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빛바랜 IMF 조기졸업

중앙일보

입력

다음주면 한국이 3년8개월 만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서 완전히 졸업하게 된다.

정부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IMF에서 빌렸던 1백95억달러 가운데 잔액 1억4천만달러를 당초 계획보다 2년9개월 앞당겨 오는 23일에 갚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런 소식은 정치고 경제고, 무엇 하나 제대로 풀려가는 게 없는 무덥고 답답한 시기에 모처럼 전해진 '낭보(朗報)' 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돈을 빌리는 대신 IMF에 넘겨줘야 했던 경제 주권(主權)을 비로소 되찾게 됐다는 의미가 크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빚이 얼마나 무서운지, 국가 경영의 리더십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환란(換亂)직후의 절망적인 상황을 돌이켜보면 국가적인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이며, 위기 극복을 주도한 국민의 정부도 국내외의 갈채를 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IMF체제 조기 졸업 소식을 접한 국민의 반응은 한마디로 시큰둥하다. 아마도 최근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각종 경제 지표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는데다 피부로 느끼는 경제 상황 역시 지난 세월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나라는 정쟁으로 갈가리 찢어졌고, 정부는 제 구실을 못하고 있어 국민의 피로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갈수록 사그라지고 있다.

당장 하반기 경기전망 자체가 불투명하기 그지 없다. 수출과 설비 투자가 급감한데다 최근에는 소비마저 위축될 조짐을 보이면서 3분기 경제성장률은 2%대가 분명하고, 연간 성장률마저 2%대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전망까지 제시되고 있다. 이러다가 제2의 IMF 체제를 겪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번지고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IMF체제 조기 졸업은 축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이나 청와대만 쳐다보는 행정부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 위기는 되풀이되지만 똑같은 위기를 다시 겪는 나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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