 빙수를 여름 보양식으로 즐긴다. 이냉치열의 완성판쯤 될까.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

    2021.05.26 00:18

  • [박정배의 시사음식] 영화 ‘자산어보’ 속 홍어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 최근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는 슬픔이 가득하다. 정약전(丁若銓·1758∼1816)은 『자산어보(玆山魚譜)』(1814)에서 “나는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고 고백하고, 흑산을 검붉은 색을 뜻하는 자(玆)로 바꾸어 불렀다. 19세기 초는 한국인의 어보(魚譜)가 처음이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다. 조선 최초의 어류도감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1803)에 이어 『자산어보』와 『전어지(佃漁志)』가 잇따라 발간됐다. 조선 후기의 인구 증가와 도시 발달로 인한 어물 수요 증가의 결과였다.   서학이 들어오고 근대의 파고가 서양의 고래잡이배들처럼 한반도의 바다에 출몰하기 시작한 혼돈과 파괴의 시기였지만 조선은 여전히 ‘힘이 센’ 성리학의 이기론이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약전은 흑산도 청년 장창대에게 어류에 관한 지식을 얻고 그것을 실용적 관점으로 기록한다. 약전은 글에 더해 그림을 그려 색칠을 한 해족도설(海族圖說)까지 구상했으나 다산의 반대 등으로 생각을 접는다.   [사진 박정배] 그림이 빠졌지만 『자산어보』의 어류 설명은 크기·형태·색·맛 등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 압권은 홍어다. ‘회·구이·국·포에 모두 적합하다.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홍어를 썩혀서 먹는 것을 좋아하니 지방에 따라 음식을 먹는 기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국을 만들어 배부르게 먹으면 몸속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며, 술기운을 다스리는 데도 효과가 크다.’   오늘날에도 삭힌 홍어의 중심지는 나주 가까운 마을인 영산포다. 영산포에는 삭힌 홍어회가 가장 유명하지만 홍어보리앳국도 즐겨 먹는다.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심은 보리의 싹을 살코기보다 아린 맛이 덜 나는 애나 내장과 함께 끓여낸 홍어보리앳국은 구황(救荒) 음식이자 술안주이며 ‘몸속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 주는 보양식이었다. 보리순은 다른 지방에서는 먹지도 않지만 보리농사가 많은 남도 지방은 겨울에서 봄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재료다.   전라도 서해안 특산물인 홍어는 8세기 중 후반 신라시대의 목간(木簡)에 홍어의 우리말인 가화어(加火魚·가브리=가오리)로 등장한 만큼 오랜 식자재였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홍어는 곧 가오리(加五里)다’라고 적었다. 영화 ‘자산어보’에는 정약전과 알고 지내던 홍어 장수 문순득이 나온다. 풍랑을 만나 일본에서 중국의 광주와 마카오를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여정을 약전이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1818)에 그 내용이 전한다. 19세기 초반의 멀고 검은 섬 흑산도는 전라도의 고도가 아닌 서양의 고래잡이배와 천주교 때문에 한양에서 유배 온 실학자와 학문으로 신분 상승을 꿈꾼 상놈과 동남아를 다녀온 홍어 장수까지 등장하는 패러다임의 교차점이었다.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

    2021.04.28 00:18

  • [박정배의 시사음식] 눈물의 미나리

    박정배 음식평론가 영화 ‘미나리’(MINARI)가 훈풍을 전하고 있다. 다음달 25일 열릴 올 아카데미상 수상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변방인 아칸소의 작은 마을에서 고추나 무 같은 야채를 키우는 영화 속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에게 미나리는 판매할 작물이 아니었다. 장모(윤여정)가 한국에서 가져온, 농장 주변의 작은 개울에 심은 ‘어디서든 잘 자라는 원더풀 미나리’는 잡초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화재로 농장 창고가 무너져내린 후 제이콥과 아들 데이비드(앨런 김)는 “할머니가 좋은 자리를 찾으셨어”라고 하며 미나리를 뜯는다.   미국 시골에서도 ‘알아서 잘 자라는’ 미나리는 소박하고 여리지만 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 유배 초기 몇 년간의 강진읍성 생활을 마치고 숲속에 다산초당을 짓고 안착한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른다. 다산은 물을 막고 ‘사랑 아래다 새로이 조세 없는 밭을 일궈, 층층이 자갈을 쌓고 샘물을 가두었지. 금년에야 처음으로 미나리 심는 법을 배워, 성안에 가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다네. 농어국에 전복회에 이것저것 그득하며, 파 익히고 미나리 데치고 모두가 제격이었네’라고 읊었다.   [사진 박정배] 한국에서 캘리포니아로, 다시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는 ‘미나리’의 가족과 한성에서 강진읍성으로, 다시 산속의 작은 초당에 안주하고 미나리를 기르는 다산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중국에서도 고대부터 먹어온 미나리는 농민의 음식이었다. 미나리를 맛있게 먹은 농부가 부자에게 미나리를 선물했다가 혼이 나는 것과 송나라 농부가 따뜻한 봄 햇볕을 쪼이며 아내에게 임금께 바치면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는 고사를 근폭(芹曝)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미나리 사랑도 꽤 오래됐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1430~1502)은 ‘조선부(朝鮮賦)’에서 ‘왕도와 개성 사람들은 모두 집의 작은 못에 미나리를 심는다’고 했다. 고려시대부터 사람들은 근전(芹田·미나리밭)을 운영했다. 이민구(李敏求·1589~1670)는 새해에는 ‘진흙 속 미나리와 들의 쑥에도 다 생기 돌고’ ‘미나리 진흙을 봄 제비가 물어 간다’고 노래했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주방의 여덟 가지 야채를 노래함’(廚蔬八詠)에서 ‘미나리는 예로부터 좋은 나물이라(芹子由來美) 아침 밥상에 국거리도 좋고 말고(晨盤亦可羹)’라고 찬미했다.   미(물)나리(나물)는 물이나 나물처럼 흔하지만 차가운 물에서도 얼음 밑에서도 자란다. ‘어름이 꽝꽝 언 논 속에서도 새파랗게 새싹이 난 미나리는 서울의 맛이었다.’ (1929년 9월 27일자 대중잡지 ‘별건곤’) 봄 땅의 흙내음과 시냇물의 은근하고 할머니 손처럼 포근한 향을 지닌 미나리는 가난한 시절 우리를 살찌운 (눈)물의 식재료였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03.31 00:22

