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문학상 후보작] 전성태 '퇴역 레슬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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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씨는 『매향(埋香) 』이라는 작품집을 한 권 상재한,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신예작가이다.

한 권의 창작집을 낸 작가가 여러 선자(選者) 들의 눈에 들어 황순원 문학상의 본심에 올려진 것은 다소 의외의 사건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작품이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첫 작품집에서 전씨는 젊은 작가들로서는 보기 드물게 김유정.이문구의 산문 전통을 이어받아 농촌 현실을 풍부한 감성으로 표현했었다.

1990년대 이후 젊은 작가들이 도시의 화려한 락카페와 혼자 사는 오피스텔과 편리하기 그지없는 24시간 편의점으로 소설의 공간을 이동시킨 뒤에도, 전씨는 여전히 농촌에 남아 티켓다방을 기웃거리면서 시골 무지렁이들의 삶을 취재했었다.

그 취재기는 황석영씨의 '삼포 가는 길' 의 백화와 영달의 뒷 이야기이기도 했고, 이문구씨의 '우리 동네' 사람들의 1990년대 판이기도 했다.

'퇴역 레슬러' 는 전라도의 시골 섬 마을이 고향인 한 퇴역 레슬러의 고향방문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경제성장기 때 국민적 영웅이었던 프로 레슬러 김일 선수를 당장 연상하게 하지만, 기실 이 소설에서 김일 선수는 하나의 발상의 모티브로 작용할 뿐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김일 선수의 실제 이미지와 전씨가 소설 속에서 새롭게 창조한 퇴역 레슬러 사이에서 방황할 수도 있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실제를 가장한 허구를 통해 전씨가 이 소설에서 의도한 바를 눈치채게 된다.

한 때는 영웅이었지만 간병인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퇴역 레슬러는 기억 상실에 시달리며 고향을 방문한다. 고향에서 그는 영원한 신화 속의 영웅이다.

그를 위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그것은 50년대 일본으로 밀항하여 세계적인 레슬러가 된 그에게 고향 사람들이 베풀어준 호의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향에 대한 죄의식이 남아 있다.

그 죄의식의 근원은 무엇일까? 고향 후배의 증언으로, 또 자신의 기억의 회복으로 조금씩 밝혀지는 그의 과거의 행적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는 6.25 전쟁 전 야학 활동을 하던 선생과 동료를 좌익으로 밀고했고, 이웃 처녀를 주체할 수 없는 성욕으로 인해 능욕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밀항해서 레슬링의 영웅이 되었다.

밀고 당한 선생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면지(面誌) 를 집필하면서 과거의 좌우익 대립을 소상히 기록했지만, 그것은 영웅의 행적이 부정적으로 드러났다는 이유로 유지(有志) 들에 의해 묵살된다.

그는 "배가 고파서 여길 떠났소" 라는 말로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비난을 일축하지만, 회한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이 소설은 한 퇴역 레슬러의 부끄러움에 대한 과거 추적이 아니다. 정작 전성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시대가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영웅을 조작해 내고, 사람들은 그 영웅을 우상화하면서 그 신화의 그늘 속에 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영웅의 신화는 시대와 대중의 공동 조작의 결과인 것이다. 이때 조작된 영웅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기 상실감에서 살아간다.

영웅의 화려함 속에는 개인성의 희생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은 모든 우상이 된 영웅에게 바치는 진혼곡(鎭魂曲) 인 셈이다.

전씨의 소설에 대한 태도는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다. 그것은 그가 진중한 선배 작가들의 장인적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엄정한 작가 정신이 큰 물(大河) 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하응백 <문학평론가.국민대 문창대학원 겸임교수>

◇ 전성태 약력

▶1970년 충남 천안 출생

▶94년 '실천문학' 통해 등단

▶소설집 『매향(埋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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