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훈 칼럼] 6·10 정신으로 민주주의 되살려야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필자 세대에게 6·10은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있는 날이다. 1987년 6월 10일 서울시청 앞 광장은 수십만 민주화 시민들로 터질 듯했다. 뜨거운 날씨 속에 흰 셔츠와 넥타이 차림의 수십만 회사원, 시민, 대학생의 민주화 함성은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날 오후부터 본격화한 민주화 물결은 결국 군부 집권당의 6·29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오랜 어둠은 걷히고 빛과 희망이 압도적이었던 6월이었다.   그로부터 37년, 민주화의 꿈과 희망은 누추한 현실로 주저앉았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빈사 상태다. 공천 과정이 편법, 반칙, 막말, 모욕으로 얼룩졌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압도적 의석을 얻었다. 민주주의의 생명줄인 제도와 규칙은 거대 야당에서 무의미해졌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국정운영 역시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와는 거리가 있다. 진영 정치의 폭력적 살벌함은 민주주의 붕괴 직전의 역사적 사례들이 보였던 증세들을 닮아가고 있다.     ■  「 1987년 민주화는 타협의 민주화 당시 온건파들이 대타협 이끌어 강경파에 끌려다니는 요즘 여야 6·10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    오늘 필자가 민주화 역사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한국 정치의 병은 너무 깊어서 한두 가지 제도개혁, 이를테면 요즘 제기되는 대통령 중임제 개헌이나 지구당 부활 등으로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사람들의 태도와 의식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도입되는 새로운 제도는 고작해야 어느 정치세력의 이익 실현 수단에 그치고 만다.   둘째, 제도 변경에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면 우리가 기댈 희망은 역사의 유산이다. 6·10에서 6·29, 그리고 87년 대통령 선거로 이어지던 과정을 돌아보면 오늘날 위기 타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하나는 민주주의 전환 과정에서 발휘된 타협의 정신, 또 하나는 진영 내 강경파를 제어하면서 타협을 주도했던 온건파들의 정치력이다.      먼저 한국 민주주의 탄생에 타협의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돌아보자. 타협은 6·29에서 그해 12월 대선까지 이어지는 체제 이행 과정을 이끌어간 규범이었다. 타협의 첫 계기는 6월 시민 항쟁의 요구를 대폭 받아들인 6·29 선언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민주화 시민들이 열망해 온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아울러 민주화 지도자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과 대선 참여가 가능해짐으로써 민주적 경쟁이 실질화되었다.   권력을 쥐고 있던 권위주의 세력 입장에서는 힘을 앞세워 시민들과 충돌하거나 혹은 시민들에게 전면적으로 굴복하는 선택지도 있었겠지만, 6·29 선언을 앞세워 타협의 길을 선택하였다. 민주화 세력 역시 민주화 조치들을 수용하고 이후 직선제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의 불확실한 과정을 군부 정권이 관리하는 데에 합의하는 포용적 선택을 함으로써 타협의 큰 틀이 성립되었다.   뜨거웠던 민주화 열기가 양 진영의 타협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각 진영 내 온건파들의 역량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민주화 세력은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생, 종교계, 노동운동계, 급진운동계, 그리고 광장에 나섰던 시민들. 이들 중에 타협의 민주화를 거부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을 이끄는 상징적인 두 인물,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 진영 내의 강경파를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으면서 타협의 기조를 유지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군부 정권 내의 온건파가 입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한 양보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양 김 씨는 새 6공화국 헌법에 군부의 정치 중립 조항이 명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음으로써 상대측 온건파가 숨 쉴 공간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강경파와 온건파가 팽팽히 맞서던 군부 정권의 내부 사정 역시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노태우 후보 중심의 온건파는 다가오는 서울 올림픽 개최의 중요성, 물리적 충돌이 빚을 파국적 결과 등을 내세워 강경파를 설득, 회유, 압박하는 데에 성공하고 타협의 끈을 유지하였다.   정리하자면, 민주주의의 붕괴 과정에 대한 통찰 하나가 요즘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단번에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수백, 수천 번 거듭된 상처를 입으면서 쓰러진다.”   오늘도 여의도 국회에서는 한국 국회의 타협 관행을 무너뜨리는 거대 야당의 독주가 지속되고 있다. 소수당에게 법사위원장의 요직을 내주던 포용과 공존의 관습은 내팽개쳐지고 있다. 또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시도 이후 설익은 탄핵의 칼을 언제든 꺼낼 듯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대통령제는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다.   37년간 상처에 상처가 더해지며 비틀거리는 한국 민주주의를 바라보면서, 오래전의 꿈을 다시 꾼다. 강경파의 주문에 춤추기보다 이들을 제어하고 온건파에 귀 기울이는 리더는 어디에 있을까? 눈앞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법을 바꾸고 당헌, 당규를 바꿔치는 정치를 종식할 인물은 어디에 있을까? 그해 6월 온건파들 간의 대타협에 박수치던 민주화 시민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2024.06.10 00:38

  • [이하경 칼럼] 윤석열·이재명 내전 중지가 진짜 정치다

    이하경 대기자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인을 정죄(定罪)했다. 기독교를 박해하더니 기독교도가 된 뒤에는 예전의 신앙들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나머지 종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가 가톨릭 교회에 의해 두 세기 동안 금서(禁書)로 지정됐던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의 변신은 기번이 문제 삼은 로마의 급변침과 유사하다. 출발은 문재인 정권의 칼잡이였고, 국민의힘 세력을 초토화시켰다. 윤석열 사단 검사들은 전직 대통령과 대법원장·국정원장·장관·국회의원들을 쉴 새 없이 감옥으로 보냈다. 윤 검찰총장은 조국 사태 이후 지휘권 박탈의 수모를 겪었다. 국민의힘의 선택을 받았고, 대통령이 됐다. 과거의 우군을 향해 탄핵의 피가 묻은 바로 그 칼을 휘둘렀다. 이재명·조국·송영길을 향한 끝없는 수사와 압수수색, 재판이 이어졌다. 예수를 죽이고 기독교를 핍박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더니 나머지 종교의 숨 쉴 공간을 틀어막은 것과 흡사하다. 관용과 통합이 사라진 극단의 정치다.     ■  「 윤석열 변신 로마 급변침과 유사 어제의 우군을 향해 가혹한 공격 ‘여의도 대통령’ 이재명도 복수전 민생·안보·통합 위해 사격 중지를 」    윤석열 정권은 경직성이 문제다. 직진하다 막히면 설득과 타협이 아닌 수사를 통해 군기를 잡았다. 아내는 봐주면서 정적은 가혹하게 대했다.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였다. 칼의 힘을 과신하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미덕은 사라졌고, 정책은 저항에 부닥쳐 있다. 노련한 한덕수 총리의 진두지휘로 국민이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의대 증원도 대통령이 2000명으로 대못을 박으면서 의사들의 결사항전을 불렀다. 신기술의 생명줄인 연구개발(R&D) 예산을 ‘카르텔’이라고 공격하다 역풍이 불자 느닷없이 ‘예비타당성 면제’ 카드를 꺼내들었다. 과학계는 혼란 상태다. 억울하게 죽은 해병대 채 상병 사건 수사 과정에서 터진 ‘VIP 격노설’로 군통수권자가 현역 군인들의 반발을 사는 상황까지 초래했다.   171석을 거머쥔 거대 야당도 퇴행의 길을 걷고 있다. ‘여의도 대통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몽골 기병식 입법 속도전”을 다짐했다. 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종합특검법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일 태세다. 본인 한 사람을 위해 당헌도 고치기로 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한동훈 특검법을 추진하고 있다. 여의도는 칼을 휘두르겠다는 살기(殺氣)로 가득하다. 이 대표가 세계 제국 몽골의 진면목을 알고 있을까. 기번은 13세기의 칭기즈칸에 대해 “같은 군영 안에서 다양한 종교들이 자유롭고 조화롭게 설파되고 행해졌다”고 평가했다. ‘진짜 대통령’이 되려면 통합과 관용을 우선 순위에 두고 민생과 안보를 위해 윤 정부를 진심으로 도와야 할 것이다.   현 대통령의 임기를 1년 단축하는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이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있다. 한국 정치를 남미 수준으로 추락시킬 ‘두 번째 탄핵’보다는 낫다. 그러나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보지 않고 유리할 때 서둘러 정권을 잡겠다는 심산이라면 곤란하다. 일본은 유럽 각국의 헌법을 연구하면서 10년간 노심초사한 끝에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권한을 축소하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만들어 근대화에 성공했다. 우리는 불과 3주 만에 제헌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권력구조는 단 하루 만에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뀌었다. 이렇게 졸속으로 만들어진 제왕적 대통령제는 다원적 가치의 존중이라는 시대정신과 심각하게 불화 중이고, 정치적 내전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이대로 가면 자격 미달의 정치세력이 번갈아가면서 집권해 복수혈전을 반복할 것이다. 국가적 불행이다. 우리의 안보 현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핵을 가진 북한은 중국·러시아와 밀착 중이고, 저강도 전쟁에 돌입했다. 정부 서울청사 옥상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 연일 오물 풍선이 날아들고 있다. 생화학무기가 들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북의 위성항법장치(GPS) 전파 교란이 인천공항을 겨냥하면 하늘길은 바로 막힌다. 군사도발과 테러, 심리전이 결합된 하이브리드전은 한반도를 중동처럼 상시 분쟁 지역으로 만들 수 있다. 김정은이 호언한 대로 남북이 “교전 중인 두 개의 국가”임을 국제사회가 실감하면 대외 신인도가 추락할 것이다. 이 판에 여야가 사소한 차이로 싸움을 벌여야 하는가.   플라톤은 저서 『법률』에서 “내란은 모든 전쟁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다”고 했다. 여야의 지도자들은 최악의 지점을 향하고 있는 민생과 안보를 지키기 위해 내전을 즉시 중지해야 한다. 그게 국민을 살리는 진짜 정치다. 위구르의 칸은 관용과 통합을 위해 전쟁과 살육을 부정하는 마니교를 선택했다. 3세기의 교주 마니는 “지혜와 행동은 인도에서 붓다를 통해,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를 통해, 또 어떤 때는 예수에 의해서 사방에 전해진다”라고 경전에 적었다. (『징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잭 웨더포드) 민주주의의 대전제인 차이가 차별과 내전을 부르는 이 끔찍한 지옥의 문을 누군가는 부숴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4.06.03 00:41

  • [최훈 칼럼] 달콤한, 그러나 치명적인 ‘다수의 유혹’

    최훈 주필 자고 나면 ‘특검’ ‘탄핵’ ‘거부권’뿐인 정치다.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장관·검사들에 대한 새 국회의 일상적·적극적 탄핵”도 예고했다. “채 상병 특검 거부 등 탄핵의 방향으로 기름을 부어 온 건 당사자인 윤 대통령”이라는 게 야당의 자기합리화다. 물론 정권의 독선적 태도, 법 집행의 형평성에 결코 믿음을 받지 못해온 검찰 등이 이 분란의 원인을 제공해 온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통치다.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제도”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역시 “윤석열도 미덥지 않지만 그래도 이재명보다는 낫겠다”가 0.73% 차의 다수였다. 지금 윤 대통령의 ‘고난’은 0.73%를 되새겨 포용과 겸손, 소통과 경청을 하지 못해 온 탓이다. 역으로 소수를 존중하고, 다수의 독주가 낳을 해악 역시 막아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대통령의 전횡을 막으려 의회엔 인사청문회, 총리·장관 해임건의안, 국정감·조사, 탄핵소추 권한을 주었다. 거꾸로 의회 다수의 횡포를 막으라고 대통령에겐 법안 거부권, 예산 편성권 및 (의회의) 예산 증액에 대한 동의권을 갖게 했다.     ■  「 특검·탄핵·거부권 갈등뿐인 정국 민주당, 일상·적극적 탄핵 예고도 이재명의 미래, 다수 급발진보다   국가 난제 해결 의정 성과에 달려 」    서로를 견제토록 이리 못박아 놓은 건 그것이 ‘극히 예외적 상황’에서 사용되길 바랐다는 게 상식적이다. 불났을 때만 깨트리라는 소방벨처럼 말이다. 가능하면 그럴 일 없도록 잘 지내라는 기대 아니겠는가. ‘국민 다수’가 앉힌 대통령을 ‘의회 다수’가 몰아내는 건 가장 중대 사건이다. 명백·엄중한 사유여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손쉽게 탄핵하려던 다수는 분노의 역풍을 맞았다. 탄핵은 헌법재판소가 최종 결론내라고 2중 안전 장치까지 걸어둔 이유다.   건국 248년의 미국은 3명(앤드루 존슨, 리처드 닉슨, 빌 클린턴)의 대통령만 탄핵에 직면했다. 실제 탄핵된 이는 없었다. 한 세기에 한 번꼴의 시도였다. 반면에 페루에선 ‘도덕적 무능’을 탄핵 기준의 하나로 헌법에 넣어 재앙을 불렀다. 2022년까지 4년간 3명의 대통령이 ‘도덕적 무능’으로 의회 다수에 쫓겨났다. 태국 역시 탁신 총리가 군부에 밀려난 뒤 그의 최측근·매제·여동생 3명의 후임 총리들이 군부가 장악한 헌재에 의해 밀려났다. 그중 최측근이던 사막 순타라웻 총리는 취임 뒤 TV 요리 프로에 나가 네 차례 500달러씩 출연료를 받았다가 ‘(겸직 금지) 헌법 위반’으로 쫓겨났다. 정치가 ‘대통령·총리 사냥터’로 바뀌니 당시 그 나라 꼴은 살펴볼 필요도 없겠다.   특검 역시 문제적 이슈다. 대통령·법무장관 등 행정부가 아니라 대법원 쪽에서 지명, 상원 인준을 받는 원래의 특검법은 미국에서도 시행 21년 만(1999년)에 폐기됐다. 공정을 넘어 무차별 먼지털이로 국가 분열만 가중시킨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4000만 달러를 쓴 클린턴 특검이 밝혀낸 건 르윈스키와의 밀회”뿐이란 여론이 결정적이었다. 미 변협의 강력한 폐지 권고에 미 의회 역시 “역기능이 더 크다”며 동의했다.   미국이 폐기한 그 해에 특검법을 좇아간 우리의 특검은 25년간 14차례. 21년 동안 18건이던 미국과의 나라 크기로 볼 때 잦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옷로비 특검이 밝힌 건 앙드레 김의 고향·본명이 구파발 김봉남인 것뿐”이란 조소로 시작, BBK 특검은 ‘맹탕 특검’의 대명사가 됐다. 수사 중 5명이 목숨을 끊은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역시 최근 무죄 판결들이 이어지며 “과도했던 정치 보복” 논란을 벗어나지 못한다. ‘드루킹 특검’ 정도가 성과의 기억일 뿐이다.   의문은 다수 민주당의 급발진 공세의 의도다. 대권이 남은 목표일 이재명 대표는 여전히 사법 리스크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운명 공동체인 주변에선 “대선은 빠를수록 좋다”는 충성 경쟁도 감지된다. ‘반독재 투쟁’ 말만 들으면 엔돌핀이 나오는 당내 86세대의 기억과 기질도 작동했을 터다. 젊은 시절의 ‘반전두환’처럼 주동(主動)의 공격·폭력성이 강할수록, 반동(反動)인 자신들도 그래야 이길 수 있다는 ‘중력의 법칙’이 DNA에 남은 그들이다. 그러니 ‘윤석열 검찰독재 타도’야말로 당내 잡음을 진압하고, ‘이재명 대권’의 단일대오를 유지해 줄 만병통치약이다. 특검과 탄핵. 그들의 최종병기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엔 그러나 심각한 착시(錯視)가 있다. ‘다음 대선에 윤석열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용산과 여의도에 잘해 보라며 권력을 나눠 준 게 국민이다. 그러나 특검·탄핵으로 치고받고 날 새워 나라를 수렁에 빠트리면, 그 책임 물을 남은 이는 ‘여의도 대통령’이라는 이재명뿐이다. 다음 대선의 새 경쟁 주자들은 닭이 울기 전, 안 그래도 비호감 1·2위인 윤석열·이재명 둘 다를 세번 부인하며 맹공할 것이다. 이재명의 적은 과연 윤석열일까, 국정의 난제들일까.   단순한 구호와 선악 이분의 ‘쉬운 투쟁’만으론 문제 해결이 턱도 없는 복잡계 시대다. 불평등 해소, 약자 보호 복지라는 진보 본연의 사명을 토대로 의정 성과와 수권 능력을 인정받는 게 ‘이재명의 미래’를 보장할 외길이다. 달콤한 ‘다수의 유혹’. 가장 경계해야 할 그의 치명적 독배는 바로 그것이다. 최훈 주필

