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구성애씨가 읽은 심훈의 '상록수'

중앙일보

입력

7년 전 뇌출혈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입관할 때 나는 처음으로 보았다.

김구 선생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시던 아버지가 불인두 지짐을 당했던 허벅지의 상처를 시신에서 확인한 것이다. 번들번들하게 엉겨붙은 고문의 흔적은 죽음과도 상관없는 것이다.

피를 타고난지 모르겠다. 나에겐 언제부터라 할 것 없이 '민족' 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다수 '민중' 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땀흘려 일하는 그들에게는 억울함이 있었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억울한 것은 고쳐야 하는데 즐겁게 웃으면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해 준 책이 있었다.

『오성과 한음』이다. 농담도 아니고 유머와도 또 다른 해학으로 얻은 삶의 진리였다. 해학은 단순한 웃음을 주는 게 아니다.

통찰력과 대안을 갖춘 속의 낙관이라고 나는 본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은 양반의 위선과 허세를 꾸짖는 어떤 상황에서 한음이 일갈한 얘기다. "양반은 똥에 갓을 쓰고 나오나□"

고등학교 땐 나름대로 뜻을 세워야 했다. 우연하게 잡아 든 심훈의 『상록수』는 순수한 소녀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나도 채영신처럼 농촌에서 계몽 운동을 하리라. 꼭 박동혁 같은 신랑을 만나리라.

그리고 운동을 하면서 사랑을 나누리라. 그렇다. 나의 아이템은 계몽교육이었다. 간호대학을 간 것, 대학 4년 내내 여덟 번의 농촌 활동을 간 것, 드디어 농민 운동을 하는 남편과 연애해 결혼한 것은 다 『상록수』 덕분이었다.

결혼 생활은 모든 것을 재정립하도록 만들었다. 우선 여성으로서 남성을 알아야 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을 비롯해 서양의 여성학을 독파했다.

지난한 싸움이었다. 가출하기 열 번. 드디어 해방과 지혜를 얻었다. 특히 프랑스 여기자들이 쓴 『하늘의 절반』(동녘) 은 인생관.남성관.여성관을 바꿔 놓았다. 남성은 그냥 하늘이지만 여성은 땅을 기반한 하늘이었다. 더 넓고 높았다. 차원이 달라졌다. 남성을 사랑하게 되었다. 할 일이 많아졌다.

요즘 특별히 푹 빠져드는 책은 없다. 넓은 우주와 파동 속의 시간. 4차원을 넘는 삶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돕는데 필요한 책이면 모두 순간의 안내자가 되는 것이다.

구성애 아우성센터 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