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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배의 시사음식

복된 소망, 떡만둣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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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정배 음식평론가

박정배 음식평론가

정치인들이 재래시장을 어슬렁거리며 어묵이나 김밥을 먹는 장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선거철이 다가온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계급 간 ‘구별 짓기’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패션·음악·음식을 꼽았다. 정치인들의 시장 음식 먹기는 자신들이 서민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서민적 음식 상징을 능숙하게 이용한 대표적인 정치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농촌을 돌며 막걸리를 마셨고 ‘막걸리 대통령’으로 불렸다. 1976년 수원을 방문한 그는 새마을 지도자들과 함께 떡만둣국을 점심으로 먹었다. 부족한 쌀 때문에 생긴 정권의 핵심 과제였던 ‘혼분식 장려 운동’을 위한 것이었다.

다음 주말이면 설 연휴다. 예부터 한민족은 설날에 햅쌀로 만든 하얀 가래떡을 넣은 떡국을 먹었는데 조선을 지배한 주자의 성리학 때문에 중국의 만둣국이 떡국과 함께 설음식이 됐다. 조선 후기 문신 유척기(兪拓基·1691~1767)의 『지수재집』(知守齋集)에 나오는 ‘떡국과 만두를 만들어 새해를 센다’(湯餠饅頭作歲更)는 대목 등 떡국과 만둣국은 조선 중기 이후 설날의 시식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진 박정배]

[사진 박정배]

중국에서 들어온 만두는 1800년대 말부터 배추김치·숙주·두부 등이 소로 사용되면서 한국화한다. 조선의 만둣국은 중국의 혼돈(餛飩)을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지금의 호빵 같은 발효 만두를 ‘상화’로 불렀고 발효 안 한 소를 넣은 음식인 교자(餃子)는 ‘만두’(饅頭)로 불렀다.

조선시대에도 떡과 만두를 한 그릇에 먹는 떡만둣국을 추정할 수 있지만 기록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난다. 1938년 2월 1일자 잡지 ‘여성’에는 ‘정초 음식으로는 별미로 만둣국이 손꼽히는데 국수장국에 만두를 넣든지 떡국에 만두를 넣든지 해서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이라고 나온다. 내방가사 연구가 조애영이 1973년에 쓴 ‘조상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라는 기사(경향신문 1973년 2월 19일)에서 어린 시절 먹던 설 만둣국을 소개하면서 (만두를) ‘떡국과 반반씩 섞어 끓여 수백 명 손님을 먹도록 하는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떡만둣국이 대중화되는 것은 혼분식 장려운동 기간인 1960년대 이후다. ‘구정(설날)상 차리기에는 콩가루와 밀가루 섞어 만두를 빚고 가래떡(정부혼합곡으로 떡을 해도 쫄깃쫄깃하고 맛있다)으로 떡을 만들어 떡만둣국을 만들어 먹으라’(매일경제신문 1976년 1월 28일)고 나온다.

떡만둣국은 중국의 음식 문화인 만두(교자)와 한국적 세찬인 떡국이 만나 탄생한 문화 융합의 산물이다. 중국에서 교자는 재산과 자손 번성을 의미한다. 한국의 가래떡은 하얀색은 순수함을, 긴 것은 장수를, 엽전 모양으로 썬 것은 돈을 벌라는 의미다. 떡만둣국 한 그릇에 인간의 복된 소망이 가득하다.

박정배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