  • [박정배의 시사음식] 짜장면, 졸업·입학의 기쁨

    박정배 음식평론가 입춘이 지나고 3월이 됐지만 코로나19로 봄 같은 봄을 느낄 수 없다. 졸업·입학의 즐거움으로 가족 간의 외식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몇 년간의 여러 조사에서 갈비와 짜장면이 졸업·입학 음식의 정상을 다퉈왔지만 올해는 5인 이상 집합 금지 때문에 학교 옆 식당들은 우울하고 가족들은 조촐한 모임 때문에 서글프다.   짜장면의 인기는 첫 등장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짜장면에 관한 첫 기록은 1934년 1월 1일자 잡지 ‘개벽’에 나오는 ‘청요리점에 들어가서 자장면 한 그릇을 사 먹고 소주 몇 잔을 마셨다’는 구절이다. 1936년 2월 16일자 동아일보에는 졸업 축사에 ‘우동 먹구 짜장면 먹구 식은 변또(도시락) 먹어가며 그대들을 가르쳤느니라’란 대목이 나온다.   [사진 박정배] 짜장면은 한국 외식의 선두 주자 중 하나다. 쫄깃한 면발에 한국인의 기본 소스인 된장과 달달한 밀가루장이 더해진 춘장에 비벼 먹는데, 어린이에서 어르신까지 모두의 입맛에 달라붙는 음식이다. 짜장면은 1950년대에 이미 당국의 가격 승인을 받아야 하는 서민들의 외식 메뉴였고,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배달 음식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등 요리를 먹을 팔자가 못 되는’ 사람들은 짜장면을 탕수육과 함께 시켜 먹었고(1953년 3월 9일 경향신문) 당구장에서 짜장면을 배달해 먹었다.(1956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 지금도 ‘배민트렌드 2020년’에 의하면 배달 중식의 1위는 짜장면이 차지하고 있다.   60년대 쌀 부족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면서 짜장면은 ‘쌀을 대용할 수 있는 대용식’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하지만 70년대 밀의 가격이 오르면서 짜장면은 다소 값비싼 외식이 된다. 가격을 묶어두려는 정부와 올리려는 중국식당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 짜장면값 기습 인상과 정부의 세무조사가 반복됐다. 그래서 ‘휴일이면 가족들을 동네 짜장면집이라도 데리고 가는 가장이라야 구실을 제대로 하는 아버지로 여기는’(1981년 5월 11일 매일경제) 시대가 됐다. 83년 리스피아르 경제조사연구소의 한국인 식생활습관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개인이 외식할 때 잘 먹는 음식은 남녀 모두 짜장면으로 나타났다.   짜장면은 70년~80년대에는 가격이 올라가면서 졸업이나 입학 같은 특별한 날 먹는 요리가 됐다. 가난했던 학생들은 ‘그 맛있다는 짜장면을 고등학교 졸업식 날 선생님이 사준 짜장면으로 처음 먹었고’ 돈이 없어 자식에게만 짜장면을 사 먹이고 자신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god의 ‘어머님께’, 1999년)라는 노래가 가난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공감을 받으며 크게 히트했다.     짜장면이 졸업·입학을 축하하는 음식으로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것은 달곰한 맛에 짜디짠 눈물의 기억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03.03 00:17

  • [박정배의 시사음식] 복된 소망, 떡만둣국

    박정배 음식평론가 정치인들이 재래시장을 어슬렁거리며 어묵이나 김밥을 먹는 장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선거철이 다가온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계급 간 ‘구별 짓기’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패션·음악·음식을 꼽았다. 정치인들의 시장 음식 먹기는 자신들이 서민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서민적 음식 상징을 능숙하게 이용한 대표적인 정치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농촌을 돌며 막걸리를 마셨고 ‘막걸리 대통령’으로 불렸다. 1976년 수원을 방문한 그는 새마을 지도자들과 함께 떡만둣국을 점심으로 먹었다. 부족한 쌀 때문에 생긴 정권의 핵심 과제였던 ‘혼분식 장려 운동’을 위한 것이었다.   다음 주말이면 설 연휴다. 예부터 한민족은 설날에 햅쌀로 만든 하얀 가래떡을 넣은 떡국을 먹었는데 조선을 지배한 주자의 성리학 때문에 중국의 만둣국이 떡국과 함께 설음식이 됐다. 조선 후기 문신 유척기(兪拓基·1691~1767)의 『지수재집』(知守齋集)에 나오는 ‘떡국과 만두를 만들어 새해를 센다’(湯餠饅頭作歲更)는 대목 등 떡국과 만둣국은 조선 중기 이후 설날의 시식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진 박정배] 중국에서 들어온 만두는 1800년대 말부터 배추김치·숙주·두부 등이 소로 사용되면서 한국화한다. 조선의 만둣국은 중국의 혼돈(餛飩)을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지금의 호빵 같은 발효 만두를 ‘상화’로 불렀고 발효 안 한 소를 넣은 음식인 교자(餃子)는 ‘만두’(饅頭)로 불렀다.   조선시대에도 떡과 만두를 한 그릇에 먹는 떡만둣국을 추정할 수 있지만 기록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난다. 1938년 2월 1일자 잡지 ‘여성’에는 ‘정초 음식으로는 별미로 만둣국이 손꼽히는데 국수장국에 만두를 넣든지 떡국에 만두를 넣든지 해서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이라고 나온다. 내방가사 연구가 조애영이 1973년에 쓴 ‘조상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라는 기사(경향신문 1973년 2월 19일)에서 어린 시절 먹던 설 만둣국을 소개하면서 (만두를) ‘떡국과 반반씩 섞어 끓여 수백 명 손님을 먹도록 하는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떡만둣국이 대중화되는 것은 혼분식 장려운동 기간인 1960년대 이후다. ‘구정(설날)상 차리기에는 콩가루와 밀가루 섞어 만두를 빚고 가래떡(정부혼합곡으로 떡을 해도 쫄깃쫄깃하고 맛있다)으로 떡을 만들어 떡만둣국을 만들어 먹으라’(매일경제신문 1976년 1월 28일)고 나온다.   떡만둣국은 중국의 음식 문화인 만두(교자)와 한국적 세찬인 떡국이 만나 탄생한 문화 융합의 산물이다. 중국에서 교자는 재산과 자손 번성을 의미한다. 한국의 가래떡은 하얀색은 순수함을, 긴 것은 장수를, 엽전 모양으로 썬 것은 돈을 벌라는 의미다. 떡만둣국 한 그릇에 인간의 복된 소망이 가득하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02.03 00:16