    2024.05.27 00:38

  • [고현곤 칼럼] 대통령은 뒤로 빠진 이상한 연금개혁

    고현곤 편집인 윤석열 정부의 연금개혁은 F학점이다. 성과가 없고, 논의 과정에 허점이 많았다. 윤 대통령이 대선 때부터 연금개혁을 강조했지만, 말뿐이었다. 대통령은 물론 정부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연금개혁특위도 대통령 직속이 아닌 국회에 뒀다. 집권 초기 2년, 개혁의 골든타임이 지나갔다.   정부가 질질 끌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개혁안은 맹탕이었다. 가장 중요한 얼마를 내고(보험료율), 얼마를 받을지(소득대체율)가 빠졌다. 정부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뭐하다, 궁색한 얘기다. 총선 앞두고 표 잃을까 봐 개혁하는 시늉만 한 것 아닌가. 윤 대통령은 9일 기자회견에서 “(개혁안이) 6000쪽의 방대한 자료”라고 자랑했다. 원래 알맹이가 없으면 보고서가 길어지는 법이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4개 안을 나열해 놓고, 아무것도 안 했다. 지금까지 비판받는다. 윤석열 정부도 오십보백보다. 안 자체를 내놓지 않았다. 그러곤 국회에서 알아서 하라고 떠넘겼다.     ■  「 정부 일인데 질질 끌다 국회 떠넘겨 입장 모호하고 말뿐, 골든타임 놓쳐 ‘더 내고 덜 받는’ 정부안부터 만들어 정치 생명 걸고 대국민 설득 나서야 」    총선을 앞둔 국회에서 연금개혁은 관심 밖이었다. 국회 연금특위는 대충 뭉개다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에 맡겼다. 21대 국회 임기를 불과 4개월 앞둔 때였다. 정부 안이 없는 상태에서 공론화위가 복수 안을 만들었다. 1안은 보험료율 9→13%, 소득대체율 40→50%. 2안은 보험료율 12%, 소득대체율 40%. 둘 다 기금 고갈 시기를 2055년에서 겨우 6~7년 미루는 어설픈 안이었다. 개혁이라는 말을 붙이려면 고갈 시기를 적어도 한 세대(30년) 이상 늦춰야 한다.   공론화위는 1, 2안을 놓고 500명 시민대표단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56%가 ‘더 내고, 더 받는’ 1안을 찬성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더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전 국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잡다기한 사안을 인기투표하듯 여론조사로 결정한 건 잘못이다. 1안은 2093년까지 누적적자가 702조원 증가한다. 아이들에게 엄청난 빚을 떠넘기는 엉터리 안이다.   여야는 1안을 토대로 소득대체율 43%(국민의힘)와 45%(민주당)를 놓고 티격태격하다 입법이 무산됐다. 43%와 45%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중간인 44%로 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이게 적당히 흥정해서 정할 일인가. 공론화위 관계자는 “아무것도 안 하느니 이렇게라도 고치고, 추후 손보는 게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번 조정하면 언제 다시 고칠지 기약하기 어렵다.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 될 뻔했다.   국회만 탓할 일은 아니다. 정부는 뒷짐 진 채 입장이 모호하다. 공론위 1안에 대해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회색지대에서 관전평 하듯 국회 안을 비판했다. 총리나 장관은 보이지도 않는다. 의지가 없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한 처신이다. 의사 증원 문제도 그렇지만, 보건복지부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이제라도 연금개혁이 성공하려면 국회가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한다. 세상 어느 나라에도 정부 안 없는 연금개혁은 없다.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으로 현실의 벽을 깨지 않으면 필패다. 윤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부도 연금개혁을 방치했다”고 말했다. 사실관계가 틀린 데다 과거 정부를 비난할 입장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낮췄다. 집권 5년 내내 욕을 먹으면서 총대를 멨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무원연금개혁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당시 정부 담당자에게 매일 협박 전화가 걸려올 정도로 험악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연금 수령 시기를 62세에서 64세로 늦췄다. 극렬한 시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연금을 삭감하고, 수령 시기를 67세로 늦췄다. 유럽의 병자 그리스는 2022년 5.9% 성장하며 새롭게 태어났다. 2004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격렬한 몸싸움까지 하며 ‘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에 성공했다. 세 나라 지도자는 정치 생명을 걸고 진두지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윤 대통령은 “연금개혁을 22대 국회로 넘겨 좀 더 충실하게 논의하자. 정부도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여전히 일머리를 국회에 떠넘기고, 정부는 조연 역할에 머물겠다는 뉘앙스다. 적극 나설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연금개혁만큼은 내가 책임지고 해내겠다. 국회도 도와 달라.’ 정부가 주연이고, 국회는 조연이다. 이걸 호도하거나 헷갈리면 안 된다.   연금개혁은 ‘더 내고 덜 받는’ 게 정답이다. 고통스럽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덜 받으려면 소득대체율을 낮추거나 수령 시기를 늦춰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보험료율은 18.2%, 소득대체율은 42.3%다. 우리보다 두 배나 더 내고, 비슷하게 받는다. 더 늦기 전에 정부 주도로 객관적인 재정 계산을 통해 책임 있는 개혁안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을 설득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것 또한 정부의 몫이다. 아직 3년 남았고, 기회는 있다.     고현곤 편집인

    2024.05.21 00:40

  • [염재호 칼럼] AI 시대의 도래와 스승의 귀환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스승의 날을 맞아 스승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스승의 날이 되면 선생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고 노래하곤 했다. 스승은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을 넘어서 삶의 모범이 되고 학생들을 자식처럼 교육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은 영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영어지식보다, 감기로 책상에 엎드려 있던 나를 양호선생님께 데리고 가서 ‘우리 아들인데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해주신 것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고등학교는 새로 생긴 학교이기에 규율이 엄격했다.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을 가차 없이 퇴학시키거나 전학을 보내곤 했다. 그때 한 은사님은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교감 선생님께 그렇게 교육이 쉬우면 누군들 교육을 못 하겠느냐고 퇴학이나 전학을 반대하셨다고 한다. 대학원 시절 은사님은 전공교육 못지않게 아직도 닮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삶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인생에서 이런 스승들을 만난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고, 이분들이 없었으면 오늘의 내 모습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  「 교육현장서 스승이 사라진 시대 교육본질 상실한 입시위주 교육 지식교육은 인공지능에 맡기고 전인교육하는 스승이 돌아와야 」    스승이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걸핏하면 선생님을 고발하고  조롱하며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교사들은 학생 인권 보호 때문에 엄하게 학생들을 교육하기보다는 이를 회피한다. 교장은 학교나 자신의 안위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교사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이를 묵과하고 조용히 넘어가기를 원한다. 서이초등학교 사태를 통해 교사들이 얼마나 교육현장에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교육에서 지식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에 교사는 지식 전수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식 전수의 효율성에서는 사교육 현장의 강사들이 더 뛰어나다. 대학입시만 생각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사교육 시장을 더 신뢰하기에 일타 강사들이 수백억 원의 수입을 올리고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는 교육이 아니라 지식 전수의 효율적 제조업과 같은 것이다.   교사들 가운데 일부는 스스로 자신을 지식 전수 노동자로 자리매김하며 전교조 같은 노동자단체를 만들어 교사의 노동자권익만 주장한다. 슬기로운 지혜, 어진 인성, 건강한 몸을 키우는 지덕체(智德體)의 전인교육은 사라지고 대학입시를 위한 기능적 지식 전수의 효율성만 남았다. 그래서 공교육 현장에서 사라진 엄격한 훈육을 학부모들이 사교육 학원에다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일본의 명문 사학 게이오대학은 아직도 교명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이라고 한다. 의숙은 공익을 위해 의연금을 모아 세운 교육기관이라는 뜻도 있지만, 함께 먹고 자는 기숙이라는 의미도 있다. 근대화 시기 일본은 다양한 사숙(私塾)을 통해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살면서 교육을 했다. 심지어 스승의 사모님이 식사와 빨래까지 해주면서 제자들을 자식 못지않게 교육했다. 아직도 교수와 학생 간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강조하는 게이오대학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와 함께 교육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교육(education)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은 객관적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잠재 능력을 끌어내는(educe)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은 일방적 지식전수가 아니라 학생의 능력을 최대한 키워주는 것이다. 창의력, 소통능력, 협업능력, 공감 능력 등의 역량 강화가 지식 전수보다 중요하다. 이런 능력을 통해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미래를 개척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내년부터 초중고에서 영어, 수학, 컴퓨터 과목을 디지털 교과서로 가르친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학생 맞춤형 지식을 더 잘 가르치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 조지아공대에서는 IBM 왓슨이 개발한 질 왓슨이라는 인공지능 교육 조교를 컴퓨터 수업에 활용한다.   인공지능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 교사의 역할은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이제 지식 전달자로서 교사가 아니라 학생을 전인격으로 키워내는 스승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지식은 인공지능이 학생들에게 개인 맞춤형 상호작용으로 가르치고 교사는 이를 도와주는 코치나 촉진자의 역할을 담당하면 된다. 단순 지식은 인터넷 강의나 인공지능을 통해 배우고, 교실에서는 문제해결이나 토론과 같은 능동학습을 통해 생각의 근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사교육 시장의 효율적 지식 전수는 점점 한계에 도달하고 명문 대학 졸업장도 효용성이 희석될 것이다. 이제 지식은 다양한 곳에서 얻을 수 있고 대학 캠퍼스의 울타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수능 만점 의대생 사건은 충격적이다. 이는 교육의 참된 가치를 잊고 지식만을 절대시한 데서 빚어진 현상이다. 이제 교사는 전인 교육을 지향하며 제대로 된 인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스승으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 AI 시대를 맞아 그동안 공교육 현장에서 잊혀졌던 스승의 귀환이 간절하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5.15 00:36

  • [이하경 칼럼] 대통령은 율법과 정죄의 내전을 끝내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30여 년 전 잘나가는 검찰 간부가 내게 말했다. “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입니다. 손볼 사람은 어떻게든 손봤고, 봐줄 사람은 끝까지 봐줬어요.” 법을 흉기로 타락시켰다는 고백이었다.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현 대한석유협회 회장)이 그 증거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수재였고, 최고의 특수부 검사였다. 그러나 친정인 검찰의 표적수사로 네 번 구속됐고,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세계 유일의 기록이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수사했던 후배 검사들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풀려날 것”이라고 했지만 결과는 매번 달랐다. 검사는 “윗선의 압력 때문”이라고 실토했다. 퇴임한 ‘윗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냈다.     ■  「 이원석 명품백 수사…용산 긴장 권력자도 특검·수사 받는 게 정도 끝없는 수사 악순환…과보 성찰을 대결 벗어나 국민 위로·구제하길 」    이원석 검찰총장이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겠다고 한다. 용산 대통령실은 불만을 느낄 수 있다. 김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사건 수사를 지휘 중인 송경호 중앙지검장은 경질설에도 불구하고 김 여사 소환조사 의지가 확고하다. 제주지검장이었던 이원석은 윤 정부 들어서 단숨에 대검 차장으로 승진했고, 3개월 만에 총장으로 발탁됐다. 문재인 정부 윤석열 검사의 초고속 출세 경로와 판박이다. 이런 윤석열 정부의 검찰 황태자가 정권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총장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정권을 심판한 총선 민심은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자는 것이다. 검찰 선배들과 젊은 검사들도 “여기서 정권의 눈치를 보면 검찰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윤석열 총장이 조국 일가를 상대로 혹독한 수사를 벌이면서 문 정권과 일합을 겨룬 끝에 대통령이 된 경로가 이 총장에 의해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윤 정권에는 악몽 그 자체다.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키고 검사 출신을 수석과 비서관에 꽂았지만 이원석 검찰의 기세를 꺾기는 쉽지 않다. 이 총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해 구속시킨 경력도 있다. 그의 퇴임일은 9월 15일. 남은 4개월 동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전방위로 칼을 휘둘러온 윤 대통령의 과보(果報)다. 이런데도 특별감찰관 임명과 제2부속실 설치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사법 리스크에서 자유롭지 않다. 진행 중인 여러 재판 중 단 한 건에서라도 유죄가 나오면 대통령 피선거권이 제한된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바로 수감된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과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도 자녀 입시, 양평 특검에서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차기 유력주자들이 모두 ‘서든 데스(sudden death)’의 위험에 처해 있다. 적이 죽어야 내가 사는 지옥에서 협치와 타협은 꿈같은 얘기다.   100년간의 미국 소득배분 추세 그래프는 지금이 1930년대 대공황 시기와 비슷한 상태임을 알려주고 있다. 빈부격차가 최악이다. 민주주의가 추락하고 포퓰리즘이 극성이다. 전 세계가 너나없이 직면한 현실이다. 유럽과 중동에서 전쟁이 진행 중이고, 다음 차례는 대만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내부 통합, 양극화 해소, 성장동력 확충이 이뤄져야 하나가 돼서 나라를 지킬 수 있다.   만인에게 공평해야 할 법이 권력자의 도구, 악마의 흉기가 되면 안 된다. 이건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의미한다. 윤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 정적과 그 가족을 집요하게 압박했다. 이제 자기 차례가 되니 김 여사·채 상병 특검을 거부하고 권력의 방패로 성을 쌓고 있다. 이게 공정하게 보일까. 2500년 전 플라톤은 인류 최초로 ‘법의 지배’를 거론했다. “법률이 일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일 경우에, 이 사람들을 우리는 도당이라 말하지… 법이 휘둘리고 권위를 잃은 나라에는 파멸이 닥쳐와 있는 게 보이니까요.”(『법률』 플라톤) 윤 대통령은 자신과 배우자를 향한 수사와 특검도 열린 마음으로 검토해야 한다. ‘법에 의한 지배’를 초래한 책임을 성찰하고 내부 통합을 이루는 출발점이다. 그토록 장담한 대로 결백이 입증되면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있겠는가.   홍철호 정무수석은 “대통령은 국민들 눈물이 있는 곳에 계셔야 한다”고 건의했고 윤 대통령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천만다행이다.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고이면 그 렌즈를 통해서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했다. 비명을 지르는 국민의 고통은 누구도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지긋지긋한 대결에서 벗어나 지상에서 가장 힘든 이들에게 다가가 위로와 구제에 착수해야 한다. 천국에서 멀어지는 율법(律法)과 정죄(定罪)의 내전을 끝내는 길이다. 연민의 연대와 통합으로 향하는 순리이고, 대통령이 할 일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4.05.13 00:38

