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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선, 도전 자체가 중요한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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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

지난 1년간 미국 대선을 취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 중 하나가 론 폴 텍사스주 하원의원이다. 77세의 산부인과 의사 출신 정치인. 8선(選)의 폴 의원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다.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었을 때도 그는 사퇴하지 않았다. 지지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또 정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완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승부 자체에 집착했던 후보들은 당선 가능성이 적어지자 차례로 레이스를 떠났다. 그는 대선 후보를 추대하는 전당대회 전날까지도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고 주장해 주류 당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이런 고집이 이해가 된다. 론 폴은 30년 의정생활 동안 ‘최소한의 정부, 최대한의 자유’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철저한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법안을 발의했고 지지했으며, 수많은 책을 펴냈다. 일관된 삶과 분명한 정책 철학을 가진 그에게 ‘정치공학’은 변수가 될 수 없었다.

 지난주 미국 대선이 끝나 승자와 패자의 운명이 갈렸다. 그런데 실패했어도 표정이 나쁘지 않은 후보들이 있다. 도전에서 의의를 찾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한 정치 이념과 정책 리스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역할 축소를 강조하는 제3당인 자유당은 이번에 역대 최다인 110여만 표를 얻었다. 뉴멕시코 주지사를 지낸 게리 존슨 후보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승부를 떠나 도전 자체에서 많은 것을 이뤘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기존 정당과 유권자들에게 다른 목소리와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했고, 그로 인해 정치개혁의 단초를 제공했으니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철학과 가치를 알리는 일은 순간순간 즐거운 경험이었다”며 완주에 큰 의미를 뒀다. 녹색당 후보 질 스타인도 “선거는 정치개혁을 향한 여정의 하나일 뿐”이라며 “다시 뛰자”고 호소했다.

 양당 정치가 정착된 미국에서 기타 후보로 출마한다는 건 일견 무모해 보인다. 당내 주류에 도전하는 군소 후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때론 욕도 먹어야 한다. 2000년 대선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유권자 득표에서 앞서고도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에게 졌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패배 원인으로 랠프 네이더 녹색당 후보를 지목했다. 경합주 플로리다에서 진보 성향 표를 잠식해 결과적으로 고어에게 패배를 안겼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런 비난은 정치를 지나치게 ‘표’라는 하나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통해 성장하게 마련이다. 질 줄 알면서도, 또는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철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도전하는 후보들이 있어 미국의 민주주의가 탄탄히 유지된다고 믿는다. 누구나 알고 있듯 승패나 정치공학만 강조하면 순수성을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