  • [박정배의 시사음식] 비대면 혼밥의 시대

    박정배 음식평론가 코사다난(Co事多難·코로나19+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가고 2021년이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한 거대한 전환의 한복판에 있다. 지난해 말 식품저널은 2020년 식품 관련 10대 뉴스 1위로 코로나19의 영향을 꼽았다. 농림부는 2021년 외식 트랜드를 이끌어갈 핵심어로 ‘홀로 만찬’ 등 5개를 선정했다. 여러 발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비대면, 외식 부진과 혼밥 확대, 그리고 가정식의 귀환이다.   비대면과 가정식 사이의 공간은 모바일 주문과 배달이 이어준다. 비대면과 배달의 성행은 식당 구조를 완전히 바꿨다. 배달 매장에는 손님보다 배달 노동자들이 더 많이 들락거린다. 유명 맛집도 배달이 생존에 필수가 됐다. 외식업은 괴멸 상태의 디스토피아다. 텅 빈 식당에는 외식업 종사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만이 가득하다. 외식업 종사자는 많다. 560만 자영업자 가운데 외식산업 종사자가 200만에 이를 정도다. 전체 자영업자 중의 36%에 달한다. 인구 5000만 중 20세 미만 60세 이상을 제외하면 6.6%다.   한국의 식당은 모두 67만 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의 2020 식품소비행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식은 57.9% 감소했고, 가정 내 식사는 61.7% 증가했다. 모바일 음식 서비스 거래 금액은 2019년 3분기 2조 4338억에서 2020년 3분기 4조 4636으로 83.4% 폭증했다. 가정식이 증가했지만 예전의 가정식 문화와는 양태가 사뭇 다르다.   [사진 박정배] 1970년대 초반 가구당 인원수는 평균 5명 이상이었지만 2018년에는 1인 가구 29.3%와 2인 가구 27.3%를 합치면 56.3%에 달한다. 2019년에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0%를 넘었다. 이제 가정식은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따듯한 밥을 먹으며 식탁에서의 단란함을 즐기는 비율보다 더 많은 혼식이나 둘만의 식사가 주를 이룬다. 그래서 ‘홀로 만찬’이라는 유명 식당의 메뉴를 집에서 혼자 먹는 외식 트랜드는 조금은 짠하다.   혼밥은 외로움을 떠나 영양 밸런스, 음식 기호 편중, 커뮤니케이션 부족 등의 문제도 일으킨다. 일본에서는 혼밥을 고쇼쿠(孤食)라고 부르다 단어가 너무 외로워 한문만 다른 고쇼쿠(個食)로 바꿔 부른다. 90년대 이후 일본도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공식(共食) 문화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우리 사회는 핵가족화 흐름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고, 배달 음식이 먹는 문화의 한 축이 됐지만 코로나19로 추세가 더욱 강화됐다.   우린 가족을 보통 식구(食口)로 부른다. 혈연관계가 아닌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적 관계에 방점을 둔 말이다. 코로나19가 종식되는 날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나는 식당에서 사람들과 모여 같이 밥 먹고 술 마실 것이다. 혼식으로는 같이 먹고 마시는 달콤한 인생의 맛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1.01.06 00:22

  • [박정배의 시사음식] 김치와 파오차이

    박정배 음식평론가 지난달 24일 중국의 ‘파오차이(Paocai·泡菜)’ 제조법이 ISO(국제표준화기구)에 등재됐다. 중국 관영 매체 환구시보(環球時報)가 ‘김치 종주국 한국의 굴욕’이란 문장을 사용해 기사화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김치(Kimchi)는 이미 2001년 식품계의 최고 기구인 CODEX(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서 국제 규격을 인증받은 식품이다. 1994년부터 일본의 ‘기무치’(kimuchi)가 CODEX에 국제 표준으로 등록하려는 것에 맞선 김치·기무치 전쟁의 결과였다. 1993년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국제적으로 수입·수출을 위한 검사규격을 통일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식품 분야에서는 CODEX가 규격으로 자리 잡았다.   환구시보의 오보는 왜 나왔을까. 첫째, 중국인은 한국의 김치를 파오차이로 부르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파오차이의 70%가 쓰촨성(四川省)에서 난다. 이번에 ISO 인가를 주도한 곳은 쓰촨의 메이산(眉山)이다. 메이산은 파오차이의 고향이라 불릴 만큼 파오차이 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중국은 2001년부터 메이산에 대규모 파오차이 생산시설을 들여놓고 있다.   김치 중앙포토 둘째, 야채를 담가 먹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은 김치의 CODEX 등록이나 2013년 김장 문화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부러워한다.   셋째, 김치 종주국 한국에 대한 수출 김치의 99%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다. 환구시보의 의도된 듯한 오보는 역사와 제조기술에서 뒤질 게 없다는 자부심과 경제발전을 기반으로 한 문화의 힘에 대한 인식이 더해진 결과로 읽힌다.   파오차이는 다양한 야채를 끓인 뒤 소금물에 넣고 맵고 얼얼한 맛의 고향인 쓰촨답게 화자오(花椒)·생강·마늘 등을 첨가한 음식이다. 우리의 물김치와 유사하다. 한국 김치는 배추김치가 주를 이룬다. CODEX 규격에 김치는 ‘배추에 고춧가루·마늘·생강·파·무 등으로 만들어진 혼합 양념으로 버무려 발효시킨 제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번 ISO 인가의 파오차이는 단순한 채소절임인 피클류가 아닌 염장발효야채(salted fermented vegetables)로 명기돼 있고 ‘김치에 적용되지 않는다’ (This document does not apply to kimchi)고 부가 설명을 달았다. 염장발효야채에는 우리의 동치미나 장아찌가 들어가는데 CODEX 규격에는 배추김치만 있다는 점은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에게 김치는 배추김치만이 아니다. 2004년 출간된 『김치백과사전』에는 일반 김치(2400여종), 장아찌(680여종), 겉절이(50여종)가 나온다. 우리 김치는 복합 발효를 거친 최고의 음식이라는 국뽕식 반응보다 냉정한 현실 인식과 대응이 필요한 때다. 김치의 인정 투쟁은 아직 진행형이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12.09 00:12