  • [최훈 칼럼] 슬픈 보수

    최훈 주필 “우리 당이 시키는 것 반대로만 했더니 당선되더라. ‘이·조 심판’ 꺼내지도 않았고 당이 내려보낸 현수막은 단 한 번도 안 걸었다.” 총선 뒤의 충격적인 이 토로는 국민의힘 험지인 서울 도봉갑에서 생환한 김재섭 당선인의 얘기다. 참 슬픈 보수 정치의 현주소다.   20세기까지는 “주로 보수 정당을 찍고 가끔은 진보 정당 찍는” 구도였다. ‘보수=반공·성장’의 선명한 논리가 우세였다. 그러나 북한의 쇠락, 냉전 해소에 보수의 무기로서 ‘반공’은 효용이 줄어 왔다. 불평등 해소에 진척이 없자 ‘성장’ 일변도 논리 역시 설 땅이 좁아졌다. ‘경쟁’과 ‘효율’, 그리고 ‘세계화’만을 외친 1990년대 신자유주의에의 반감도 한몫했다. 정치에 눈뜰 시기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차떼기’를 기억에 심은 40~50대는 민주당의 우군이 된 지 한참이다. 그 위로 전두환 시대 절망의 청년기를 보낸 86세대는 대거 60대로 진입하고 있다. 아래론 내 삶과 행복이 우선인 젊은이들의 개인·자유주의 확산이다. 남은 지원군은 영남·70대 이상의 사면초가다. “주로 진보 정당을 찍고 가끔은 보수 정당 찍는” 시대로 가는 건가.     ■  「 생명력·정체성 잃은 보수정당 위기 확고한 ‘보수주의’ 신념 재확립하고 보수전략 싱크탱크·아카데미 통해 젊은 층 미래의 보수 리더 육성해야 」    그런데 보수주의는 그리 늙고 잘못된 논리일까. 그 토대를 보자. “인간은 (기독교리 대로) 원죄를 지닌 불완전 존재다. 이성적이 아니니 완전한 평등 같은 추상적 유토피아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험·역사에서 도출돼 유효성을 인정받은 상식·지혜가 길잡이다. 1g의 경험이 1t 이상만큼 가치 있다. 사회를 실험실로 여기는 사회주의는 옳지 않다. 이상만의 세계는 ‘사실’에 의해 폭발된다. 체력·재주 등이 다르니 불평등은 자연스럽다. 인간의 최우선 동기는 자기 이익과 소유욕이다. 그러니 사유재산권과 사기업, 자기이익의 합리적 추구인 자본주의가 자연스럽다. 인간에겐 ‘자기 향상과 교환의 본능’이 있다는 애덤 스미스 대로 가장 자연스러운 제도는 자유시장이다. 사회는 부품만 바꿔 해체·조립할 기계가 아니다. 모든 게 얽힌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다. 이런 자연스러운 질서를 전복하자는 모든 시도는 무의미하다.” 평등 최우선인 진보와는 대비다.   여기까지라면 ‘꼰대’ 면하기가 쉽진 않겠다. 보수의 진정한 강점은 이후의 치열한 논박과 진화다. “사회가 유기체라면 보존을 위해서라도 변화와 개혁이 필수다. 어떤 생물체도 변화 없이 생존 없다. 혁명당하기보다 스스로의 변화가 더 낫다. 건강 잃은 사회적 약자를 방치하면 유기체 전체의 생명도 위태롭다. 그러니 약자들 보듬어 치유할 따뜻한 온정적 보수여야 한다. 뭘 버리고 뭘 지켜 계승할지 고민하라. 상대가 더 훌륭하면 베끼는 데도 주저말라. 이념에의 집착이 약한 건 보수의 강점이다. 유연하지만 조심스럽게 숙고하는 개혁, 그게 보수다.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나라는 사랑스러워져야 한다.”(박지향 『정당의 생명력』 등 참조)   총선 참패는 대통령의 독선이 주 요인이었다. 그러나 처절히 성찰해야 할 선거의 주체는 국민의힘이다. 보수에의 신념이 확고했다면 진보의 각종 포퓰리즘을 매섭게 추궁해야 했다. 다급하게 따라가기보다는 ‘규제 철폐’‘기업하기 좋은 자유’‘기득권 내려놓기’‘사회적 약자 배려’ 등을 보수의 기치로 대중을 파고 들어야 했다. ‘이·조 심판’이란 구호가 과연 대한민국 보수 대표의 무게인가. 뭘 노력해 온, 그래서 뭘 하겠다는 보수 정당인가. “권력자들의 인생 이모작 정당, 공천 때만 나타나는 떴다방”(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일 뿐이다. 정체성도, 생명력도, 영혼도 없으니 대통령도, 총선 사령탑도 보수·민주주의에 큰 고민 없었을 이들에게 내주며 방패막이로 연명할 처지다.   당의 차기 리더는 ‘보수주의의 전사’로 이 당을 재탄생시켜야 한다. 대통령에게만 의존해선 보수의 미래란 없다. 유승민·이준석 등 바른 말 내쳐 온 게 이 당의 습성이다. 대통령에게 기생해 자기 권력 지키며 인재 안 키우니 진정한 보수 전사의 씨가 말라 왔다. 구미 맞는 조사나 해 온 여의도연구원일랑 해체하고 보수의 전략 싱크탱크와 정치 아카데미를 만들라. ‘젊은 보수’들을 키워 당정에 발탁, 미래의 보수 리더를 키워라. 머리 굳은 관료·검찰·경찰 대신 창의성과 조정 능력, 기업가 정신 갖춘 이들로 보수의 주축을 확 바꿔야 한다. 외연 확장, 설득과 홍보 역시 보수의 병기여야 한다. 왜 모든 시민단체나 노동·환경·복지는 진보 편이라 지레 푸념만 하는가. 중원 건너 좌측으로 전진해야 할 보수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가 그 모델이다. 보수당은 대학을 갓 졸업한 캐머런을 당의 싱크탱크인 조사국에 영입, 재무·내무장관 보좌-예비내각 교육담당으로 줄곧 육성했다. 13년 동안 3전 전패 수렁의 보수당에 재집권을 안겨 준 건 캐머런이다. 그는 당수 취임 후 당의 로고를 연두색 나무로 바꿨다. 진보의 오랜 전유물이 그 ‘환경’이었다. 지금 국민의힘이 새겨야 할 말이 변화·개혁을 다짐한 그의 취임사다. “공감 받을,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보수로 나아가겠다.”     최훈 주필

    2024.05.06 00:36

  • [장훈 칼럼] 협치의 성공 조건 두 가지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취임으로부터 거의 2년이 걸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트루먼의 교훈을 깨닫는 데까지. 미국의 33대 대통령 트루먼은 한국전쟁에 미군 파병을 결정했던 냉전의 설계자로 유명하지만, 대통령 리더십에 대한 통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통령은 지시한다. 그리고 다시 또 지시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권위에 의존한 하향식 정책 결정으로는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트루먼은 꿰뚫어 보았다. 관료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대통령의 정책은 표류할 뿐이라고 본 트루먼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  「 2년 만에 본격적인 협치 첫 시도 협치에는 함정도 위험도 적잖아 협력 게임의 복잡성 받아 들이고 공통이해를 찾는 과정이 곧 협치 」    2년 만에 윤 대통령은 리더쉽 1.0에서 2.0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총선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경청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오늘(29일)은 취임 이후 처음으로 거대 야당 대표와 정책협의 회동을 갖는다. 그동안 언론과 전문가들이 숱하게 주문해 온 협치의 길이다.    협치의 길은 다수가 바라는 바른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정글을 헤쳐가듯 험난한 길이다. 뜻밖의 함정들도 있을 것이고(거대 야당 그리고 여당), 비를 피하기도 쉽지 않다(언론과 여론의 비판). 오직 대통령 혼자서 헤쳐가야 하는 거친 길이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협치의 성패는 결국 ①여당, 야당, 여론과 벌이는 복잡한 협력 게임의 운영과 ②대통령의 정치적 자원(지지율, 권위, 설득력)의 효과적인 운용에 달려 있다. 협치 성공의 두 가지 조건을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주요 당사자들의 협력 게임의 구조. 협치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만남은 외관처럼 1:1 협상의 단순한 구도는 아니다. 협상에 임하는 이 대표가 전적인 자율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당을 지탱하는 열렬 지지자들이 수용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윤 대통령과 타협을 주고받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민주당이 총선 때 맨 앞에 내세웠던 민생 지원금 25만원 전국민 지급에 타협의 여지는 얼마나 될까? 이 대표는 어려운 국가재정 형편을 고려해서 지원금 지급 대상을 대거 축소하거나 차등 지급하는 타협에 선뜻 합의할 수 있을까?   정치학자들이 흔히 양면 게임이라는 부르는 이차원 협상은 윤 대통령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쟁점 특검 등 다른 사안을 양보받는 대가로 25만원 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차등 없이 지원하는 데에 합의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은 지난 2년간 정부 재정의 엄격 집행을 강조해 왔고 선심성 현금 지급을 비판해 왔는데, 급격한 방향 전환에 나설 수 있을까? 방향을 선회한다면 어떤 논리로 핵심 지지층을 설득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마주한 양면 협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더 있다. 4월 총선에서 비례득표 24%를 얻은 조국혁신당의 존재는 과연 민주당이 여야 협상 과정에서 쓸 수 있는 레버리지일까 혹은 부담일까? 조국혁신당의 협력적 견제가 민주당의 협상 입지를 넓혀줄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다.   협치의 성패를 좌우하는 두 번째 요소는 대통령 권력자원의 속성과 운영이다. 마치 자연의 법칙과도 같이 대통령의 권력자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기만 한다. 권력자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지율, 남은 임기, 대통령 개인의 카리스마는 꾸준히 우하향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윤 대통령의 지지율, 여권 내의 카리스마, 남은 임기는 지난 2년간 꾸준히 하향세를 그려왔다. 지난 총선 결과 역시 이러한 하향세의 한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위축되는 권력자원을 갖고 협치에 나서는 윤 대통령의 입지는 계속 좁아지기만 하는가? 곤경을 헤쳐갈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대통령만이 가진 권력, 그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동안 윤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접근은 수직적이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대통령이 결정하면, 관료조직이 시행하고 친윤들이 행동한다. 그에 따라 부과되는 정책들로 민생을 살핀다는 것이 수직적 접근의 핵심이다. 하지만 난마처럼 얽힌 의-정 갈등, 대학입시 사교육 혁파 시도 등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수직적 권력 행사는 한국 사회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사회에서 대통령 권력은 쌍방향 교환을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지금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대통령으로서 갖는 각별한 지위를 기반으로 실제 일하는 이들과 정성껏 소통한다면 대통령의 정책목표와 이해 당사자들의 직업적 동기, 정치적 이익의 교집합을 꾸준히 찾아낼 수 있다. 대통령실 참모들, 관료들, 야당, 여당 의원들, 정책 당사자들에게 끊임없이 대통령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들의 직업적, 정치적 이해관계와의 공통분모를 찾는 과정 자체가 곧 민주사회에서 대통령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트루먼의 교훈에 다가갈 때, 윤 대통령도, 한국 정치도 무언가 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2024.04.29 00:38

  • [고현곤 칼럼] 그들만의 참호에 갇힌 윤석열 정부

    고현곤 편집인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경제부처 관료를 지낸 사람의 회고다. ‘우리 부처는 경기고-서울 법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었어요. 서울 법대 출신이 서울 상대를 우습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출근 첫날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더니 과장이 부르더군요. 출신 대학이 서울 상대일 텐데, ‘이응’ 받침을 빠뜨려 사대로 잘못 썼다는 겁니다. 사대가 맞다고 했더니 순간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왔느냐는 표정이었습니다. 평생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학벌을 유난히 따진 드림팀(?) 경제부처는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다.     ■  「 ‘학교공부 1등=세상 1등’은 큰 착각 지역 남녀 학교 다양해야 강한 조직 윤 대통령, 학벌·출신·인연 매달려 그걸 깨야 국정 운영도 바뀔 수 있어 」    학교 공부 1등이 모인다고 뭐든 잘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있으면 사고의 틀이 닮아간다. ‘우리가 최고’라는 집단 최면으로 현실에 안주한다. 학교 선후배로 얽혀 있어 ‘노’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느 조직이나 학교, 지역, 남녀, 세대를 골고루 품어야 강해진다. 다양한 의견이 나오면서 최적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특정 학교 출신이 몰려 있거나 지역색이 짙은 조직은 위기에 약하다. 기업 중에는 대우와 금호가 그랬다. 야구팀 1~9번을 홈런 타자로만 채우면 강팀이 될 수 없다. 대학도 타교 출신 교수를 많이 채용해야 학문의 폭이 깊어진다. 순종보다 잡종이 강한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재주를 타고난다. 공부는 시원찮아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겸손, 배려, 책임감, 추진력, 감성…. 이런 덕목이 시험 문제 몇 개 더 푸는 ‘공부 머리’보다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숨은 재능을 만개하는 사람도 많다. 대학 간판 하나로 섣부르게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정부처럼 여러 분야를 다루는 조직에선 말할 것도 없다.   윤석열 정부는 처음부터 서울 법대와 검사 출신 일색이었다. 다들 걱정했지만, 대통령은 눈치 안 보고 이들을 중용했다. 권력이 영원할 것 같은 기세였다. 공부 1등이면 세상에서도 1등이라고 여겼는지 잘 모르는 분야까지 이들로 채웠다. 눈치 빠른 기업도 검사 출신을 늘렸다. 정부에 고시 붙은 사람, 갑의 지위를 누린 사람, 상명하복에 익숙한 사람이 모였다. 여기에 대통령이나 김건희 여사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이 더해졌다. 사시 공부를 같이했거나 일하다 만났거나 동창, 고향 친구까지. 철저하게 대통령 부부 중심의 아주 좁은 인재풀이었다. 대통령은 “인사 기준은 전문성이고, 학벌은 안 따진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설령 그렇더라도 국민이 불편하게 여기면 조심해야 했다.   정부가 대놓고 학벌과 출신, 인연을 따지자 국민은 새삼 절감했다. 우리 아이는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사교육 열풍이 더 세졌다. 대통령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라고 지시했지만, 병 주고 약 준 셈이다. 학벌 우선 사회에서 뭐를 한들 사교육이 잡히겠나. 경쟁에 내몰릴 걸 생각하면 아이를 낳고 싶겠나.   똑똑한 사람이 모였다는 정부가 눈치 못 챈 게 있다. ‘그들만의 리그’를 지켜보면서 민심이 떠나고 있었다. 대통령 주변이 거대한 기득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기득권 타파를 꺼내 들면 ‘누가 누구를 탓하나’라는 반감이 들었다. 집권 초기부터 대통령 지지율이 30%대에 그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총선에서도 여당은 한동훈 비대위원장부터 출마자까지 검사 출신이 많았다. 그 와중에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의 사이가 틀어졌다. 온통 검사 출신만 보이는 게 못마땅하던 차에 다투기까지 하니 어처구니없었다. 총선은 처음부터 지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민심 이반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통령은 연초부터 민생토론회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대통령은 “국민만 바라본다”고 했다. 잘 짜인 연출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대파 875원 발언은 전후 맥락을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일이 커진 건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자신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김 여사 명품백은 사과 시기를 놓쳤다. 이태원 참사도 행정안전부 장관 같은 고위층 누군가가 책임져야 했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면 앙금이 남는다. 국민은 벼르고 있다가 총선에서 표로 갚아줬다. 회초리 맞을 걸 피하다 몽둥이로 맞은 셈이다.   대통령은 2년 전 취임사에서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지금 대통령 주변의 모습 아닌가. 학벌, 출신, 인연으로 쌓은 참호에서 끼리끼리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은 건 아닌가. 총선 참패 후에도 대통령은 별로 바뀐 게 없다. 다음 날 56자짜리 성의 없는 대독에 이어 1주일 후 ‘비공개 사과’로 실망을 키웠다.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였다. 지지율이 23%까지 추락한 지난 주말,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낙선자를 만나 쓴소리를 듣겠다고도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 흔쾌하게 하는 건지 아직은 긴가민가하다. 왠지 궁여지책 같다.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참호를 확실하게 깨고 나와야 한다.     고현곤 편집인

