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을 숨쉬는 배우 지진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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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의 남자>에서 최승우 역으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진지한 연기 틀을 다지더니, 이번엔 <네 자매 이야기>에서 사랑의 배신으로 매몰차게 변신하는 시인 한태석으로 나와 또 한번 자연스럽고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보이고 있는 지진희. 그와의 두 번째 만남.

그래, 자네는 꿈이 뭔가?
나 나온 우체국 CF 보면, 시골 정자 같은 데 앉아서 할아버지가 나한테 그렇게 물어보잖아. CF에선 난 그냥 씩 웃으며 지호씨 손을 꼭 잡으면서 어물쩡 넘어가지만 진짜로 내 꿈을 대답해 보라면 이렇게 말하겠어. "오토바이 타는 거랑 여유 있는 할아버지 되는 겁니다"라고 말이야.

오토바이 타는 건 어릴 때부터 꿈이야.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멋진 남자들이 말을 타며 초원을 다리는 장면에 반해 말을 탈까 생각도 해봤지만, 현대 사나이에겐 말보다는 오토바이가 더 어울릴 것 같아.

여유 있는 할아버지란 무슨 말이야 하면, 하얀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자기 중심을 가지고 살면서, 방 한구석에 작업대 놓고 금속공예, 종이공예, 목공예 하면서 매력적인 연기도 병행하는 그런 할아버지를 말해. 될 수 있을까?

배신, 복수, 변신
사랑의 배신을 당하지. 그래서 한을 품게 되고 성공에 매달리게 돼. 돈 벌기 위해서 악착같이 달려들기도 하고 말이야. 나를 배신한 여인에 대한 실망감이나 분노도 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이야.

문학 청년에서 속물, 저질로 변해가지. 순수에서 벗어난 냉철함, 순수한 글보다는 성공을 위한 글과 감독 작업, 여인에게 못되게 굴기, 그렇게 마구 변하게 돼. 나라면? 그냥 보내. 아프니까. 서로에게 못할 짓을 하기는 싫어.

물론 처음에 몇 번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겠지만, 두세 번 해보다가 안 되면 마음 정해. 받아들이고 보내야지 어쩌겠어. 복수 같은 것도 치사해서 안 해. 최대한 무관해지는 게 오히려 가장 큰 복수가 되지 않을까?

자연스러움, 비행기, 꾸준함
60.70살까지 연기를 하려면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이 필요할 것 같아. 이제 곧 30대가 되는데 그 나이에 맞게 변화해야 할 것 같고 40,50대가 되어도 계속 그 나이에 맞는 적절한 변화가 있어야겠지. 그 변화의 기본은 물론 자연스러움이야. 뭐든 억지로 끼워 맞춰서 되는 건 없는 것 같아.

종이나 나무로 배나 비행기 만들 때도 그래.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려본 다음 설계도를 그리고, 그 재료에 맞는 디자인을 연구해야만 좋은 완성품이 나오잖아. 자리 한 번 안 뜨고 3일 밤낮으로 비행기 만든 적도 있으니까, 나 이만하면 뭔가 꾸준한 구석이 있는 사람 아닌가?

그래. 그렇게 꾸준히 갈 거야. 하얀 수염난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계속 하고 싶은 연기니까. 참, 이번 여름은 <네 자매 이야기> 덕분에 그냥 지나가게 생겼어. 래프팅, 제트 스키, 물장난, 수영…아, 물이 진희를 부르는데! 그 대신 요즘 나 달리기 해. 박철씨랑 이근희씨랑 함께 마라톤 비슷한 걸 하지. 숨이 턱까지 차다 못해 곧 넘어갈 것만 같은 그 순간이 참 좋아. 그러고 나서 샤워 한번 하면 세상이 다 내 거라구!

연기, 이미지, 영화
연기는 아직 부족한 게 많다는 걸 매순간 느껴. 사실 연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건 <줄리엣의 남자> 16,17회 때부터라고 생각해. 그전엔 지난 회들 보면 너무나 후회가 많이 됐는데. 끝날 무렵쯤 되니까 비로소 감도 확실히 잡히고 연기에 안정감도 생기는 것 같더라구. 고생도 많이 했지만 날 훌쩍 크게 한 드라마인 것 같아.

이번 <네 자매 이야기>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아. <줄리엣의 남자> 때는 내가 좀 끌려 다녔다면 <네 자매 이야기>는 내가 앞장서서 이끌고 있어.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표현해 내는 재미가 보통이 아냐. 반짝 스타는 싫어 내 이미지에 맞게, 혹은 그 이미지를 업고 조금씩 변신하며 꾸준히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

약간의 스타일 변화로 큰 변화를 할 수 있다는 내 장점을 살려 앞으로도 많은 연기에 도전해 보고 싶어. 형사, 경찰, 군인 같은 역은 물론 다중인격자나 파격적인 성격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말이야. 물론 최종 목표는 영화야. 드라마는 영화를 위한 준비 과정이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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