  • [박정배의 시사음식] 김치, 그리고 김장

    박정배 음식평론가 김장철이다. 올해 배추와 무 가격은 안정세를 찾은 반면 고추·마늘값은 평년보다 크게 치솟았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겨울 김장 김치는 식량의 반이다. 1970년대 서울 안암동 산동네에 열 가족이 모여 살던 내게 초겨울은 배추 100 포기를 나르는 노동의 시간이었다. 마당에서 배추를 절이고 속을 채우고 돼지고기를 삶아 겉절이와 함께 먹던 작은 축제 덕에 우리 가족은 겨울을 즐겁게 났다.   한민족과 김치는 불가분이다. 특히 김장 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며 한국인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대표하게 됐다. 반면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김치는 담가 먹는 문화에서 사서 먹는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김치 사랑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2016년 국민 1인당 김치 소비량은 36.1㎏을 기록했고, 지난해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2019년 1인당 쌀 소비량(59.2㎏)의 절반을 넘는다.   [사진 박정배] 김장은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의 시 ‘가포육영’(家圃六詠)에 처음 등장한다. ‘(무는)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넘긴다’(漬鹽堪備九冬支)란 구절이다. 조선시대엔 음력 10월에 담가 겨울철 궁핍함을 대비했다. 진미는 아니지만 매일 맛볼 수 있는 일용할 양식(권근『양촌집』)이었다. 18세기 들어 배추·고추·생강·파·젓갈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지금 배추와 같은 결구 배추 재배에 성공하고, 새우젓을 본격 사용하면서 오늘날의 통배추김치가 완성됐다. 무는 채의 형태로 배추와 통합됐다.   1950년대 도시화는 김치 문화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대도시 인구 급증과 먹거리의 부족으로 저렴한 김치가 도시 서민의 주식 같은 부식이 됐다. 사실 배추는 19세기에 중국 산둥 결구 배추가 국내에 도입된 이후 줄곧 가을에만 재배됐다. 하지만 배추김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사시사철 신선한 김치를 맛보고 싶어하는 요구가 생겨났다. 남북으로 긴 지형적 특성과 60년대 보급되기 시작한 비닐하우스 덕분에 배추는 연중 재배가 가능해졌다. 봄철엔 남부 지역 비닐하우스에서, 여름에는 강원도 해발 700m 이상의 고랭지에서 배추가 나왔다. 온난한 제주와 남해안 지역에서는 겨울 배추가 재배됐다.   60년대 서울은 만원(滿員)이었다.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아파트가 건설됐고 김치를 보관하던 장독대가 아파트의 골칫거리가 됐다. 더욱이 70년 와우아파트 붕괴의 한 원인으로 장독대가 지목되면서 큰 시련을 겪게 됐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이런 문제를 풀어줄 혁신적 가전이 등장했다. 바로 김치냉장고다. 사계절 내내 아삭한 김치를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이처럼 김치는 한민족에게 가족을 닮았다. 한번 시작된 인연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웃 간 나눔이란 김장의 정신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11.11 00:20

  • [박정배의 시사음식] 간장, 문화와 과학 사이

    박정배 음식평론가 우리 음식의 기본은 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훌륭해도 간이 잘 맞아야 한다. 사람도 그렇다. 싱거운 사람, 짠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한식의 기본 베이스는 간장이다.   요즘 간장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식약처가 최근 혼합간장에 산분해간장 등의 함량을 잘 보이게 표시하도록 하는 ‘식품 등의 표시기준’ 일부 개정 고시안을 행정 예고했다. 이를 두고 찬반이 분분하다. 간장은 제조 방식에 따라 한식간장과 양조간장, 산분해간장, 양조간장과 산분해간장을 섞은 혼합간장, 효소분해간장으로 나뉜다. 산분해간장은 산을 이용해 간장의 주성분인 콩의 단백질을 단기간에 분해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자료에 따르면 국내 간장 시장은 혼합간장의 판매액이 1785억원으로 전체의 50%를 차지했다. 양조간장 32.9%, 산분해간장 11.1%, 한식간장 6.5% 순이었다. 그런데 혼합간장 성분의 대부분은 산분해간장이다. 왜 산분해간장이 나타났을까. 간장의 주원료인 콩의 단백질은 분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메주를 이용한 전통 방식으로는 1년이 걸리고 분해율이 30~50%에 그친다. 양조간장은 6개월에 60%, 산분해간장은 일주일에 90% 이상의 단백질을 분해한다. 산분해간장이 다른 간장보다 경제성이 뛰어난 것이다.   [사진 박정배] 단백질은 분해돼야 감칠맛을 낼 수 있다. 간장은 한국의 고유어 ‘간’에 한자 장(醬)이 결합한 말이다. 간장은 오랫동안 어느 집에서나 담가 먹는 한국인의 주된 소스였다. 간은 ‘간간하다’는 말의 어근으로 짠맛을 뜻한다. ‘지렁’이라고도 하는데 어근은 ‘질’로서 역시 짜다는 말로 소금의 뜻도 지녔다. 조선시대에 간장은 간장(艮醬)·청장(淸醬)·수장(水醬) 등으로 불렀다. 『산가요록』(山家要錄, 1450)이나 『쇄미록』(瑣尾錄, 1591~ 1601)에서 보듯 한국 음식의 핵심 요소였다. 한국인은 짠맛을 소금으로 직접 내는 것보다 간장·된장·젓갈·장아찌·김치 등을 통해서 간접 섭취하는 걸 즐겼다.   전통 간장은 콩과 소금과 물로만 만드는 탓에 감칠맛과 짠맛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곡물 위주의 음식과 국물의 민족이었던 한국인에게 간장은 맛의 바탕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양조간장인 장유(醬油) 문화가 스며들었다. 콩과 소금에 밀이 들어간 장유는 감칠맛과 단맛을 두 축으로 한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던 간장공장은 북에서 온 실향민과 전쟁통에 장을 담가 먹을 수 없는 사람이 급증한 까닭에 살아남았다. 양조간장보다 감칠맛이 강하고 가격도 저렴한 산분해간장과 혼합간장은 아파트 때문에 사라진 장독대를 대신해 간장을 사 먹는 문화가 정착하면서 우리 맛의 대세가 됐다. 간장은 한국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액체이자 맛의 중심이다. 간장은 과학이자 식문화다. 둘 사이의 대화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10.14 00:23

  • [박정배의 시사음식] 송편은 교자일까?