    2024.04.23 00:45

  • [이하경 칼럼] 윤석열 대통령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

    이하경 대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드디어 제1 야당인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만난다. 잘된 일이지만 황금 같은 지난 2년의 국정동력 손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총선 참패 엿새 만에 국무회의 모두발언 형식으로 나온 대국민 메시지도 실망스러웠다. 번역기로 돌린다면 본심은 “나의 국정 방향은 옳았고, 최선을 다했지만 국민들이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하다”였다. 네 시간 뒤 참모들이 전해 준 “죄송하다”는 표현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대통령은 총선 참패로 드러난 민심 이반에도 불구하고 정신 승리의 초현실적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 “경제적 포퓰리즘은 마약과 같은 것”이라며 야당을 거칠게 공격했다. ‘포퓰리즘 파이터’였던 윤희숙 의원조차 대통령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총선에서 낙선해 수도권 민심을 체험한 그는 “재정건전성을 어느정도 허물어서라도 한계에 몰린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지혜로운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누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가.     ■  「 비선 정리하고 쓴소리 경청을 김건희 여사 문제 무겁게 다뤄야 이재명 대표 국정 운영 동반자로 불완전함 인정하고 달라져야 」    항간에는 윤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탓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윤 정부의 국정 성과를 알리지 않고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자기 장사만 한 것이 총선 패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실상과는 차이가 있다. 김건희 여사 논란,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도피 출국, 대파 875원 논란은 모두 용산발 대형 악재였다. 용산의 내부 혼선도 끝이 없다. 대국민 메시지 작성 과정에서 비서실장·정무수석·홍보수석 등 공식 라인이 배제됐다. 박영선 총리, 양정철 비서실장 카드를 흘린 것도 비선 실세들이었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회의해 결정한 뒤 관저에만 다녀오면 전혀 다른 말씀을 한다. 관저 정치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니 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순실 국정 농단이 드러난 직후 지지율 25%보다도 낮은 23%로 추락한 것이다.   용산에서는 “직언하려면 직을 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사심없이 쓴소리를 한 원로나 친구는 연락이 끊어진다. 예스맨이 득세하고 용산 3적(賊), 6적, 8적 리스트가 떠돈다. 세종대왕 재위기에도 직언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오죽하면 세종이 “아직 과감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하는 자나 중론을 반대해 논란하는 자가 없다”고 탄식했을까. 윤 대통령은 비선을 정리하고 참모들의 쓴소리를 권장하고 경청해야 한다. 야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야당(opposition party)은 정당정치에서 반대의견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필수 장치다. 야당을 무시하면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얘기다.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사안은 무겁게 다뤄야 한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명품백 수수 사건을 둘러싸고 용산과 검찰 수뇌부는 갈등하고 있다. 국민 다수도 야권이 추진하는 김건희 특검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반대한다. 대통령 부인이라고 적당히 덮고 넘어간다면 입시비리로 ‘멸문지화’를 당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일가 수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헌법 11조 1항에 명시된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근대 문명국가의 대전제가 무너지게 된다.   윤 대통령은 마음을 비우고 몸을 낮춰야 한다. 정상회담의 화려한 의전과 환호에 가려졌던 서민의 고단한 일상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지는 지옥을 떠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연민이 발심(發心)할 것이다. 남루한 범부(凡夫)의 아픔을 당장 치유하지는 못하겠지만, 군중의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몸을 맡기는 예수의 심정으로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은 거대 신전(神殿)을 축조하면서 기둥을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만들었다. 안구의 망막이 곡면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태생적 시각의 왜곡까지 감안해 결과적으로 직선을 구현해 냈다. 데카르트는 세상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이런 지독한 분별의 힘으로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의 새벽을 알린 철학자·수학자·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 권력은 타인을 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일이다. 그래서 본질은 폭력이다. 대통령은 그 정점에 선 정치인이다. 막스 웨버가 말한 책임윤리를 다해 성공해야만 용서받는다. 그러기에 나의 불완전함을 메우기 위해 야당의 협조를 구하는 일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을 끝장낸 양대 강국이었다.  두 동맹국이 불과 5년 만에 중국까지 끌어들여 ‘미니 3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만든 사나운 지정학의 공간인 한반도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핵을 가진 호전적인 북한과 중국·러시아는 그때처럼 밀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서로를 향한 내부 총질을 중단하고 통합을 이뤄야 한다. 여소야대지만 야당을 파트너로 활용하면 수많은 문제가 풀릴 것이다. 비슷한 조건의 노태우 정부는 내치와 외교에 모두 성공했다. 정성을 다한 협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만들고, 윤 대통령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4.04.22 00:36

  • [염재호 칼럼] 법조인 정치와 국가 어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2대 총선의 주제는 비전이나 정책보다 상대를 정죄하기 위한 심판이었다. 총선의 주역은 모두 법조인들이었다. 대통령과 양당 대표 모두 법조인 출신이고, 조국혁신당 대표도 법대 교수 출신이다.   선거 결과 61명의 법조인이 당선되었다. 지난 21대 총선보다 15명이 늘어나 국회의석 20.3%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문성을 대표하는 비례대표가 아니라 지역구 의원만 55명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7명의 총리 가운데 5명이 법대 출신이다. 양김 시대 이후 대통령이 되겠다고 도전한 사람들 대다수가 법대 출신이고 최근 정권 문재인, 윤석열 대통령 모두 법조인 출신이다.     ■  「 과잉 대표된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 연역적 정답만 찾는 법조정치 우려 라이벌도 품는 포용의 리더십 절실 정쟁 멈추고 미래 어젠다 몰두해야 」    외국 의회의 경우를 보면 법조인 출신은 제한적이다. 영국은 2019년 총선에서 650명 의원 중 7.2%인 47명, 프랑스는 2022~27년 임기의 하원의원 577명 중 4.8%인 28명, 일본은 2021년 465명 중의원 중 3%인 14명에 불과하다. 미국도 2023년 하원의원 9.4%가 판검사 출신이라고 한다.   법조인은 다른 직업 출신보다 논리적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법안 입안과 심의과정에서 전문성을 보인다. 법조인은 형식논리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굴복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객관적 증거와 논리적 분석을 바탕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오래 받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영미법 전통과 달리 독일과 일본의 대륙법 전통을 갖고 있어 법체계가 연역적이다. 미국처럼 피고가 유죄를 인정하거나 검찰에게 유리한 증언을 통해 형을 낮추는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정해진 법 규정에 따라 연역적 추론으로 피고의 죄를 판단하고 구체적 형량으로 심판하기 때문이다. 영미법은 판례 중심의 귀납적 체계이기에 절대적 판단보다는 상대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에서 배심원제도가 발달한 이유도 판사의 절대적 판단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상대적 판단도 고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학부가 법대 행정학과라서 수업이 마치 수학에서 정답을 찾듯 연역적 추론 교육을 배우는 법학 중심이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는 정치학의 분과로 행정학을 공부해서 대안 탐색의 귀납적 방식을 익혀야 했다. 스탠퍼드 대학원 시절 은사였던 제임스 마치(James March) 교수는 정책 결정을 ‘정답 찾기’가 아니라 ‘통나무 굴리기(log rolling)’로 비유했다. 여러 명이 통나무를 굴려 움직일 때 모두 적절하게 힘을 배분하여 이동시켜야지, 한두 명이 조급하게 밀면 통나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조인 정치가들은 마치 형량을 정하듯 R&D 예산 30% 삭감, 의대 2000명 증원 등 모든 이슈에서 정답을 제시하곤 한다. 또는 자신의 잘못을 형식논리로 호도하여 남의 탓과 팬덤 현상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곤 한다. 좌우 모두 독선적 정치로 국민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이 국가 어젠다를 왜곡할 때 우리에게 닥친 국가적 위기는 심각하다. 인공지능 혁명의 혼돈 속에서 미·중 갈등을 위시한 국제질서의 재편, 북한 핵미사일 위협, 글로벌 밸류체인 변화, 수명연장과 저출생, 인공지능이 몰고 올 직업·노동·교육 등의 전방위적 사회 패러다임 변화는 지각변동 수준이 될 것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격랑이 보이지 않는지? 우리 모두가 힘들게 이뤄낸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성취를 더 발전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적폐 청산, 일제 잔재 청산, 좌파 카르텔 청산, 검찰 독재 심판 등 과거 시시비비만을 따지는 싸움만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지?   퓰리처상 작가인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 Goodwin)의 『권력의 조건』을 보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라이벌까지 끌어안은 링컨의 포용 리더십을 잘 그리고 있다.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링컨은 대선 경선과정에서 경쟁한 라이벌들을 국무장관, 재무장관, 법무장관에 임명했고, 야당인 민주당 출신 세 사람도 장관으로 임명했다. 막강한 경쟁자들도 처음에는 링컨을 경험도 없고 무식하다고 멸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존경심과 함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을 하게 되었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등 중대한 국가 어젠다를 풀기 위해서는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링컨의 뛰어난 정치 리더십이 돋보인다.   이제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은 미래의 국가 어젠다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더 이상 민변 출신들과 검찰 출신들처럼 법조인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복수의 대혈투극에 국민을 끌어들이지 말기 바란다.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는 정죄하고 심판하는 판단의 리더십보다 국가 미래 어젠다에 대해 상대를 설득하고 합의를 끌어내는 포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국가 미래 어젠다를 최우선 통치 과제로 삼아 정쟁 종식을 선언하고 함께 지혜를 모으는 포용의 리더십을 펼치길 기대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4.17 00:36

  • [최훈 칼럼] 분노와 심판은 또 다른 기대다

    최훈 주필 투표에 나선 2966만2313명만큼의 각기 다른 심경과 판단이 있었을 터다. 그 시점 거기 존재했던 정치의 객관적 실체야 물론 하나다. 그러나 각자의 렌즈로 판단한 다수 민심은 정권 심판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는 소선거구제, 3번부터 시작한 왜곡된 위성정당 제도를 탓할 것도 없다. 선수들 스스로 합의한 룰이었으니. 각각 몇십 초의 날인들이 모여 심판으로 분출되기까지 2년여 기억의 축적이 있었다.   윤석열 정권의 탄생은 문재인 정부의 진영 편가르기에 대한 실망에서였다. ‘공정’ ‘정의’ ‘균형’ ‘통합’ ‘소통’ ‘협치’의 가치를 이뤄내 주길 고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서서히 의문에서 실망을 거쳐 좌절로 이어져 왔다. ‘아빠 찬스’ 의혹의 보건복지장관 강행, 특수부 검사 중심의 편향 인사 논란부터였다. 야당과의 대화 기피, 말 잘 듣는 여당 만들기는 포용과 민주적 리더십에 의문을 낳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수사와 디올백 사건의 처리는 ‘공정’ ‘정의’의 기대를 사그러들게 했다. 으뜸의 오류는 국민 소통의 단절이다. 질문 외면과 일방 소통은 국민과 대통령 중 누가 나라의 주인인지 좌절을 안겨 주고 말았다. 다수 지지를 받는 의대 증원 역시 진정한 대화와 설득의 이슈 관리 부족에 “독선”의 역풍에 직면해 있다.     ■  「 2년여 용산의 불통·독선적 태도에 누적돼온 실망·좌절·무력감이 분출   상대의 변화를 지켜보는 게 분노 용산·여야 모두 협치로 응답하길  」    세 차례쯤의 기회야 세상 모두에게 주어진다.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가 첫 번째였다. 그러나 “구청장 선거 하나 갖고 무슨 심판이냐”며 혁신의 시간을 허송했다. 이재명 민주당의 친명 공천 후유증 속 대통령 지지도가 39%(한국갤럽)를 찍었던 3월 초중반은 두 번째 찬스였다. 3월 6일에 이종섭 호주대사 논란, 14일엔 황상무 수석의 ‘횟칼 테러’ 발언이 돌출했다. 그 시점 의대 증원 문제를 유연하게 풀어낼 결단과 함께, 신속히 이 대사·황 수석 문제를 수습해 민심을 다독여야 했다. 총선 아흐레 전. 의대 증원 대국민 담화는 화난 민심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해결의 물꼬를 기대했다가 51분의 인내심 실험을 당한 허탈함에 선거는 거기까지였다. “역시 그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좌절·분노가 굳어졌다. 2년여 굳어져 온 용산의 자기 집착, 편향의 관성이었다.   대통령실의 한계가 노출된 건 오래다. 총선을 치른 시점의 실장·수석급 이상 중 자신이 선거를 치러 본 이란 한 명도 없었다. 늘 고시 출신 관료·검사들 이 주인이었다. 시험 권력으로 삶을 시작, 윗 분 기호에 맞을 페이퍼 워크로 살아온 이들이 다수다. 가장 수직적인 검찰 문화에서 지내 온 보스 밑에 역시 톱 다운 마인드 관료들의 조합이다. 현장을 느낄 수도, 그럴 필요도, 느껴 달라는 기대도 힘든 구조다. 내각·비서실 어느 곳에도 민심을 수렴하며 정치를 조율해 갈 지혜로운 스핀 닥터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판단은 늘 우월하다”는 엘리트·특권 편향과 집착이 거리의 정서·상식과 동떨어지니 예측조차 안 되는 판단들이 이어져 왔다. 159명 희생된 이태원의 충격에도 “법조문상 귀책이 없지 않느냐”며 정무적 책임이 사라진 게 용산의 문화였다.   분노는 상대에의 기대와 요구가 꺾일 때 생긴다. 실망, 억울함, 좌절과 상실, 우울, 두려움이 얽힌다. 그 복잡한 감정들이 병목 현상에 이른 마지막 단계는 무력감이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주저앉을 가장 위험한 상태다. 그러면서 “너도 한번 나의 무력감을 느껴보라”는 심리가 발동한다. 모든 도덕과 정의의 황금률은 “그러므로 남이 너에게 대접해 주길 원하는 대로 너도 남에게 그렇게 대접하라”는 ‘호혜’와 ‘상호 존중’ 아닌가. 투표만이 무력감 속에 분노를 분출할 유일한 출구였다. “권력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란 걸 똑똑히 보여주자는 게 바로 이번 총선의 정신이다.   분노와 심판은 또 다른 기대다. 공동체의 생존에 필연적인 정서와 욕구다. “더 이상 그리 가면 모두 위태로운 파국”이라는 경고다. “인간에 두려움과 분노가 없었다면 벌써 멸종했을 것”이듯, 오히려 인간 관계나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있을 전기다. 분노 안엔 그러니 상대에의 관심과 사랑도 존재한다. 어느 쪽에도 투표 안 한 유권자 3분의 1(1400만 명)이 그들 여야엔 훨씬 두려운 무관심이다. 반드시 분노와 심판에 뒤따라오는 특성이 있다. “당신이 내 뜻을 주목해 달라” “나는 너를 계속 지켜볼 거야”다. 상대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려는 본능이다.   총선의 총 득표 차이는 5.4%(민주 50.5%, 국민의힘 45.1%)뿐이다. 투표율 67%이니 어느 쪽도 유권자 과반엔 턱없는 지지다. 대통령실과 여야 모두 “왜 내게 분노했을까”를 곱씹으며 영혼이 달라져야 할 이유다. 무엇보다 나라가 힘들지 않은가. 민생·경제, 미 대선, 어제 이란까지 가세한 전쟁 등의 국제 정세, 북한 등 어느 하나 편안치가 않다. 국정 기조 쇄신은 윤석열 정부엔 마지막으로 주어질 세 번째 기회다. 그만들 싸우고 협력해 국민 좀 편안하게 해달라는 게 심판의 기대다. 그대들의 권력이란 덧없이 짧다. 영원한 분노와 심판의 힘 지닌 전지전능은 단 하나, 국민뿐이다.     최훈 주필

