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승자는 특별한 놈 위에 더 특별한 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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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호 21면

3년 전쯤 됐을 게다. 패션·뷰티 브랜드들이 보내오는 각종 보도자료에서 눈길 끄는 용어를 발견했다.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말 그대로 협업·합작·공동작업이란 뜻인데, 의류 회사가 사진가의 작품을 디자인에 쓰고, 화장품 업체가 현대 팝아티스트의 일러스트를 패키지에 넣는다는 식이었다. 용어도 낯설고 그 발상이 어찌나 신기한지 ‘얘기가 되는’ 소식이었다.

스타일 # : 콜라보레이션 경쟁

한데 요즘은 오히려 콜라보레이션을 안 한다는 브랜드를 찾는 게 뉴스일 듯싶다. 웬만한 브랜드라면 유명 아티스트·디자이너·연예인과 공동작업한 제품들을 앞다퉈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예 말을 줄여 ‘콜라보’라는 줄임말도 통용된다.

궁금했다. 콜라보레이션의 효과가 정말 얼마나 되는 건지. 브랜드들의 답을 모아보면 대략 ‘50대50’이었다. 신제품 출시가 아니어도 홍보용 이슈로 만들기 쉽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제품 자체가 매출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러다 지난 6월 ‘콜라보레이션’이란 말에 다시 귀가 번쩍 띄었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인 H&M에 관한 것이었다. H&M은 2004년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와 처음 콜라보레이션을 한 이래 베르사체, 랑방, 마르니 등 세계적 패션 하우스들과 손잡은 것으로 이미 유명한 터. 그런데 이번엔 그 파트너가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였다.

그가 누구던가. 의복 구성의 형식을 파괴하고 노출된 솔기, 마무리하지 않은 단 처리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발명한 패션계의 혁명가 아니던가. 게다가 10년 넘게 디자인 활동을 하며 얼굴 한번 노출하지 않았던 마르지엘라가 100개의 디자인을 가장 대중적이고도 저가인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뉴스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진 참조)

15일 전 세계 동시 판매를 앞두고는 더 불이 붙는 모양새다. 패션 피플 사이에선 애플의 신제품 출시도 아닌데 ‘새벽 몇 시부터 줄을 서느냐’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H&M 코리아 측에선 지난해 마르니와의 콜라보레이션 제품이 5시간 만에 완판된 것을 두고 ‘기록 경신’도 내심 기대한다. 이미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선 뉴욕에서 먼저 열린 팝업 스토어에서 흘러나온 물건이 제값보다 비싸게 팔리고 있으니 세계적인 화제임엔 분명하다.

이를 지켜보며 H&M의 영민한 전략이 짐작됐다. 일단 희소성. H&M의 파트너는 패션계의 거물급들에게 매년 러브콜을 보내왔다. 시간이 갈수록 상상 초월의 인물들이 나타나자 이제는 다음 콜라보레이션 디자이너에 대한 예측이 심심찮게 나온다. 내년엔 ‘톰 포드’가 낙점됐다는 루머는 어쩌면 H&M이니 할 수 있다는 소비자들의 기대 아닐까. 이는 국내의 몇몇 콜라보레이션과 비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방 브랜드부터 아웃도어·카메라까지 업체들이 소수의 디자이너·작가를 서로 돌아가며 콜라보레이션에 참여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이런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사고 싶어질 리 만무하다.
또 하나는 지속성. 콜라보레이션을 ‘정례화’시킨 것이다. 한번 터뜨리고 마는 ‘충격 요법’으로는 더 이상 브랜드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고 ‘충성 고객’을 만들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브랜드는 매년 때가 되면 영화제 작품상이라도 되는 양 끝까지 콜라보레이션 상대를 극비에 부치는 ‘신비주의 전략’을 쓰며 고객들의 마음을 애태우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H&M의 콜라보레이션이 매력적인 이유는 가격일 터다.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디자이너의 옷을 80~90% 할인된 가격에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물론 H&M의 보통 제품과 비교하면 코트 하나에 20만~30만원씩 되는 가격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명품과 SPA 브랜드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시장에서 딱 그 절충안이 등장한 셈. 그간 ‘양극화’ 사이에서 길을 잃고 지갑을 닫은 이들에겐 기회가 온 것이다. 결국 특별한 물건을 만든다는 콜라보레이션, 이젠 그중에서도 더 특별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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