    박정배 음식평론가 추석이 코앞이다. 추석은 한국인 고유의 추수 감사제다. 그해 첫 수확한 쌀로 술과 떡을 빚어 조상께 올리고 이웃과 나눠 먹는다. 햅쌀로 빚은 송편은 추석의 상징이다. 추석에 송편을 먹은 기록은 19세기 초반에 처음 나타난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1816)에 ‘신도주(新稻酒), 오려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란 구절이 나온다. 오려송편은 추석 전에 추수하는 조생종(올벼) 벼로 만든 송편이다. 조선시대에 송편은 봄에 먹거나(『도문대작』·1611년) 사월 초파일(『택당집』·1674년)이나 유두일(『상촌고』·1630년)에 즐긴 음식이었다. 송편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김수온(1409~1481)의 시에 나오는데, 진관사에서 저녁에 두부구이와 함께 먹던 술안주였다.   송편이 왜 일 년 내내 먹던 음식에서 추석의 시식(時食)으로 자리 잡았는지는 불확실하다. 19세기 이후 한강 이남에서 추석 음식으로 시작됐고, 1970년대 이후 쌀의 자급이 이뤄지면서 추석상 대표 음식이 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사진 박정배] 송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중국의 영향이 있었다. 첫째, 곡물가루를 나뭇잎으로 감싸 찌는 각서(角黍), 혹은 주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각서는 지금 중국의 종쯔(粽子)다. 종쯔는 찹쌀 반죽 안에 대추·고기·팥 등을 넣고 싸서 삶아 먹는 음식이다. 옛날에는 조를 소로 싸서 먹었기 때문에 서(黍)라는 글자가 들어갔고, 찹쌀로 바뀌면서 종쯔로 이름이 변했다. 주악은 찹쌀가루를 송편처럼 빚어 소를 넣고 기름에 지져 먹는 음식이다. 중국과 일본이 찹쌀로 떡을 빚는 것과 달리 한국은 주로 멥쌀로 떡을 만든다.   둘째, 만주족의 교자(餃子)인 자발발(煮餑餑)의 영향이다. 조선 후기에 송편을 표기하는 한자 표기는 송병(松餠)과 함께 송편(松䭏)·엽불(葉餑)·엽자불(葉子餑)·엽자불불(葉子餑餑)이 쓰였다. 발발(불불·餑餑)은 만주족 고유의 말로 분식을 총칭하는데 교자를 뜻하기도 한다. 몽골족이나 여진족은 교자를 편식(匾食)으로 불렀다. 지금 옌볜에서는 송편을 편식의 중국 발음인 ‘벤세’로 부른다. 송편은 교자와 흡사한 반달 모양이다. 밀로 만든 중국 북방의 교자가 멥쌀 문화권인 한국에 넘어오면서 모양은 남고 피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송편은 한국인의 창작물인 게 분명하다. 조선 순조 때 중국 연경(현재 베이징)에 다녀온 기록인 『계산기정』(1803)에 “고려병(高麗餠)은 즉 송병(松餠)이다. 고려보(高麗堡)에서 파는 것인데, 우리나라 떡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고려병이라 부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유민들이 끈질기게 놓지 못한 고향 고려의 떡이 바로 송편이다. 송편은 멥쌀을 먹고 살아온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뼈와 살이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09.16 00:33

  • [박정배의 시사음식] 햄버거와 햄버거병

    박정배 음식평론가 두 달 전 경기도 안산의 한 유치원에서 17명이 용혈성 요독증후군(HUS)에 집단 감염됐다. 병원성 대장균 O157이 장내 출혈과 설사를 일으키는 질병이다. 이번 사고의 원인은 아직 불명확하다. 보건 당국은 급식재료를 보관하는 냉장고의 성능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지난주 발표했다.   용혈성 요독증후군은 햄버거병으로도 불린다. 최초의 발병이 햄버거 패티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1982년 미국 오리건주의 햄버거 가게에서 덜 익은 패티를 판매하면서 생겨났다. 미국에서는 패티를 스테이크의 레어처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덜 익혀 먹는 문화가 있다. 이후 94년 일본에서 2만 명 가까운 O157 환자가 발생해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햄버거는 점심을 간단하게 때우는 미국 음식문화의 상징이다.       19세기 독일 함부르크는 유럽인의 미국 이민의 출발항이었다. 고기를 잘게 잘라먹는 함부르크 스테이크는 미국 이민의 관문 뉴욕에서 유행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선 비싼 쇠고기가 대중화되면서 ‘아메리칸 비프 드림’(American beef dream)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함부르크 스테이크 스타일로 잘게 다진 소고기인 패티를 빵 사이에 넣고 양파와 치즈를 넣어 먹으면서 햄버거가 탄생했다. 특히 노동자에게 인기가 있었다. 고기를 빠르고, 싸게 먹을 수 있었다. 단백질과 지방에 빵의 탄수화물, 야채까지 곁들인 햄버거는 미국을 석권하고 각국으로 확산하면서 전 세계 물가지수의 기준인 빅맥 지수를 낳게 됐다.   햄버거. [사진 박정배] 한국에서 햄버거는 60년대 분식장려운동의 하나로 소개됐고, 80년대 프랜차이즈 외식업의 대표 상품으로 떠올랐다. 9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고, 2000년 초반 광우병 파동과 웰빙 열풍으로 주춤했으나 콩으로 만든 패티가 등장하는 등 지금도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100여 년 역사의 햄버거가 20세기 후반 들어 집단 감염의 원인으로까지 지목된 데는 O157의 변이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산성이 강한 인간의 위 속에서 내성이 생긴 대장균에 진화가 생겼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다지지 않은 고기는 표면에 균이 침투해도 고기 안까지 상하는 일은 드물다. 반면 다진 고기는 균에 오염될 가능성이 일반고기보다 크다. 다행인 것은 O157은 70도 이상의 열에서는 완전히 사멸한다. 조리 위생 및 기준 강화가 필요한 이유다.   O157은 햄버거 패티뿐만 아니라 야채나 다른 가공 육류, 우유에서도 발생한다. 지난달 말 국회에선 햄버거 패티 같은 분쇄포장육의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 적용과 자가품질검사를 의무화하는 축산물 위생관리법, 집단급식소의 위생관리 규정을 강화하고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집단급식소의 정의에 명시하는 식품위생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 햄버거, 그에 못지않게 안전 문제를 서두를 때가 왔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08.19 00:11