    2024.04.15 00:38

  • [이하경 칼럼] 옳은 개혁도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이하경 대기자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사법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인 박세일 청와대 정책수석이 주도했다. 세계 최저 수준인 국민 1인당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로스쿨을 도입한다는 소문이 났다. 대법원이 협상을 제안했고, 사법개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법원·검찰·변호사 대표와 청와대 인사들이 참여했다.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머리를 맡대고 숙의했다. 연간 300명인 변호사 배출 숫자를 96년 500명, 97년 600명 등 단계적으로 늘려 2000년 이후에는 1000~2000명으로 확대하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합의는 지켜졌고,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로스쿨이 문을 열었다. 매년 1700여 명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다.     ■  「 의대 증원 맞지만 2000명은 무리 세종·영조도 경청…현실 반영해 이승만·박정희 통합 토대로 추진 김영삼 사법개혁도 단계적 접근 」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윤석열 정부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압도적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집단 파업 중이고,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면서 청와대와 소통했던 원로 법조인의 의견을 들었다. “이렇게 선전포고식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의료계와 충분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2035년에 1만 명의 의사가 부족하지만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이 5년간 매년 2000명 증원 카드를 던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전문가도 2000명 카드를 제시한 적이 없다. 정부안의 근거가 됐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3개 기관의 당사자들은 연간 750명에서 1000명 정도를 늘리면서 연착륙시키자고 한다. 의료개혁이 처음에는 지지율을 확 끌어올렸지만 지금은 총선 감점 요인이 돼버렸다.   의사 정원을 늘리는 의료개혁은 백번·천번 옳은 정책이다. 의사가 환자를 떠나고, 정원을 줄이자는 건 상식이하다. 그러나 개혁은 나의 방향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한국의 의사집단은 전투력이 강하지 않은가.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의약분업 과정에서 의대 정원을 351명 줄였고, 2020년 문재인 정부 때는 의사국가고시를 거부하면서 400명 증원 카드를 무산시켰다. 법률가들이 포진한 윤 정부는 “법대로 하자”고 나온다. 그러나 미국의 법 사상가 홈스 전 연방 대법관은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했다. 세심한 소통과 공감의 과정이 필요했다. 윤 정부는 경직됐고, 서둘렀다.   조선의 성공한 전제군주들도 이렇게 거칠지는 않았다. 1428년 세제개혁에 착수한 세종은 전답 1결당 10말을 정액 징수하는 균등부과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백성 17만 명의 의견을 물었다. 땅이 기름지고 소출이 많은 경상·전라도 농민은 압도적으로 찬성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 세종은 시행을 유보했다. 격렬한 찬반 토론과 시범 실시를 거쳐 전면 실시된 것은 성종 때인 1489년이었다. 개혁 착수 61년 만이었다.   17세기에 소빙하기가 전 세계를 강타해 유럽에서는 대역병과 마녀사냥이 극성을 부렸다. 중국 대기근은 농민 반란을 촉발해 명청 교체가 이뤄졌다. 조선에서는 경신(庚辛)대기근이 닥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시체가 거리를 메웠다. 민생이 초토화된 뒤 등장한 군주가 영조다.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나 사가(私家)에서 청년기를 보낸 영조는 서민의 참상을 알았다.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젖먹이에게 물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에 시달리던 백성을 위해 군역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균역법을 시행했다. 창경궁 홍화문에서 백성들의 애소(哀訴)를 들었기에 가능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세제 개혁으로 조선은 임란(壬亂), 호란(胡亂)과 대기근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도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과감하게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하고, 대지주인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의 자기희생적 협조를 얻었기에 성공했다. 내부 통합에서 출발해 전 국민을 지주로 만든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민주화 조치였다. 한국전쟁 때 적화되지 않고 훗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훗날 비판자가 되는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 지식인 그룹의 경제개혁 제안에 주목했다. 계획경제, 공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론, 기간산업 집중 육성, 미국 이외 국가로의 원조 다각화, 저축 강행과 소비절약, 수출 확대는 군정의 정책에 모두 반영됐다. 사상계는 교착된 한·일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새 정부가 직면할 현실을 측면에서 도와줬다. 함석헌은 5·16을 “신속히 이뤄져야 할 복부 수술”이라고 했다(『만주 모던』 한석정).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국민의힘 수도권 후보들의 제안대로 의대 정원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의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 결과와 무관하게 예스맨들을 모두 내보내고 “노”라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로 새 진용을 짜야 한다. 아무리 미워도 야당과 대화하고 통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은 임기 3년 동안 옳으면서도 성공한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     이하경 대기자

    2024.04.01 01:03

  • [고현곤 칼럼] 의정 충돌에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

    고현곤 편집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나흘 만인 6월 28일, 병원 앞까지 닥쳤다. 의료진은 부상자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치료를 계속했다. 얼마 안 가 북한군이 국군 저지선을 뚫고 병원에 난입했다. 부상자와 의료진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의료진은 끌려갔다. 공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6·25 서울대 의대 학살사건이다. 추모비가 서울대병원에 있다.     ■  「 응급실 비운 의사 비난받아 마땅 디테일 없이 우격다짐, 정부도 문제 이념보다 뿌리 깊은 계층갈등 노출     애꿎은 국민만 각자도생 내몰려 」    이유야 어떻든 이번 의정 충돌에서 전공의가 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을 떠난 건 유감이다.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곳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환자를 등지는 모진 행태에 국민은 놀라고 실망했다. 환자를 내 가족이라고 여겼으면 그랬겠나. 중증·응급환자만이라도 번갈아 지켰으면 더 많은 응원을 받았을 텐데 아쉽다. 환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난주 방재승 전국 의대교수 비대위원장이 “국민 없이는 의사도 없다는 걸 잊었다”고 말했다. 사과가 너무 늦었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국민과 의사 사이에 쌓인 상처와 불신은 오래 남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의 발언은 도를 넘었다. 환자 곁에 남은 전공의를 조롱했다. “평생 박제해야 한다”는 식의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의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말했다. 우월감과 특권의식이 묻어나는 부적절한 발언이다. ‘겸손한 자가 강한 자’라는 진리를 모르는 모양이다. “이런 나라에 살기 싫어 용접을 배우고 있다” “포도 농사를 짓겠다” 같은 말이 쏟아졌다. 의사가 용접이나 포도 농사를 못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은 아니다. 당장 대한용접협회는 “의사들이 용접을 우습게 생각하는 듯하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의 치부인 계층·빈부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념·지역·세대 갈등보다 뿌리 깊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더 심해졌다. 요새 사석에서 균형감을 잃고 과하게 의사 편을 드는 사람이 눈에 띈다.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전공의가 혹사당한다. 차라리 잘됐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1년쯤 놀면 어떻냐”고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 의아했다. 환자 걱정은 관심 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 딸이 레지던트 2년 차였다.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온 나라가 이기심의 수렁에 빠졌다.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부의 일 처리는 서툴고 거칠다. 전략도, 홍보도 부족하다. 의대 증원은 오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다. 어떻게 풀지 정부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2000명 증원의 근거가 무엇인지, 실제로 현장에서 몇 명이나 더 가르칠 여력이 있는지, 뒤죽박죽 의료 수가는 어떻게 개선할지, 격무인 전공의의 노동인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정부가 디테일을 건너뛰고 덜컥 2000명 증원을 강행하는 바람에 반발이 커졌다. 너무 만만하게 봤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였거나. 4대 필수의료 패키지는 증원 발표 불과 닷새 전에 나왔다. 좀 더 일찍 마련해 시간을 갖고 의료계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다급해진 정부가 이달에 전공의 처우개선 토론회를 잇따라 열었다. 그동안 뭐하다 이제 와서?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증원 규모도 복수 안을 놓고 그 흔한 공청회라도 열었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쉬쉬하다 군사 작전하듯 전격 발표했다. 단숨에 대학별 배정까지 마친 건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나라를 뒤집어 놓을 일인가. 처음에 정부는 지지율 상승에 내심 고무됐던 것 같다. 생각이 짧다. 환자가 불편해지면 정부가 욕을 먹게 돼 있다. 지지율이 꺾이고 사태가 심상치 않자 부랴부랴 유화 제스처를 보냈다. 정부의 실력이 딱 이 정도 아닌가 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노동·교육·연금 3대 구조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신년사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2022년 대선 공약이었다. 정권 전반부, 개혁의 골든타임이 다 가도록 손도 못 댔다. 지난해 뜬금없이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며 전선을 넓혔고, 국운이 걸린 듯 엑스포에 매달렸다. 잇따른 구설을 수습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의사 증원 하나 매끄럽게 못 풀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3대 개혁은 언감생심이다. 총선이 끝나면 새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이합집산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정권의 힘은 갈수록 떨어진다. 국정관리 능력이 부족하고, 힘마저 빠진다면 무슨 수로 3대 개혁을 할 수 있겠나.   이번 사태는 의사도 잘못했고, 정부도 잘못했다. 양비론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국민을 불안하게 한 것만으로도 양측 모두 할 말이 없게 됐다. 사과부터 해야 한다. 의정 충돌을 중재할 만한존경받는 어른도, 정치인도 안 보인다. 섣불리 나섰다가 망신만 당할 분위기다. 그러는 사이 국민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각자도생의 정글로 내몰렸다. 의지할 곳이 없다. 나라가 어수선하다. 고현곤 편집인

    2024.03.26 00:41

  • [최훈 칼럼] ‘용산 리스크’의 재구성

    최훈 주필 모든 정치의 정답은 꿈틀거리는 민심의 현장이다. 이종섭 호주 대사 거취 논란이나 황상무 수석의 ‘횟칼 테러’ 발언 여파로 총선은 다시 출렁거리고 있다. 황 수석 사퇴와 이 대사 귀국으로 임시 봉합한 국면이지만 싸늘한 여론과 수도권 지지도 폭락에 놀라 수용한 터라 효과조차 미미한 듯하다. 여당은 애써 잠재웠던 ‘윤석열-한동훈’ 갈등이 되살아나면서 총선이 다시 ‘윤석열 대 야당’의 정권 심판 구도로 바뀌는 악재에 초긴장이다.     ■  「 민심 둔감 이종섭·황상무 사태로 오만 프레임 갇히고 만 대통령실 ‘엘리트’ 내부논리 과잉편향 접고 현장 민심 존중하는 공감 노력을 」    수도권(서울 3, 경기 2)에서 영끌하며 뛰고 있는 국민의힘 후보 5인에게 ‘용산 리스크’가 낳은 현장을 들어보았다. “다녀보면 ‘매일 친명횡재다 뭐다 이재명 욕은 다 하면서 자기들은 왜 이리 마음대로 하나’란 얘기다. ‘어린 해병이 죽었는데 책임은커녕 대사로 내보내 놓고 도대체 국민 알기를 뭘로 아느냐’란다. ‘지금도 이리하는데 국회까지 쥐여주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겠느냐’고 한다. 용산이 오만의 프레임에 갇혔다. 3%, 1천 표 차 생사라 끼니 거르고 돌아다니는 데 한 주 새 수도권 지지 15%가 빠지니 맥만 빠질 뿐이다.”(경기 A후보)   “보수층의 용산 원망이 더 많더라. ‘4년 동안 야당에 발목 잡혀 생고생을 했는데 다시 지려고 작정했느냐’며 화를 낸다. ‘왜 하필 이때 굳이 이거냐’란 절박감의 분노다. 정치 관심이 많을수록 이종섭 대사에 부정적이더라. ‘피의자인 양반을 갑자기 대사로 내보내니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침묵하라 꼬리 자른 것 아니냐’고들 한다. ‘아 이게 뭔가 있구나’라는 의심이 퍼지는 건 순간이다. 공수처 문제점 얘기해 봤자 먹고살기 바쁜 이들이야 임명한 대통령실 잘못이라 생각할 수밖엔 없지 않냐. 살판난 민주당의 빅 마우스에 막기조차 버겁다.”(서울 B후보)   “가장 걱정은 이재명 사천 파동에 가라앉던 정권심판론이 되살아난 분위기다. 민주당이 다시 으쌰으쌰다. 정권심판론 도지니 여기저기 민주당과 진보당이 후보 단일화를 한다. 선거가 기세, 바람 아닌가. 용산이 매사 독선적으로만 각인되니 과거 조국 수사도 무리 아니냐는 의심으로 뒤바뀐다. 조국당 지지율 좀 보라. 비례 조국당 찍으러 집 나선 이들이 지역구의 여당 찍을 리도 없지 않냐”(서울 C후보)   “중도층은 윤석열-한동훈 갈등에 민감하더라. 남의 말 잘 안 듣는다는 윤 대통령에게, 한 위원장이 바른말 좀 하고, 그걸 대통령이 들어주는 모양새면 ‘아 이 당은 그래도 기대는 해볼 만하네’라는 이들이 중도층이다. 중도층이 가름할 총선 보름 앞에 이 모양이니…. 며칠 전 대통령이 농협의 ‘875원 대파 한 단’ 들고 “이 가격이 합리적”이라 한 것도 말이 많더라. 왜 자꾸 시빗거리 만드는 건지. 그냥 좀 가만히 계셔줬으면 ….”(경기 D후보) “이거 의료 대란 기류도 묘해진다. 자꾸 불통 용산 이미지이다 보니 2000명 증원도 일방적 밀어붙이기 아니냐는 심리적 요동이 느껴진다. 어제 한 위원장이 의사들 만났다지만 환자들만 피해인 대란이 이어지면 다 나라님 탓일까 봐 걱정이다.”(서울 E후보)   총선의 승패 떠나 3년 넘게 국정을 더 이끌어 가야 할 용산이다. 수도권의 아우성 직전 이종섭 사태에의 대통령실 입장은 이랬다. “공수처·민주당, 일부 친야 언론이 결탁해 덫 놓은 정치 공작.” 황상무 파문 때는 “사람 그렇게 쓰는 것 아니고, 리더십 원칙이 더 중요” “언론 자유가 우리 정부 국정 철학일 뿐”이라며 6일을 끌었다. 내부의 지체된 판단은 결국 현장에 최악의 나비효과를 몰고 왔다. 바로 용산의 민심 공감(共感)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고, 그들의 느낌·시각을 이해하며, 그렇게 이해한 통찰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 상태다. 용산의 최대 오류는 바로 자기 내부 논리에 대한 선택적 과잉 공감이다. “공감이란 마일리지 같은 것”(과학철학자 장대익)이어서 자신에게만 쓰면 다른 이들에겐 쓸 수가 없다. 내 편에만 쓰면 다른 편에겐 해악이 될 위험이 공감의 양면성이다.   그러니 용산의 내부 소통이 늘 의문이다. 윤 대통령의 격노가 다반사라더라도, 먼저 현장을 느끼며 “노”하는 참모들이 버텨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엘리트 집단이라 자부할 용산의 국가적 책무다. 도대체 안보실의 누가 이 대사를 밀어붙였나. 누가 황 수석 사퇴를 그리 끌어갔는가. “성공에는 100명의 부모가 있지만 실패는 고아”이듯 일 터지면 그 뒤로 숨기 바빠 대통령만 홀로 전면에 서 있는 게 용산의 기억이다.   최고의 비서실장이던 레이건 대통령의 제임스 베이커는 “나쁜 결과를 막을 사전 노력이 핵심이며, 이를 위해 비서실장은 늘 ‘노 맨(No Man)’이자 게이트 키퍼여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중한 통찰을 그는 레이건 장례식 추모사에 남겼다. “그 누가 자신의 라이벌 선거참모를 두 차례나 했던 이를 자기 비서실장에 임명하겠는가. 늘 너그러이 (‘노 맨’을) 받아주던 그를 위해 나는 8년 매일매일을 노력할 수 있었다.” 맞다. 먼저 대통령이 달라지길 바란다.     최훈 주필

