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일방적인 고통은 거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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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본선 32강전)
○·이세돌 9단 ●·구리 9단

제10보(114~121)=바둑에서 ‘패’라는 녀석은 참 오묘한 존재지요. 패가 연상시키는 이미지들도 복합적입니다. 패는 기본적으로 ‘거래’이고 ‘계산’입니다. 그러나 일확천금이 있고 패가망신이 있으며 죽은 것이 살아나고 산 것이 죽는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나지요. 해서 패는 모험과 선혈, 악녀의 유혹 같은 이미지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패 중에는 거저먹기란 의미를 지닌 ‘꽃놀이패’도 있지요. 내 쪽은 져 봐야 가렵지도 않은데 상대는 지는 날엔 목숨을 내놔야 하는 그런 패 말입니다.

 아무튼 이 판은 패가 주제인데요. 구리 9단이 115 쪽의 팻감으로 흑▲에 두면서 이 판에 ‘양패’가 등장했습니다. 패가 2개니까 백은 이제 어느 한 쪽은 반드시 지게 됐습니다. 과연 어느 쪽을 포기해야 할까요. 대마가 죽으면 끝장이니까 대마부터 살리고 봐야 할까요.

 ‘참고도’ 백1로 이으면 대마는 삽니다. 그러나 흑2를 당하면 좌상의 백진이 송두리째 흑진으로 변하고 만다는 게 문제입니다. ‘참고도’는 판 전제를 둘러봐도 백집은 말랐고 흑집은 통통해 앞길이 두고두고 지옥입니다. 상대는 편한 의자에 앉아 있는데 나만 가시밭길을 헤맨다면 그 바둑은 승패를 떠나 너무 일방적이고 고달픈 여정이지요. 승부사는 그런 길은 절대 거부합니다.

 이세돌 9단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114, 116으로 연타했습니다. 115, 117을 당해 대마는 삶이 암담해 보입니다만 구경꾼들은 이세돌이니까 무슨 수가 있겠지 하고 기대해 봅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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