  • [박정배의 시사음식] 오징어를 지켜라

    박정배 음식평론가 오징어가 돌아오고 있다. 일명 ‘금징어’에서 다시 오징어로 제 이름을 찾았다. 2008년 2만5378톤에서 2016년 7297톤으로 급감한 뒤 2019년까지 같은 추세를 이어온 오징어 생산량이 올해 들어 급증하고 있다. 올해 6월 현재 지난해보다 8배 이상, 2년 전보다 5배 이상 많다.   오징어가 몇 년간 사라진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북한 수역의 중국 어선 규모가 늘어났다. 2004년 144척에서 2014년 1904척으로 껑충 뛰었다. 최근 3년(2017~2019) 연평균 2000여 척이 북상한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 어선은 쌍끌이같이 촘촘한 그물로 어류를 싹쓸이한다.     이와 반비례해서 국내 오징어 어획량은 급감했다. 여기에 불법 조업과 오징어 주산지인 동해안의 어부들이 채낚기(낚시)로 잡는 것과 달리 서해와 남해의 근해자망 어선이 그물로 잡는 것도 문제가 됐다.   오징어. [사진 박정배] 둘째, 바다 수온의 변화다. 결정적인 원인이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한반도 근해의 바다 수면 온도가 상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바닷속 온도는 좀 복잡하다. 우리나라 바다는 아열대 어종 서식지 북방한계선이고 냉수성 어종 서식지 남방한계선이다.   정석근 제주대 해양과학대 교수에 따르면 1988~1989년 우리나라 바다 표층은 동·서·남해를 가리지 않고 수온이 급상승했다. 반면 수심 100~200m 온도를 보면 고성 앞바다에서는 1990년대 이후 큰 변화가 없었으나 북한 해역인 함흥과 명태 주 산란장인 원산 앞바다에서는 섭씨 3도 이상 상승했다. 반대로 동해 남단인 영일만의 경우 오히려 2도가량 내려갔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에 의하면 지난달 동해 연안 수온은 지난 5년 평균보다 높게 형성됐다. 오징어 서식 적정 수온인 17~18도가 유지되면서 오징어 어장이 넓게 형성됐고, 어획량 또한 크게 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서해안에 오징어가 나타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지만 오징어는 조선시대 내내 한반도 바다 전역에서 잡혔다. 조선시대에 오징어는 진상품(세종실록 1421년 1월 13일)이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에 따르면 참조기(8푼)보다 비싼(생오징어, 6전) 어물이었다. 1930년대까지도 오징어 생산량은 조선의 주요 수산물 중 44위에 머물 정도로(1939년 7월 8일, 동아일보) 귀한 존재였다.   하지만 1940년대 이후에 바다 기온의 변화로 어획량이 급증하기 시작하더니 60년대가 되면 조기에 이어 2위의 어획고를 기록하면서 국민 어물로 등극했다. 2020년 6월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조사에서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수산물 1위로 오징어가 꼽혔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의 동해 오징어의 급격한 감소는 보다 깊이 있는 과학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명태가 떠난 텅 빈 동해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07.22 00:37

  • [박정배의 시사음식] 냉면이 뭔 잘못인가

    박정배 음식평론가 남북한 민족 화해의 상징이었던 평양냉면이 수난을 겪고 있다. 최근 평양 옥류관 주방장이 “국수 처먹을 땐 요사 떨더니…”라며 우리 정부를 향해 막말을 내뱉었다. 남한 측에 대한 음식 타박이 슬프기만 하다. 평양 옥류관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다. 옥류관은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구상하고 완성한 북한의 ‘민족 료리의 원종장(原種場)’이다.   북한에서 냉면은 전통과 선전의 상징적인 음식이다. 19세기 후반의 평양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인 ‘기성전도’(箕城全圖)에는 대동문 옆 동포루(東砲樓) 앞에 ‘냉면가(冷麵家)’가 표시돼 있다. 지금 옥류관과 그리 멀지 않은 대동강변 성 안쪽이다.   조선 후기부터 평양은 냉면의 본향이었다. 일제강점기 ‘평양상업조사’(1939년)에는 냉면 식당이 전체 음식점 578개 가운데 127개로 단일 업종으로는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전통에 더해 1960년대 이후 냉면은 북한 정권의 강력한 상징이 된다.   평양 옥류관에서 제공하는 냉면. [중앙포토] 북한의 냉면 기사에는 김일성 주석이 자주 등장한다. 냉면은 직접 조리법을 지도한 수령이 사랑한 음식이자 ‘로동당 시대에 와서 더욱 빛을 내며 유명해진’(로동신문, 1995년 9월 21일), 북한의 식량 정치(food politics)의 중심에 있는 ‘민족의 대표 음식’이다. 평양냉면은 김치 담그기, 신선로와 함께 북한의 비물질문화 유산에 정식으로 등록돼 있다. 남북 정상회담 때 옥류관 냉면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런 전략적 위치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18년 4월 판문점 남측 지역에서 있었던 3차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옥류관 기계를 가져와 냉면을 먹은 것은 음식 정치의 전술적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음식이 지닌 정치적 함의로도 그렇지만 전 세계가 지켜보는 최고의 기회에 대한민국의 음식을 알릴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서울을 대표하는 설렁탕이나 좀 더 세련된 곰탕이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분단 이전에 평양에선 냉면이, 서울에선 설렁탕이 대표 외식이었다. 물론 당시 서울에도 냉면 가게가 많았다. 겨울이면 설렁탕집이 성업했는데 냉면집에서도 설렁탕을 팔았다. 여름에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남북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오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냉면이든 설렁탕이든 국물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한민족이 즐겨온 음식의 대표적 특징이다.   한민족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냉면 같은 차가운 국을 먹는다. 중국 옌지(延吉)에도, 일본 모리오카(盛岡)에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도, 한민족이 사는 곳에 차가운 냉면이 있고 뜨거운 고깃국이 있다.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을 우리는 식구(食口)라 부른다. 그런 음식을 가지고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은 식구의 도리가 아니다. 여름철 한복판에 들어선 지금,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이 더욱 소중할 뿐이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06.25 00:17