    2024.03.25 00:50

  • [염재호 칼럼] 누가 유권자인가?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2대 국회의원선거의 사전투표까지 20여 일도 채 남지 않았다. 다음 주말부터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지하철역마다 허리를 굽혀 표를 구걸하는 후보들의 모습을 열흘 정도는 지켜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을 유권자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정치에서 진정 무슨 권한을 가진 것일까?   유권자인 국민은 총선이 끝나면 국회의 이전투구를 바라보며 맥없이 정치혐오에 빠지게 된다. 역대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받는 21대 국회보다 22대 국회가 더 나을 것 같지도 않다. 양대 정당은 시스템 공천이라고 하지만, 국가를 위해 봉사할 유능한 인물들을 유권자인 국민에게 공천한 것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위성정당제로 어처구니없이 탈바꿈해 유권자를 농락하는 비상식적 제도로 전락했다.     ■  「 입법권 남용과 과잉특권 빈축 국회 정당 후보 공천 시스템도 비합리적 국회의원 소명의식과 정치력 절실 AI 활용한 후보 검증 시스템 갖춰야 」    국회의원 후보들은 본 선거보다 정당 공천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후보 개인의 능력이나 비전보다 정당 중심 투표 경향 때문이다. 하지만 공천과정에서 국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여론조사는 왜곡되기 쉽고 극렬 지지당원들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형식은 시스템 공천이지만, 실질은 당 대표나 지도부의 뜻에 좌우되어 사천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민주화 이후 국정운영에서 국회의 영향력은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정부의 입법발의는 1102건, 의원발의는 5728건이던 것이 점점 늘어나 21대 국회에서 정부발의는 831건으로 축소되고 의원발의는 2만3584건으로 증가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국정을 책임지는 헌법기관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신들만이 선출된 권력이라고 행정부 공무원들을 폄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예산심의 과정에서 쪽지예산으로 지역구 챙기기에 급급하고, 예산안이 통과되면 플래카드를 내걸고 자신이 따온 지역구 예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지역의원인지 국정을 담당한 국회의원인지 모를 정도다.   국회의원은 임기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장기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는 국회의원 특권을 없애야 바른 정치가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180여 개나 되고 연봉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1억5500만원인데, 우리나라 정치인 신뢰도는 167개국 중 114위라고 한다. 우리 국회의원 보좌관은 6명인 반면에 스웨덴은 보좌관 한 명을 국회의원 두 명이 공유하고, 출퇴근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봉급은 국민 전체 근로자 평균임금만 받는다고 한다.   막스 베버가 강의를 책으로 엮은 『직업으로서 정치』는 정치가의 역할을 잘 알려주는 불후의 명작이다. 영어에서 직업(vocation)은 하늘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이나 사명감을 뜻한다. 단순히 일의 대가로 보수를 받는 직업의 의미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막스 베버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책으로 펴낼 때 직업 대신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제목을 정했다.   베버는 정치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자질이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라고 했다. 단지 열정만으로는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고 냉철한 균형적 판단이 중요하다. 정치가가 냉철한 균형적 판단을 갖기 위해서는 ‘신념의 윤리’보다 ‘책임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도덕적 근본주의와 같은 신념의 윤리만 갖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미래의 문제를 설득과 합의를 통해 풀어나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소명감으로 일해야 한다. 정치를 월급 받고 특권 누리는 직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금품을 받거나 공천을 얻기 위해 아첨, 거짓말, 막말을 일삼지 않아야 한다. 자신에게 불리해도 바른말을 하고 국가의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도 과거 발언 문제나 금품수수 증거로 공천이 취소되는 사례가 나왔다. 이제 인공지능(AI)의 도입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질을 철저하게 평가하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 방식을 활용하여 과거 모든 언행을 낱낱이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회, 정당학회, 정책학회 등 전문가 단체들이 나서서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철저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게 해주어야 한다.   유권자는 후보의 정치적 식견과 품격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질 권리가 있다. AI 시대를 맞아 이제부터는 막말과 거짓 선동, 국회 질의 내용과 수준,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대안 제시, 지역구를 넘어선 국정 관련 활동, 정치적 설득과 통합 능력, 품격 있는 언행 등을 전문가 집단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서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권자가 선거에서 후보와 정당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3.19 00:42

  • [장훈 칼럼] 차라리 AI 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

    장훈 중앙대 명예교수·본사 칼럼니스트 비관적 반응들이 먼저 제기될 수 있다. 인공지능(AI)은 언젠가 인간 자율성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AI가 정치에 도입되면, 민주정치보다는 감시와 통제에 쓰이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갑갑한 정치 현실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헛헛한 공상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4월 총선을 앞두고 AI 정치인의 가능성을 논해보려는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첫째, 선거철 한국의 정당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추락하고 있다. 권력 다툼을 위해서라면 온갖 반칙, 위법, 떼법을 총동원하는 아수라장이 매일 매일 펼쳐지고 있다. 무언가 파괴적 혁신 없이는 정치의 타락은 스스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둘째, 챗GPT4, 소라, 코파일럿 등이 보여주듯 AI의 발전은 근대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삶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일자리, 돌봄, 여가, 전쟁 등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오는 중이다.     ■  「 선거철 정당의 타락이 도를 넘어 기성 정치에 파괴적 혁신이 필요 무감정 AI로 분노의 정치를 제어 AI로 반헌법과 반칙 걸러냈으면 」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의 선거-정당정치가 18~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등장한 근대적 개인들의 건축물이라는 점을 돌아본다면, AI 혁명이 불러오는 인간 존재의 재설정은 결국 선거-정당정치의 본질적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 18세기 부르주아들이 열었던 ‘그들만의 민주주의’가 200여 년 만에 ‘모든 사람의 민주주의’로 진화했듯이, AI 혁명이 민주주의를 상상 너머의 세계로 끌어올릴 가능성도 꿈꾸어 볼 만하다.   #1. 이미 숱하게 지적되었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우리 정당들의 자멸적 행태부터 간단히 돌아보자.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필자는 우리 정당정치의 타락을 주도하는 것은 정당을 장악한 포퓰리스트들과 이들을 열성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 훌리건들이라고 본다.   포퓰리스트들은 여러 얼굴을 갖고 있지만, 공통적인 특성은 민주정치의 제도와 절차, 법치를 한없이 가볍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2024년 총선 지역구 획정의 법정 기한은 2023년 3월이었다. 다수당인 민주당은 2024년에 들어서야 마침내 준연동형 선거구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여야 정당들은 그제야 지역구 획정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누더기가 된 공천 과정, 여야 정당들의 위성정당 급조, 선거 이후 이들의 예정된 원대복귀 등은 제도와 절차가 이미 파산 지경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추락을 멈출 주도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파당적 훌리건으로 빠져들거나 무심한 방관자, 냉담자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결국 관습적 사고를 넘어서는 혁신, 파괴적 혁신만이 추락을 멈출 수 있다.   #2. 산업혁명에 먼저 성공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외양을 갖추기 시작하던 18세기 영국인들에게 보통선거권은 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AI 정치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권자와 의사소통, 정책 결정 과정 등에 데이터 처리와 연산 결과를 활용하는 AI와 인간 정치인이 결합한 AI-휴먼 정치인의 등장은 신기루처럼 들릴 수 있다.   허황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혁신 국가들은 이미 AI 정치실험에 나서고 있다. 뉴질랜드는 2022년 최초의 인공지능 정치인 SAM을 공개하였다. SAM은 방대한 역사 자료, 요즘 이슈들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들, 공공정보, 뉴스 등을 언어학습모델에 기반하여 취합한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의 질문에 상시로 답하고 정책결정자들의 결정에 기초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숱한 난관이 있겠지만, AI-휴먼 정치인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의 혁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감정과 편견, 증오에 사로잡힌 현대 정치의 종말. AI에게는 감정이 없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도, 우리 편에 대한 광적인 집착도 없다. 따라서 상대편에 대한 분노와 모욕으로 뒤범벅된 우리 정치에 AI의 무감정이 도입된다면 역설적으로 정치의 정화, 이성의 회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 AI 시대 정치 이성의 재규정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둘째, AI-휴먼 정치인에게 대한민국 헌법, 3·1 독립선언문, 국내외의 정치학 고전들을 학습시키고 이를 모든 정책 결정의 기반으로 삼게 한다. AI 에이전트가 모든 정책 결정을 기계적으로 헌법정신에 종속시키도록 설계된다면, 법치에 대한 조롱, 법치의 오남용은 줄어들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수공업) 노동의 종말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기계를 다루고 통제하는 호모 테크니쿠스의 역량을 발휘하면서 오늘의 경제적 번영과 보편 민주주의를 일구어왔다.   AI가 주도하는 제2의 기계 시대 역시 많은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지만, 이미 AI를 훈련하고 협력하는 흐름은 빅테크 사무실, 의약 실험실, 첨단 스마트 팩토리 등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마찬가지로 AI 정치인은 단순한 현실 도피용 꿈이 아니다. 여야 후보들보다는 나는 AI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   장훈 중앙대 명예교수·본사 칼럼니스트

    2024.03.18 00:38

  • [이하경 칼럼] ‘대만 재앙’의 한반도 충격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이하경 대기자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지난달 ‘대만 재앙’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중국 정책을 설계한 매슈 포틴저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도 3인의 공동 기고자 중 한 사람이었다.   기고문은 중국이 대만을 합병하고 미국을 아시아에서 몰아낸다면 “미국의 동맹국들은 자체 핵무기 개발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미 역량을 갖춘 것으로 분석했다. 이어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활성화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양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힘을 갖게 된다”고 했다. 헤지펀드 매니저인 켄 그리핀의 “대만 반도체에 대한 접근권을 잃으면 미국 GDP가 5~10% 감소할 것이며, 이는 ‘즉각적인 대공황’을 의미한다”고 한 발언을 인용했다. 고(故)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포틴저에게 “미국이 ‘세계 해안에서 떨어진 섬’과 유사해지기 시작할 수 있다”고 경고했던 사실도 공개했다.     ■  「 미 CIA ‘중, 2027 대만 공격’ 공개 왕이 ‘한반도 전쟁 불가’ 말했지만 미국 힘 분산 위해 북 사주 가능성 한·미·일 안보태세, 대화 모두 필요 」    중국은 대만을 침공할 것인가. 윌리엄 번스 미 CIA 국장은 지난해 10월 “시진핑이 2027년까지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끝내라는 지시를 군에 내렸다”고 했다. 우자오셰 대만 외교부장도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더 커졌으며 시기는 2027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27년은 시진핑 집권 4기가 시작되고 인민해방군 건군 100주년이 되는 해다.   대만에서 전쟁이 터지면 한반도는 바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양회(兩會) 기간 중인 지난 7일 “세계는 이미 충분히 혼란스럽다. 한반도까지 전쟁이나 동란을 보태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진심이기 바란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을 지키려는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한의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9월 CNN 인터뷰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북한 역시 도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강력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올해 1월 “미국은 유럽과 중동에서 억지력을 잃었고, 아시아에서도 억지력을 잃기 직전이거나 이미 잃었다”고 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온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만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트럼프는 지난해 9월 NBC 인터뷰에서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을 보내겠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도 거론했던 사람이다. 대만과 한국 방위는 장사꾼 출신의 흥정 대상이 될 운명인가. 이 와중에 김정은은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을 주저 없이 초토화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한반도 정세가 1950년 6월 초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하고 철저한 안보태세를 갖춰야 한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것은 윤 대통령의 탁월한 업적이다. 동시에 대화도 해야 한다. 평화의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대화는 필수다. 미국 NSC 대변인은 지난주 “한반도에서 우발적인 충돌의 위험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 여러 대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기시다 총리도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고, 북한도 호응하고 있다. 정작 당사자인 한국만 다른 분위기다. 통일부 조직에선 ‘교류’가, 외교부에서는 ‘평화’와 ‘교섭’이 사라졌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북한이 호전성을 드러내는 것은 경제난으로 인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대강으로만 맞서지 말고 지혜롭게 다양한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안정된 민주주의와 세계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한국은 지킬 것이 너무도 많은 나라다. 북의 온건파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한반도는 지구상 최악의 지정학적 화약고다. 소련은 미국과 힘을 합쳐 제2차 세계대전을 끝장냈다. 그러나 불과 5년 만에 김일성에게 설득당한 소련이 중국까지 끌어들여 한·미와 대결한 “3차 세계대전의 대체물”(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이 한국전쟁이다. 북한·중국·러시아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다. 이럴수록 안보태세를 단단히 하되 대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대만해협에서도 중국과 대만은 2010년 체결한 양안 경제협력기본협정(EFA)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대만의 대중국 수출액은 1522억 달러였다.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고, 강대국들은 쉴 새 없이 으르렁거린다. 이렇게 험악한 한반도에서 평화가 이뤄질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만일 한반도에 비핵 평화가 찾아온다면 1795년 칸트가 “전쟁은 악인을 제거하기보다 많이 만드는 점에서 나쁘다”면서 주창한 전 세계의 영구평화가 실현되지 않을까. 이하경 대기자

    2024.03.11 00:36

  • [최훈 칼럼] 비움이 없는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그릇’

