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철 판화전 '접어둘수 없는 이야기'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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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살이 가득한 할머니가 힘없는 눈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흰머리는 부스스하고 눈가와 볼.콧잔등은 크고 작은 주름으로 채워져 있다. 단순히 나이먹은 할머니의 얼굴만은 아니다.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초상에는 어딘지 비극적인 느낌이 감돈다. 윤곽선 여기저기가 겹쳐서 접혀 있어 얼굴 형체가 이지러진 탓이다. 어쨌든 다른 세상,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런데도 관객의 시선을 무겁게 붙들고 있다. 높이 1m가 넘는 얼굴의 크기, 검은 바탕에 회색의 선으로만 표현된 윤곽, 납판이라는 재료의 성질에서 오는 무게와 힘일 것이다.

서울 견지동 동산방 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정원철(41.추계예대 판화과) 교수 초대전 '접어둘 수 없는 이야기' 는 무겁고 진지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을 담은 판화전이라서가 아니다. 뛰어난 초상화가가 세월의 얼굴을 정면으로 그렸을 때 드러나는 힘과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구겨진 삶' 연작. 위안부 할머니의 회고록을 배경으로 납판에 찍은 초상판화를 다시 군데군데 접어서 일그러뜨렸다.

작품은 그늘진 기억의 일부를 드러내는데 치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굴절된 역사를 우리는 현시점에서 어떻게 느끼고 공유하는가를 묻고 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 그 준엄한 물음은 '타인의 간난에 찬 삶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의 힘' 을 믿는 작가는 '사실성' 이란 굳이 각색을 통해 만들지 않아도 스스로를 드러내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을 뿐인 판화가 관객을 진지하게 잡아끄는 것은 이 믿음을 기초로 한 깊은 탐색의 결과일 것이다.

'다가가기' 연작은 왼쪽에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모사하고, 오른쪽에 당사자의 얼굴이나 주름투성이 손을 붙인 작품들이다. 당사자들이 인쇄된 형상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추억과 삶의 회한을 지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절로 느끼게 하는 구성이다.

'접어둘 수 없는 이야기' 연작은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예술과 인권' 에 출품했던 판화를 종이가 아닌 납판에 새로 찍고 접은 자국을 넣는 등 변화를 준 것이다.

작가는 "일본의 범죄를 고발하기 보다는 우리 사회 자체의 문제를 드러내려는 게 제작의도" 라면서 "이기주의나 집단이기주의를 벗어난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중요하다는 것을 전달하려고 했다" 고 설명했다.

그는 압축 고무판을 치과용 드릴로 긁어 그 원판을 납판에 흑백으로 찍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초상판화에 납판을 사용한 것은 처음" 이라는 그는 "무거운 금속성, 회색의 톤이 작품 성격에 맞는다" 고 자평했다.

작가는 생태와 인권 등 '사람살이의 전체적인 문제' 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특히 초상판화에 독보적인 경지를 이뤘다는 평을 받고있다. 서울 국제판화비엔날레 우수상, 서울 국제드로잉 비엔날레 공모부문 대상, 폴란드 크라코프 국제판화트리엔날레 우수상 등을 수상했으며 이번이 열 번째 개인전이다.

02-733-6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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