  • [박정배의 시사음식] K푸드의 아이돌 ‘달고나’

    박정배 음식평론가 달고나(Dalgona)의 강렬한 단맛이 뜨고 있다. 구글에 따르면 ‘달고나 커피(Dalgona coffee)’는 지난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커피 종류로 집계됐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중에 방탄소년단 지민과 RM이 달고나 커피 만들기를 네이버 VLIVE에서 시연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1960년대 설탕이 부족한 시절, 설탕과 소다를 섞어 만든 과자 달고나와 커피의 결합은 K푸드의 새로운 아이돌로 태어났다. 달고나는 60년대 부산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부산은 일본과의 음식적 연관성이 많다. 일본에는 달고나와 비슷한 카르메야키(カルメ焼き)라는 과자가 있다. 단것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카라멜로(caramelo)에서 유래했다.   60년대 한국인에게 커피와 각설탕은 ‘좀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다방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어른들은 커피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셨다. 아이들도 달고나의 말랑한 식감에 빠져들었다. 달고나는 70년대 불량식품의 대명사이자 단것의 전도사였다. 80년대 들어 아이스크림·초콜릿 같은 세련된 단것들이 등장하면서 달고나는 추억의 음식으로 남을 뻔했다.   달고나 커피(왼쪽)와 달고나. [사진 박정배] 2000년대 말 복고 바람과 함께 달고나가 돌아왔다. 2010년대 중반 달고나를 넣은 커피가 등장했지만 한국과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건 코로나19로 집에 갇힌 사람들이 커피와 설탕을 섞어 저어 만드는 달고나 커피를 먹으면서부터다.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원했던 ‘한식의 세계화’는 아무도 예상 못 한 것에서 이뤄진 셈이다.   한식의 세계화는 2009~2014년 6년 동안 예산 1200억원이 들어갔다. 남은 것은 빈 깡통 같은 슬로건뿐이었다. 대표선수로 떡볶이가 나섰지만 결과는 같았다. 세계화는 개별성과 보편성의 두 날개를 갖춰야 한다. 떡볶이는 한국인이 좋아한다는 점에서 개별성을 지녔지만 물컹한 떡과 매운 소스를 좋아하는 외국인은 많지 않았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음식의 세계화가 지닌 폭력성이다. 음식문화는 강요할 수 없다. 이방인이 스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역 음식을 지키는 슬로 푸드(slow food)는 86년 이탈리아에서 패스트푸드(fast food)의 상징 맥도널드 햄버거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시작됐다.   누구나 낯선 음식은 경계한다. 생명과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치맥 문화가 드라마에서, 짜파구리가 영화에서, 달고나가 K팝에서 시작된 것처럼 낯선 것을 허무는 지름길은 문화와의 만남이다. 현지화 없는 세계화는 없다. 세계인이 즐기는 커피에 한국식 단맛이 결합하고 방탄소년단의 문화 파워가 가미된 달고나 커피가 명쾌한 사례다. 달고나 커피에 이어 달고나 우유에, 달고나 빙수가 나오더니 이제 한식 다이닝 식당에서는 디저트 달고나까지 등장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선순환이 시작됐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05.27 00:19

  • [박정배의 시사음식] 우유를 어찌하오리까

    박정배 음식평론가 우유가 남아돈다. 학교 급식이 중단되면서 흰 우유 공급이 거의 멈춰섰다. 세계 곳곳에서도 우유가 버려지고 있다. ‘문명의 자양’이었던 우유가 코로나19로 수난을 겪고 있다.   우유는 고대부터 신성하고 좋은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은하수(Milky Way)는 헤라 여신의 젖으로 만들어졌다. 구약성경은 20여 차례 ‘우유와 꿀이 흐르는 땅’을 칭송했다. 산업혁명으로 런던 같은 대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하얀 우유와 붉은 고기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교외에서 갓 짜낸 우유가 도시로 모이며 노동력의 원천이 됐다.   도시는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했다. 반면 전염병 앞에선 파괴적이었다. 생우유는 싸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지만 대량 유통·소비되면서 소의 결핵균으로 인한 어린이 결핵이 발생했다. 광견병 백신 개발로 유명한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우유의 신선함을 살리면서 균을 죽이는 저온 장시간살균법(LTLT)인 ‘파스퇴르 살균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우유 한 잔. [사진 박정배]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에서 고기와 우유는 서구화·선진화를 상징했다. 메이지 일왕은 1871년에 1200년간 이어온 육식 금지령을 풀었다. 일본에서는 고기보다 우유가 더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다. 560년 백제인 지총이 일본에 우유를 소개한 뒤 일왕은 우유를 즐겨왔다. 일왕이 마신 우유는 일본인에게 장수와 명예의 징표였다. 서양인의 커다란 체격과 함께 일본인에게 우유는 영양 가득한 문명개화의 전령사였다.   조선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우유를 먹는 문화가 시작됐다. 20세기 초 우유는 ‘위생상 비교할 것이 없는 자양물로 그 효험이 보약 등과 두드러지게 매우 다른’(황성신문 1907년 9월 22일자) 영양 음식이었다. 병자와 어린이에게 약으로 인식됐다. 가정에 우유를 배달해 먹는 문화가 일부 부유층에 정착됐다.   황성신문 1907년 9월 22일자. [사진 박정배] 1950년대는 또 다른 변곡점이 됐다. 미국 정부가 4000만 파운드(약 1800t)의 탈지분유를 지원했다. 매일 분유 150만 컵이 아이들에게 제공됐다. 60년대 분식장려운동이 펼쳐지면서 빵과 우유는 학교급식과 군대식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남양유업(1964), 빙그레(1967), 매일유업(1969)이 설립되며 우유 대중화가 이뤄졌다.   우유를 이용한 다양한 유제품이 나오면서 2019년 1인당 원유 소비량(82.2㎏)은 쌀 소비량(59.2㎏)을 훌쩍 넘어섰다. 양만 놓고 보면 주식이 쌀에서 우유로 바뀐 셈이다. 한국인에게 우유는 문명의 자양에서 일상의 음식으로 체화됐다. 그런 우유가 코로나19 범유행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서구화·세계화·선진화 모델인 서양과 일본의 한계마저 보는 것 같다. 버려지는 우유는 문명의 자양이 바뀌는 현장이다. 거대한 변화는 음식 같은 미시의 세계에서 종종 본질을 드러낸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04.29 00:13