    최훈 주필 인생만사 새옹지마란 정치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아직 1라운드지만 두세 달 전에 비해 총선 판세가 확 뒤집혔다. 지난 연말만 해도 “정권 견제, 야당 다수 당선 기대”가 51%를 넘어서며 죽을 쑤던 쪽은 국민의힘이었다. 반대로 더불어민주당은 “수도권을 석권하면 200석도 가능, 윤석열 정부 탄핵도 할 수 있다”며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던 흐름이 요즘은 “여당 다수 당선 희망” 38%, “제1 야당 다수” 35%, “제3지대 다수” 16%(한국갤럽 2월 27~29일)로 뒤바뀌었다.     ■  「 ‘비명횡사 친명횡재’에 흐름 반전 ‘여당 다수’ 기대, ‘민주 다수’ 앞서 비우질 않아 채움도 없는 이 대표 여야 어디든 ‘오만·독주’면 필패  」    이런 반전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탐욕’ 이미지 때문이다. 180석 공룡 정당을 물려받은 이 대표의 대권욕이 당내 분란과 민심 이반을 불렀다. 이미 지사·국회의원·제1당 대표의 자리에 올라선 이 대표로선 마지막 정점인 대통령에의 꿈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2년 반 뒤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겨야 한다. 당내의 절대적 지지 기반? 필수다. 백현동·대장동·대북 송금 관련 체포동의안에의 반란표? 한 번 당해 봤으니 철벽을 쳐야 한다. 조금이라도 걸림돌 될 세력과 인물들? 아예 싹을 잘라놓아야 할 터다.   소년공 시절 야구 글러브 공장 프레스에 눌려 왼쪽 팔이 굽어버린 이 대표는 “내 생에 봄날은 없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었다. 그러곤 자서전 말미에 “좌절의 밑바닥에서야 비로소 싹텄던 희망의 씨앗” “숨이 턱에 차도록 페달 밟아 올라가야만 겨우 문이 열렸던 운명의 고갯길” “결국 정상의 희열을 맛볼 수 있었던 인생의 섭리”라고 자기 삶을 정리했었다.   정치적으론 승승장구였던 그에게 요즘 네 가지 판단 착오가 드러났다. “아니 이 정도까지 할진 몰랐다”는 당심, 민심의 이반이 나타난다. 지난해 강서구청장 선거 압승에 이어 ‘김건희 여사 명품백’ 사건은 자만을 키운 양분이 됐다. “불체포특권 포기”를 호언했다가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 전날 ‘반대표’를 요구하자 믿지 못할 사람이 돼버렸다. ‘위성정당 금지’의 대선 공약과 달리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며 다시 위성정당을 수용, 불신은 더해졌다.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은 그 모든 욕심의 정점이다.   야당은 내려놓고 비웠을 때 승리했다. 정책·인사·예산 권력을 모두 쥔 여권과의 싸움에선 민심 얻을 명분이 유일한 무기다. 2016년 총선 직전 야권의 분열로 “여당 180석” 전망이 나올 때 민주당은 당의 주류인 이해찬·정청래를 공천에서 내치는 초강수 쇄신을 했다. 단 1석 차이 원내 1당에 올라섰다. 노무현을 대통령까지 만든 건 스스로 사지(死地)인 영남에서 두 차례나 낙선하면서도 ‘지역구도 타파’의 명분을 지킨 삶의 궤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총재 시절 ‘당내 독재’란 얘기 듣는 걸 극도로 꺼렸다. 모든 당내 경선 때마다 김상현·정대철·이기택 등 비주류 경쟁 주자들이 오히려 적절한 약진을 해주길 골몰했다. ‘대통령의 그릇’인 이가 대통령이 된다.   지금 이 대표에겐 ‘대통령의 그릇’임을 보여 줄 명분도, 원칙과 소신도, 배짱과 결기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소양이 없다면 그냥 머리 안 좋은 정치인이다. 그런데 내친 공천 자리에 친명 호위무사들만 채우려 한다면 그건 나쁜 정치인이다. 탐욕이다. 대통령 꿈꾸는 이가 양지 바른 텃밭인 인천 계양을에서 금배지 한 번 더 다는 게 무슨 명분이 있는가. 아무 것도 내려놓지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새로 쌓아 갈 공간은 없다. 혹 자수성가형의 심리 특성인 ‘이룬 것에의 집착’은 아닐까.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버리며 해야 한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 있다면 지금 이 대표를 보고 뭐라 했을까.   그의 예상 밖 두 번째 착오는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상대적 선전일 터다. 큰 잡음 없이 안정적이다. 유세의 동선과 메시지 등도 중도층에 거부감이 적다. 물론 혁신이나 감동도 없다는 평가가 공존하지만…. “한 위원장 잘한다” 52%(‘잘못’ 42%), “이 대표 잘한다” 36%(‘잘못’ 61%)가 최근 민심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거 쟁점에서 사라진 건 그에겐 세번 째 혼돈이다. 지난달만 해도 29%대 지지도의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의 대결 구도로 승리를 장담했지만 돌연 타깃이 증발해 버렸다. 이젠 이재명 대 한동훈의 대결 구도다. 더구나 사흘 전 윤 대통령의 지지도가 8개월 만의 최고치인 39%(한국갤럽)로 치솟았다. “의대 증원에의 뚝심” 평가가 그중 21%다. 여당 총선 승리의 필요조건 중 하나가 대통령 지지도 40%였다. 이대로라면 총선은 ‘윤석열 심판’이 아니라 ‘이재명 심판’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 이 대표의 혼란은 신당이다. 거대 정당에의 혐오로 제3지대 정당이 자리잡을 공간이 커졌다. 더구나 이준석·이낙연 신당은 물론 심지어 조국 신당까지 민주당 측의 표를 더 삭감할 구도다. 아직도 무당층·중도층은 19~29%다. 총선 결과 예측은 그러니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분명한 변수가 하나 있다. 누가 더 기득권을 내려놓고, 비우며, 새로운 정치개혁 영혼을 채워가느냐다. 오만과 독주를 심판하러 기다리는 게 대한민국 선거다. 37일이 남았다. 최훈 주필

    2024.03.04 00:36

  • [고현곤 칼럼]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사외이사 유감

    고현곤 편집인 사외이사를 본격 도입한 건 1998년 2월이다. 외환위기 직후였다. 기업의 민낯이 드러나자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감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사회에 외부 전문가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했다. 이들에게 기업 내 야당 역할을 기대했다. 나라의 명줄을 쥐고 있던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사항이기도 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들 진지했다. 그해 9월 중앙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A사가 자금난을 겪는 계열사를 지원하려고 했다. 사외이사들이 주주에게 피해를 준다며 반대해 결국 지원은 무산됐다. 곳곳에서 경영진과 사외이사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요새는 드문 풍경이다. 지난해 100대 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반대표를 던진 것은 0.4%에 불과했다. ‘거수기’라는 오명이 따라 다닌다.     ■  「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 기업 감시 초심 잃고 경영진과 유착 지배구조 엉망, 정부 낙하산 악순환 3월 주총 줄대기 전 각자 돌아보길 」    처음에는 사외이사 보수가 많지 않았다. 급여를 주지 않는 기업도 있었다. 삼성·LG·현대차처럼 큰 기업이 활동비·자문비 명목으로 월 200만원 남짓 지급했다. 포스코는 매달 한 차례 이사회 때마다 50만원의 거마비를 지급했다. 연봉으로 치면 600만원. 지금은 평균 연봉 1억500만원. 화폐가치가 떨어진 점을 감안해도 격세지감이다. 사외이사 연봉 1억원 넘는 기업이 삼성전자·SK·SK텔레콤 등 13곳에 달한다. 이쯤 되면 부업인지, 본업인지 헷갈릴 정도다.   방만한 경영을 막기 위해 사외이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교수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98년 3월 서울대가 사외이사 겸직을 허용했다. 처음엔 무보수에 한해서였다. 절제된 맛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대 전임 교원 중 9.4%(215명)가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물론 보수를 받는다. 교수들은 사외이사 소득 일부를 학교발전기금으로 낸다. 서울대가 거둔 돈만 지난 4년간 35억원. 대학과 교수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조다. 관료들도 현직에서 물러나면 사외이사 자리부터 알아본다. 노후 대책으로 이만 한 게 없다.   인맥을 총동원해 기업에 줄을 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기업이 갑이 돼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고른다. 적당한 간판에 까다롭지 않은 사람을 환영한다. 바람막이나 대외 로비에 활용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교수와 관료·법조인이 기형적으로 많은 이유다. 지난해 100대 기업 사외이사 457명 중에 42%가 교수다. 기업인은 19%, 관료 15%, 법조인 13%다. 4대 금융지주·은행(KB·하나·우리·신한)은 교수가 특히 많다. 사외이사 50명 중 36명이 교수다.   56년 사외이사를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은 정반대다. 사외이사의 80~90%는 풍부한 사업 경험을 가진 전문경영인이다. 경쟁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을 영입한다. 미국 기업 절반은 사외이사에 교수가 한 명도 없다. 이사회는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해 오픈AI 이사회가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CEO를 전격 해임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세상을 놀라게 한 쿠데타였다.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도 자기가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이사회 결정의 잘잘못을 떠나 우리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국내에서 끝판왕은 포스코, KT, KT&G, 금융지주 등 ‘주인 없는 기업’의 사외이사다. 회사별로 차이는 있으나 업계의 정설은 이렇다. 회장은 가까운 사람을 사외이사로 앉히고,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 사외이사는 회장의 연임을 돕는다. ‘셀프 연임’에 성공한 회장은 다시 사외이사를 연임시킨다. 회장이 물러날 때는 배신하지 않을 측근을 후임 회장에 앉히기도 한다. 견제도 받지 않는다. 명실공히 ‘그들만의 기득권 카르텔’이다. 기업 지배구조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정부가 만만히 보고 ‘낙하산 인사’를 내리꽂는 것 아닌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기도 하다.   포스코는 지난해 8월 캐나다 호화 이사회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1주일 동안 이사회는 딱 한 번 열었다. 나머지는 전세 헬기를 타고 시찰, 관광, 골프로 6억8000만원을 썼다. 강심장이다. 최정우 회장이 3연임을 노리던 중이었다. 후임 회장을 뽑는 사외이사 7명이 참여했다. 물의를 빚자 사외이사 측은 “새 회장을 뽑는 중요한 시기에 후보추천위원회의 신뢰를 떨어뜨려 이득을 보려는 게 아닌가”라고 맞받아쳤다. 사과도, 사퇴도 없다. 회사 내에선 “병당 120만원짜리 와인을 곁들인 게 화근”이라는 말이 나온다. 최고급 와인을 먹는 바람에 재수없게 걸렸다는 건가. ‘사심 없이 헌신하라’는 박태준 초대 회장의 창업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세운 기업에서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회사에 손실을 끼쳤는지 철저히 수사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후임 회장은 뒤틀린 이사회부터 바로잡기 바란다.   3월은 12월 결산법인의 주총 시즌이다. 사외이사 시장도 큰 장이 섰다. 사외이사의 세 가지 자격 요건은 전문성·독립성·도덕성이다. 올봄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막판 줄대기에 바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격을 갖췄는지 돌아봤으면 한다. 초심을 잃고 변질된 사외이사야말로 개혁 대상이다. 고현곤 편집인

    2024.02.27 00:38

  • [염재호 칼럼] 인구절벽과 우수 유학생 유치정책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예일대학교 로스쿨 에이미 추아(Amy Chua) 교수의 책 『제국의 미래』를 보면 역사상 강대국으로 부상한 제국의 특징은 외부 세력에 대한 관용과 포용에 있었다. 당나라 제국의 발흥도 많은 외국인을 유입시켜 포용한 정책에 기인했다고 책에서 설명한다. 수도 장안(長安)에는 당시 지구상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있었고 인종의 다양성도 뛰어났다.   당 태종은 신라인 7만 명을 받아들였고 신라의 귀족과 관리들을 관직에 등용했다. 신라 후기에는 매년 100여 명의 6두품 이하 자제들이 당나라로 건너가 10년 정도의 유학생활을 했다. 840년 한 해에 105명 유학생이 동시에 신라로 귀국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당나라 홍로사(鴻臚寺)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위해 숙식과 의복을 제공하는 장학제도를 운용했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906년까지 58명, 이후 925년까지 22명의 신라인이 급제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도 당나라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감찰과 문한을 맡는 도통순관과 관역순관이라는 직책으로 복무하다가 17년 만에 고국 신라로 귀국했다.     ■  「 제국의 강점은 다양성과 포용력 국가경쟁력 핵심은 인력시스템 해외인력으로 인구절벽 극복해야 우수 유학생 유치 위한 전략 시급 」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찾아온 이민자들의 천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1933년부터 1950년 사이에 13만 명에 달하는 유럽 지식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5년 이후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 숫자는 약 2200만 명에 달해 인구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전체 인구 3억3000만 명 가운데 백인 57.8%, 히스패닉 18.7%, 흑인 12.4%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은 건국한 연도와 국토면적은 비슷하지만 이민을 적극 수용한 미국만 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1776년, 브라질은 1822년, 캐나다는 1867년 건국했다. 국토 면적은 미국 983만㎢, 캐나다 998만㎢, 브라질 851만㎢로 비슷하다. 하지만 인구는 미국이 3억3000만 명인 데 비해 브라질은 2억1000만 명, 캐나다는 3400만 명에 불과하다. 인종 분포도 캐나다는 73%가 유럽계이고, 브라질도 유럽계 백인 47.7%에 백인과 흑인 혼혈 물라토 43.1%로 다양하지 않다.   지금 미국 경제에서 지식노동은 한국, 인도, 중국 등 아시아계 인력에 의존하고 육체노동의 대부분은 히스패닉이 담당하고 있다. 첨단산업의 메카 실리콘 밸리의 인구 비중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36.2%, 컴퓨터 엔지니어의 29.6%가 아시아계이다. 미국 건설현장 노동자의 60%는 히스패닉이 담당한다. 히스패닉 인구가 42.1%를 차지하는 뉴멕시코, 32%가 넘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에서는 이들이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인구절벽을 맞은 우리나라의 미래는 심각하다. 2016년 생산가능인구는 3763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하락하고 있으며, 2022년 합계출산율은 0.78명까지 내려갔고, 총인구도 2020년 5184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2100년에 인구가 2000만 명대가 된다고 한다. 이제 저출생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고 다각도로 미래 인구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홍콩과기대 김현철 교수의 홍콩 가사도우미 경제학은 흥미롭다. 홍콩이 1974년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를 도입한 이후 대졸 여성 노동시장 참여율이 평균 25% 상승했다고 한다. 2022년 홍콩에는 약 34만 명, 싱가포르에는 약 27만 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있다. 다음 달부터 고용노동부와 서울시의 시범사업으로 필리핀에서 100명의 가사도우미가 입국하게 된다. 가사도우미 외국인 노동인력 유입이 본격화되면 출생률 변화도 기대해볼 만하다.   외국인 유치에서 단순 노동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우수 인재 영입이다.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대학등록금 억제정책 때문에 사립대학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해온 외국유학생 유치 활동을 넘어서 정부가 체계적으로 우수 유학생 유치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초중고 12년간의 교육비용을 자국에서 부담한 우수 인력들이 대학과 대학원에 유학생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고급인력으로 정착하면 국가적으로 큰 도움을 얻게 된다. 현재 미국에는 약 95만 명, 일본은 약 35만 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있다. 우리는 약 16만 명의 유학생이 있는데 정부는 2027년까지 30만 명까지 늘리겠다고 한다. 단순한 숫자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유학생을 확보할 전략이 필요하다. 우수 유학생 유치정책으로 일본 정부는 일본학생지원기구(JASSO)를 통해 도쿄 오다이바에 국제연구교류대학촌 시설을 유치하고, 도쿄국제교류관에 외국인 유학생과 연구자를 위한 주거시설을 건립했다.   앞으로 지구촌 노동력은 더욱 활발하게 이동할 것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은 우수 인력 확보를 위한 시스템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데 달려있다. 이제 단일 민족의 차원을 넘어 다양성과 다문화를 끌어안아야 한다. 제국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포용의 힘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2.21 00:48

