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법조인 정치와 국가 어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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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2대 총선의 주제는 비전이나 정책보다 상대를 정죄하기 위한 심판이었다. 총선의 주역은 모두 법조인들이었다. 대통령과 양당 대표 모두 법조인 출신이고, 조국혁신당 대표도 법대 교수 출신이다.

선거 결과 61명의 법조인이 당선되었다. 지난 21대 총선보다 15명이 늘어나 국회의석 20.3%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문성을 대표하는 비례대표가 아니라 지역구 의원만 55명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7명의 총리 가운데 5명이 법대 출신이다. 양김 시대 이후 대통령이 되겠다고 도전한 사람들 대다수가 법대 출신이고 최근 정권 문재인, 윤석열 대통령 모두 법조인 출신이다.

과잉 대표된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
연역적 정답만 찾는 법조정치 우려
라이벌도 품는 포용의 리더십 절실
정쟁 멈추고 미래 어젠다 몰두해야

외국 의회의 경우를 보면 법조인 출신은 제한적이다. 영국은 2019년 총선에서 650명 의원 중 7.2%인 47명, 프랑스는 2022~27년 임기의 하원의원 577명 중 4.8%인 28명, 일본은 2021년 465명 중의원 중 3%인 14명에 불과하다. 미국도 2023년 하원의원 9.4%가 판검사 출신이라고 한다.

법조인은 다른 직업 출신보다 논리적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법안 입안과 심의과정에서 전문성을 보인다. 법조인은 형식논리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굴복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객관적 증거와 논리적 분석을 바탕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오래 받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영미법 전통과 달리 독일과 일본의 대륙법 전통을 갖고 있어 법체계가 연역적이다. 미국처럼 피고가 유죄를 인정하거나 검찰에게 유리한 증언을 통해 형을 낮추는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정해진 법 규정에 따라 연역적 추론으로 피고의 죄를 판단하고 구체적 형량으로 심판하기 때문이다. 영미법은 판례 중심의 귀납적 체계이기에 절대적 판단보다는 상대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에서 배심원제도가 발달한 이유도 판사의 절대적 판단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상대적 판단도 고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학부가 법대 행정학과라서 수업이 마치 수학에서 정답을 찾듯 연역적 추론 교육을 배우는 법학 중심이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는 정치학의 분과로 행정학을 공부해서 대안 탐색의 귀납적 방식을 익혀야 했다. 스탠퍼드 대학원 시절 은사였던 제임스 마치(James March) 교수는 정책 결정을 ‘정답 찾기’가 아니라 ‘통나무 굴리기(log rolling)’로 비유했다. 여러 명이 통나무를 굴려 움직일 때 모두 적절하게 힘을 배분하여 이동시켜야지, 한두 명이 조급하게 밀면 통나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조인 정치가들은 마치 형량을 정하듯 R&D 예산 30% 삭감, 의대 2000명 증원 등 모든 이슈에서 정답을 제시하곤 한다. 또는 자신의 잘못을 형식논리로 호도하여 남의 탓과 팬덤 현상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곤 한다. 좌우 모두 독선적 정치로 국민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이 국가 어젠다를 왜곡할 때 우리에게 닥친 국가적 위기는 심각하다. 인공지능 혁명의 혼돈 속에서 미·중 갈등을 위시한 국제질서의 재편, 북한 핵미사일 위협, 글로벌 밸류체인 변화, 수명연장과 저출생, 인공지능이 몰고 올 직업·노동·교육 등의 전방위적 사회 패러다임 변화는 지각변동 수준이 될 것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격랑이 보이지 않는지? 우리 모두가 힘들게 이뤄낸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성취를 더 발전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적폐 청산, 일제 잔재 청산, 좌파 카르텔 청산, 검찰 독재 심판 등 과거 시시비비만을 따지는 싸움만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지?

퓰리처상 작가인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 Goodwin)의 『권력의 조건』을 보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라이벌까지 끌어안은 링컨의 포용 리더십을 잘 그리고 있다.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링컨은 대선 경선과정에서 경쟁한 라이벌들을 국무장관, 재무장관, 법무장관에 임명했고, 야당인 민주당 출신 세 사람도 장관으로 임명했다. 막강한 경쟁자들도 처음에는 링컨을 경험도 없고 무식하다고 멸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존경심과 함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을 하게 되었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등 중대한 국가 어젠다를 풀기 위해서는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링컨의 뛰어난 정치 리더십이 돋보인다.

이제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은 미래의 국가 어젠다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더 이상 민변 출신들과 검찰 출신들처럼 법조인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복수의 대혈투극에 국민을 끌어들이지 말기 바란다.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는 정죄하고 심판하는 판단의 리더십보다 국가 미래 어젠다에 대해 상대를 설득하고 합의를 끌어내는 포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국가 미래 어젠다를 최우선 통치 과제로 삼아 정쟁 종식을 선언하고 함께 지혜를 모으는 포용의 리더십을 펼치길 기대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