  • [박정배의 시사음식] 코로나19와 배달 음식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년 4월 1일 기자 디파이나인(Dπ9)은 1층에 있는 식품점에서 진공 파이프로 배달된 음식 세트의 자기 몫을 받아 플라스틱제 포장을 뜯어 버리고 오렌지 주스부터 꺼내 마셨다.”   1970년 4월 1일 자 한 일간지에 실린 미래 예측 기사다. 소설가 김승옥이 꼭 50년 전에 썼다. 배달 음식이 일상화한 오늘을 내다봤다. 시장조사기관 매켄지는 4년 전 외식시장에서 배달 음식이 차지하는 비율을 2016년 36%에서 2020년 58%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실제로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민족은 배달 음식에 익숙하다. 조선 후기 황윤석의 『이재난고』(頤齋亂藁·1768)에는 ‘과거시험을 본 다음 날 점심에 일행과 함께 냉면을 시켜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말 문신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5)에는 남한산성에서 서울 북촌의 재상 집으로 배달된 해장국 효종갱(曉鍾羹)이 등장한다. 일본에서도 18세기 초·중반에 소바를 배달해 먹는 데마에(出前) 문화가 선보였다. 서양 배달 음식의 원조는 피자다. 1889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움베르토왕 부부가 궁전으로 배달해 먹은 게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배달 음식은 냉면과 설렁탕이었다. 서울 설렁탕집 이문식당에는 배달원만 20여 명 있었고, 평양·인천에는 냉면 배달노조가 생길 정도였다. 당시 인천의 냉면을 서울에서, 서울의 냉면을 인천에서 배달해 먹은 기록과 증언도 있다.   [사진 박정배] 배달 음식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다. 1960년대 중반 시작된 분식장려운동이 주요 전환점이 됐다. 사람들은 중국집에서 짜장면·만두를 시켜 먹었다. 70년대 들어 직장인 도시락 배달이 시작됐고, 90년대 초 팩시밀리가 보급되면서 약도를 이용한 배달이 유행했다. 또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면서 가정 주문 음식사업이 커졌다.   92년 시작된 택배는 배달 문화에 불을 댕겼다. 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이 보편화하며 배달 주문은 온라인으로 확장됐다. 080 무료전화, 핸드폰의 확산으로 배달은 유망 산업으로 성장해갔다. 각종 광고 스티커·전단지가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죽했으면 한강 둔치 일대의 주문이 폭증하자 서울시가 ‘철가방과의 전쟁’에 나섰을까.   2009년 말 등장한 스마트폰은 음식 배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배달의 민족’ ‘배달통’ ‘요기요’ 등 음식 앱이 나오면서 외식산업의 거대한 흐름이 됐다. 2013년 중국에서 음식배달을 시작한 메이퇀은 현재 세계 1위를 질주 중이다. 한국에서 배달시장이 급성장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동네 상권의 발달, 외식 창업자 급증, 빨리빨리 문화, 1인 가구 확대, 여성의 권익 신장 등이다. 여기에 미증유의 전염병까지 가세한 상황이다. 본격적인 ‘배달 음식 인류’의 탄생이 눈앞에 있다.   박정배 음식평론가

    2020.04.01 00:18

  • [박정배의 시사음식] 코로나19와 라면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 라면은 쉽다. 값이 싸고 보관도 용이하다. 조리가 편하고 맛도 적당하다. 지난달부터 라면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코로나19와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 때문이다.   라면은 태생적으로 전쟁·기근과 관련이 있는 먹거리다. 중국 서북쪽 란저우의 늘여 만든 라미엔(拉麵)이 일본에서 라멘(ラーメン)이 됐다. 전후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일본은 수분을 최소화한 인스턴트 라멘을 낳았다. 1960년대 한국에서는 도시 인구 증가와 잇따른 흉작으로 혼·분식 장려 운동이 펼쳐졌다. 분식에 익숙한 화교들이 짜장면·짬뽕·만두로 혼·분식 캠페인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1963년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삼양라면이 등장했다. 60~70년대 내내 라면은 가정은 물론 학교·군대를 통해 한국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맛의 경험을 남겼다. 삼양라면은 63년 900만원에서 66년 10억원, 70년 100억원이란 폭발적 매출을 기록했다.   [사진 박정배] 분식 장려 운동이 한창이던 69년, 충무로에서는 신영균·최은희 같은 당대 최고 스타들이 분식점을 차려 화제가 됐다. 인스턴트 짜장면이 70년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당시 중식당의 대명사인 아서원이 참여한 농심 인스턴트 짜장면은 짜파게티로 거듭났고, 너구리를 만나면서 짜파구리가 태어났다. ‘기생충’ 두 가족의 이상한 동거를 상징하는 짜파구리는 채끝이 더해지면서 생존의 음식에서 미식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했다. 요즘 미국에서 일본과 시장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후발 주자 한국 라면이 성공의 터닝 포인트를 찍을 가능성이 크다.   2003년 사스 공포가 중국을 지배했다. 한국에서 사스 감염이 이례적으로 적은 이유를 외신이 김치와 매운맛으로 보도하면서 컵라면이 주도하던 중국 시장도 달라졌다. 한국의 김치라면·신라면 같은 봉지라면이 안착하게 됐다. 인스턴트 라면의 창시자 안도 모모후쿠는 라면과 김치의 결합을 보고 “한국인은 음식을 건강하게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극찬했다. 사스와 메르스·신종플루와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우리 사회를 공포로 몰고 갈 때마다 사람들은 라면을 비상식으로 준비하고 먹는다. 일본이나 중국은 우리보다 면을 많이 먹지만 인스턴트 라면보다 식당에서 즉석면을 즐긴다. 세계라면협회 통계를 보면 인스턴트 라면의 개인 소비에서 한국은 부동의 1위다. 예로 2018년 2위 베트남의 소비량(53.9개)을 20개 이상 따돌린 74.6개다.   라면은 두 얼굴을 지녔다. 먹기에 간편하지만 대규모 설비가 필요한 고난도 장치산업이다. 한국 라면은 치열한 경쟁 덕에 K팝만큼 탄탄하다. 요즘 상황처럼 꼬불꼬불한 면발이지만 밑바닥의 순간순간마다 라면은 삶의 연속성과 희망을 준다. “라면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

    2020.03.04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