  • [이하경 칼럼] 되살려야 할 이승만과 제헌국회의 협력

    이하경 대기자 우남(雩南)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공산 세력으로부터 지켜낸 거인(巨人)이다. 강대국 미국은 오판을 거듭했지만 우남은 오차 없는 국제정세 판단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김덕영 감독의 다큐영화 ‘건국전쟁’을 관람했다. 많은 분이 “저평가된 우남의 실체를 알게 됐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다. 우남의 전모를 보다 균형 있게 파악하려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제헌국회와의 갈등과 협력을 편견 없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가면서 우남에게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5·10 총선, 헌법 제정, 대통령 선출, 내각 구성을 통해 정부를 출범시키고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넘겨받아 8월15일 신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해야 했다. 9월21일 시작되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는 것도 중대사였다.     ■  「 미국 오판으로 초래된 북의 남침 우남, 초인적 노력으로 나라 구해 제헌국회, 당략 초월 ‘민주’ 지켜 한반도 위기 대비 견제·협력 필요 」    그래서 5월31일 구성된 제헌국회에 “1분이라도 빨리 우리 헌법을 통과시키자” “비율빈(필리핀)은 이틀 만에 만들었다”고 채근했다. 일본은 착수 9년 만인 1889년에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는데 한국은 한 달여 만에 해치웠다. 우남은 나라를 잃은 뒤 외교를 통한 독립을 성취하는 데 한평생 매달렸지만 좌절했다. 그래서 새 정부 수립의 성공 가능성을 100% 낙관하지 못했다. 남로당의 준동도 불안감을 키웠다. 그가 실권을 가진 초당적 지도자가 되려 한 배경이다.   반면에 최초의 국가기관인 제헌국회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했다. 우남의 거부로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급선회했지만 헌법에서 내각제적 요소를 최대한 살렸다. 대통령의 결정은 국무회의 과반수 의결을 거쳐야 집행될 수 있게 했다. 국회는 총리를 인준하고, 총리와 장관을 부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의 설명을 요구했고,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제도화했다.   제헌국회는 재석 196명 중 180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우남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확고한 국부(國父)의 위상이 확인됐다. 문제는 초대 국무총리 인선이었다. 우남은 김성수·신익희·조소앙 등 국회가 원하는 지도자 대신 북에서 내려온 목사 이윤영 의원을 선택했다. 국회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시켰다.   우남이 담화를 통해 “인준 부결은 파벌주의 때문이며 참된 민의가 아니다”고 하자 “이런 어법은 천황제와 비슷하다”(노일환 의원)는 반발이 나왔다. 파국 일보 직전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우남은 국회에 나와 “국회가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총리를 인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전제국가가 아니라 민주국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환영한다”고 물러섰다.(『오늘이 온다』 권기돈)   임기 2년의 제헌의원 200명은 “1인1당”의 자유를 누렸다.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당당하게 발언했다. 대부분 짐칸에 덮개를 씌운 트럭이나 전차를 타고 출퇴근했지만 주말에도 국회에 나와 치열하게 토론했다.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당리당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의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1950년 1월19일 미국 하원이 6000만 달러 규모의 한국경제원조안을 부결시켰다. 국회는 원조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조헌영 의원은 찬성하면서도 “왜 부결시켰는지는 알아야 한다. 미국은 한국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고 대통령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정파를 초월해 존경받았던 ‘토론 종결자’ 조 의원은 고려대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의 부친이고,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조부다.   일주일 뒤인 1월 26일 민국당 서상일 의원 외 78인은 “대통령제로는 민주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며 내각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야당 출신 신익희 국회의장은 개헌에 찬성하면서도 우남을 “나라의 지보(至寶)이고 국부”라며 “그분이 종신대통령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국정 운영의 일방통행은 거부하지만 우남이 존경받는 인물임은 인정했다.   우남은 1949년 상반기 미군 철수가 기정사실화되자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미국은 거꾸로 북침을 우려해 외면했다. 2차 세계대전을 막 끝낸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남북 충돌로 3차대전이 터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소련도 같은 입장일 것으로 오판했다. 우남의 판단이 맞았다. 피란길에 허정을 만난 우남은 “미국놈에게 속았다”고 했다.(『허정 회고록』) 하지만  초인적 노력으로 미국의 지원을 끌어냈고, 반공포로 2만5000명을 석방하는 광인(狂人)전략까지 동원해 소원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거머쥐었다.   제헌국회는 1949년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들었고, 6·25전쟁 중의 민심이반을 막았다. 우남과 제헌국회가 합력했기에 가능했다. 한반도 정세는 6·25 전과 흡사하다. 중국·러시아·북한은 밀착 중이고, 트럼프는 동맹을 헌신짝으로 여기고 있다. 우남처럼 국제정세를 꿰뚫고 강대국에 맞서는 용기 있는 지도자, 당리당략을 초월해 견제와 협력에 나선 제헌의원들의 2인3각 애국심을 되살려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4.02.19 00:45

  • [장훈 칼럼] 한동훈 현상:세대 교체론, 자질론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1 역설 한 가지. 우리 정치에서는 현실이 상상력을 앞질러 간다. 필자는 그동안 금년 말에나 한동훈 현상에 대한 칼럼을 써볼까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한동훈 현상은 예상을 앞질러 현실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 한 위원장은 여당 내 힘겨루기뿐만 아니라 제1야당과의 경쟁에서도 중추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4월 총선은 정부 심판론보다 여당 비대위원장 평가가 우선하는 특이한 선거가 될 조짐마저 보인다. 새 정치 스타가 솟구쳐 오르다 보니, 뜨거운 열광과 싸늘한 냉소가 이어진다. ‘73년생 한동훈’에 대한 지지층의 기대가 폭발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비판을 넘어선 험한 말들이 쏟아진다.     ■  「 탈산업화 세대 정치리더의 등장 윤·한 갈등은 세대 갈등이기도 공직 우등생이 정치리더로 변신 특권 폐지 등 리더 역량 시험대에 」    #2 이 칼럼의 목적은 한동훈 현상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그렇다고 맹렬한 비난에 동참하지도 않을 것이다. 열광과 냉소를 떠나 세 가지 관점에서 한동훈 현상의 의미를 짚어보려 한다. ①세대교체론. 윤석열 대통령이 산업화 시대 세계관의 마지막 계승자라면, 한동훈 위원장은 탈산업화 세대가 보수 정당의 주류로 등장했다는 신호탄이다. ②자질론. 한동훈 위원장은 한국의 교육 체제가 길러낸 최상급 인재이다. 뛰어난 문제풀이 능력을 바탕으로 세속적 성공의 사다리를 밟아온 이 제도권 인재는 과연 정치의 험난한 세계에서도 능력을 발휘할까? ③민주화 세대 청산론. 한동훈 장관이 여당 리더로 변신하면서 내세운 최우선 과제는 민주화 특권 계급 청산론이었다. 과연 그의 문제 설정에 대해 동료 시민들은 얼마나 지지를 보낼 것인가?   #3 먼저 세대론. 민주화 이후 보수 계열 정당에서 세대교체의 과제는 사실 같은 문제의 무한 반복이었다. 누가 언제 산업화 시대의 세계관, 멘탈리티를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 것인가?   이준석 대표 체제의 막간극을 거쳐 윤석열 정부 3년 차를 맞으면서 윤 정부가 산업화 세계관의 마지막 주자라는 점은 명확해지고 있다. 임기 초반의 각오와는 달리 점차 관료 중심주의, 성장 목표에의 몰입, 수직적 소통에 기대는 모습은 산업화 멘탈리티의 회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보니 “술을 전혀 안하고 대신 커피를 마시는” 신인류 한동훈 위원장이 상징하는 세대, 문화적 기호들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커피, 음악, 옷맵시 등은 단지 개인 취향이 아니다. 그가 상징하는 취향의 발산은 곧 구시대의 집단주의, 위계질서, 돌격 정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오렌지 세대(혹은 서태지 세대) 리더의 부상에 적지 않은 이들이 당황해하고 있지만, 사실 이들이 곳곳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지는 꽤 됐다. 기업, 문화예술계, 과학기술계에서 이들 세대는 진작 주류로 진입해 있다. 다만 기득권의 철옹성이었던 정치, 특히 정당정치에서 이들 세대의 주류화가 미뤄져 왔을 뿐이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위원장의 갈등은 한편으론 당-정 갈등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연되어 온 정치세대교체를 둘러싼 갈등이기도 하다.   #4 윤 대통령-한 위원장의 세대 갈등(과 봉합)이 빚어내던 만큼의 극적 요소들은 많지 않지만, 필자가 눈여겨보는 것은 한동훈 위원장의 자질을 둘러싼 토론이다. 한편에서는 그의 군더더기 없는 언어 구사와 상황 요약 능력을 떠받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1야당에 맞서는 말싸움 실력 외에는 보여준 것이 없다는 냉소적 평가도 뒤따른다.   하지만 자질론의 핵심은 한동훈 위원장의 화려한 경력을 뒷받침해 온 자질과 정치리더로서의 자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 있다. 대학입시-사법시험-검찰 요직을 거치며 한 위원장이 세속적 성공의 길을 달려온 바탕에는 탁월한 문제풀이 능력이 있었다. 법률, 대학 교육과정이라는 분명한 준거들이 있고 이 준거들 안에서 문제를 빨리 효율적으로 푸는 것이 그의 검증된 능력이었다.   반면 정치의 세계에서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문제풀이와는 전혀 다르다. 문제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따로 모범답안이 나와 있지도 않다. 대표 사례들을 꼽아보자. 인구위기, 사회 양극화, 인공지능의 도전, 기후변화. 이들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가장 해결이 어려운 문제는?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는?   결국 주어진 문제를 풀이하기보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살피는 능력,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 문제 해결의 완급 조절이 곧 리더의 자질이다. 이 점에서 한동훈 위원장의 정치적 자질 검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검증의 첫 무대는 당연히 이번 총선의 핵심 이슈들이다. 한동훈 위원장은 세대교체, 특권 정치의 타파, 민주화 운동세력의 청산을 이번 선거의 핵심 과제들로 내걸었다. 이러한 문제설정에 유권자들이 얼마나 호응하는가에 따라 우리 정치는 방향을 바꾸게 된다. 지루하게 이어져 온 산업화세대-민주화 운동세대의 패권이 마침내 막을 내릴지? 민주화 이후 심화하여 온 정치 귀족들의 특권화는 멈추게 될지?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한 세대가 여야 정당을 주도하는 시대가 열리게 될지?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2024.02.05 00:36

  • [고현곤 칼럼] 닥치고 가덕도

    고현곤 편집인 동남권 신공항을 처음 꺼낸 건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이듬해 이명박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받았다가 2011년 백지화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시 후보지 세 곳을 평가했다. 가덕도는 꼴찌였다. 파리공항공단 측은 김해신공항 818점, 밀양 665점, 가덕도 635점을 줬다. 장마리 슈발리에 수석연구원은 “가덕도는 국토 남쪽 끝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건설비가 많이 든다. 공항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시 군불을 땠다. 김해신공항을 흠집 내더니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둔 2021년 느닷없이 가덕도로 바꿨다. 1등(김해)이 문제 있다며 2등(밀양)을 건너뛰고, 3등(가덕도)으로 직행했다. 기이한 결정이었다.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는 특별법을 만들어 대못을 박았다. 부산 표를 구걸하는 야당(국민의힘)이 합세했다. 일사천리의 진풍경이었다. 예타 면제는 두고두고 나쁜 선례로 남았다. 지난주 통과한 ‘달빛철도특별법’도 가덕도의 아류다.     ■  「 부산 표 구걸…여야 합작 ‘정치공항’ 활주로 1개 13조, 김해공항의 세 배 무리한 공기 단축, 부등침하 우려 엑스포 없는데 조기 개항해야 하나 」    지난해 3월 윤석열 정부는 2030 부산엑스포전에 개항하겠다며 공사 기간을 5년6개월이나 앞당겼다. 마음만 먹으면 뚝딱 줄일 수 있는 건지 의아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당초 안은 바다에 짓는 것이었는데, 바다와 육지에 걸쳐 짓는 공법으로 바꿨다. 매립 규모가 줄면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 꼴찌인 가덕도에, 공법도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누더기가 됐다. 활주로 달랑 1개의 여야 합작 ‘정치공항’이 탄생하는 것이다.   가장 큰 논란은 안전 문제다. 특별법 처리 당시 국토부는 “진해 비행장과 공역이 중첩되고, 김해공항 관제 업무가 복잡해져 안전사고 위험이 증가한다. 수심이 30m에 이르고 태풍이 지나는 길목”이라고 지적했다. 활주로 1개로는 화재 등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부등침하(땅이 불균등하게 가라앉는 현상) 우려도 있다. 2022년 사전타당성조사 연구진은 “바다~육지 공항은 지반의 지지력 차이가 커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다 쪽 활주로가 육지 쪽 활주로보다 많이 가라앉을 수 있다는 의미다.   난공사로 비용도 많이 든다. 김해공항 확장에 4조7000억원이 필요하다. 가덕도는 세 배인 13조5000억원. 활주로를 1개 추가하면 7조원이 더 든다. 도로와 공항철도, 해상여객터미널 건설비는 별도다. 외항에 짓는 만큼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실제 사업비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가덕도의 비용 대비 편익 비율은 0.58이다. 공항을 지어서 얻는 편익이 비용의 절반에 그친다. 경제성으로 따지면 지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원안대로 김해공항을 확장하고, 남는 세금은 어려운 이웃 돕는 데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이용객은 불편하다. 부산에서 가덕도는 김해공항보다 멀다. 활주로 1개로는 국내선이 들어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국제선은 가덕도, 국내선은 김해공항으로 이원화된다. 항공사는 비용이 증가한다. 공항이 불편하고 비싸면 흥행이 안 된다. 텅 빈 활주로에 고추를 말리는 전남 무안공항처럼. 이미 웬만한 수요는 인천공항 2여객터미널과 서울~부산 KTX가 흡수했다. 자칫 부산 시민은 들러리 서고, 가덕도 인근 땅 주인과 관련 업자만 배 불리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러는 사이 가덕도 시계는 돌아간다. 지난해 말 기본계획을 고시했고, 올해 5000억원 넘는 예산을 편성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담당 공무원이 직무유기로 검찰에 불려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보수·진보가 모처럼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인들은 표만 생각한다. 문제점에 눈 감고, 지역에 장밋빛 환상을 심었다. 문 전 대통령은 특히 노골적이었다. 2021년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가덕도 앞바다에서 “신공항 예정지를 눈으로 보니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별반 차이가 없다. 지난해 12월 엑스포 불발 1주일 만에 부산을 찾았다. “지역 현안 사업은 그대로 더 완벽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개항을 무리해 가며 5년 이상 앞당긴 건 엑스포 때문이었다. 유치에 실패하니 이번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기 개항을 밀어붙인다. 어처구니없는 악순환이다. 촉박한 엑스포 시간표가 없어진 만큼 안전과 비용을 따져 다시 검토하는 게 맞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술 더 떴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정부가 가덕도를 국내 공항 정도로 대폭 축소해서 땜질한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스타일의 저열한 비방이다.   젊은 정치인도 오십보백보다. 2021년 7월 당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가덕도 특별법은 우리 당이 앞장서 입법했다”고 자랑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최근 부산을 찾아 “조기 개항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기존 정치와 선을 긋고,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면서 똑같은 구태 정치를 한다. 다들 자기 장사와 표 계산에 바쁘다. 세금을 자기 돈처럼 아껴 쓰고, 자신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걱정하는 지도자가 안 보인다. 좌우, 신구를 막론하고. 고현곤 편집인

    2024.01.30 0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