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10대산업 키우자] 22. 기업하기 좋은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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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를 겪은 국내기업들이 제살을 도려내고 투명경영의 토대를 다지며 새 사업을 탐색하고 있지만 아직 몸을 낮추고 있다.

기업만 잘해선 경쟁력을 갖추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아일랜드에 진출한 국내기업의 경험을 통해 선진국의 기업경영 환경을 알아봤다.

1976년 외환위기를 겪은 영국. 87년 국가부도 위기에 몰린 아일랜드.

이들 두 나라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외국기업을 대거 유치하고 노사안정을 꾀해 벼랑 끝에 놓인 경제를 되살린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영국은 자국에 공장을 지어 근로자를 고용하는 외국기업에 대해선 칙사대접을 한다. 정부관리나 정치인 역시 기업유치 전위대라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LG전자 영국법인의 이권호 재무담당 상무는 "규모 있는 공장을 건설하는 외국기업의 투자내용은 총리 관저에서 공식 발표하고 기공식 현장엔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서기도 한다" 며 "정치인의 생명은 지역주민의 고용을 얼마나 늘렸느냐에 달려 있다" 고 말했다.

LG전자가 영국 웨일스에 모니터 공장을 지을 때의 일이다. LG 투자조사단이 현지를 방문했을 때 지방정부의 개발청 담당관은 LG주재원이 살 집과 자녀가 다닐 학교까지 미리 챙겨두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붙여 살림 장만과 하수도 고치는 일까지 거들어주기도 했다.

李상무는 "웨일스의 기업유치팀은 기업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로 짜여 있어 기업이 가려운 곳을 잘 알고 있었다" 며 "공장건설 때까지 쓸 사무실 공간은 지역개발청 안에 공짜로 마련해 줬다" 고 덧불였다.

기업유치에 담당관리만 나서는 것이 아니다. 국내 최고경영자가 투자탐색차 영국을 방문하면 공항책임자가 현지 주재원과 함께 공항 활주로까지 나가 영접하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고 한다.

삼성전자 유럽지역 법인을 총괄하는 김영조 영국법인장(전무)은 지난달 부임 후 현지 경제관련 고위 인사와의 회동 때 놀랐다고 한다. 윈야드에 있는 모니터 공장의 생산라인 중 일부를 고가제품 생산라인으로 바꾼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그는 이를 소상히 알고 있었고 더 도울 일이 없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金전무는 "외국기업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고 말했다.

그는 "공장을 건설할 때 투자기업이 한국처럼 담당관리를 일일이 만나지 않아도 된다" 며 "현지 정부가 관련부서 책임자를 한꺼번에 모아 도장을 찍은 서류를 받으면 그것으로 만사 OK" 라고 말했다.

런던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중소 의류무역업체를 운영하는 권석하 사장은 현지에서 10년 동안 사업을 하는 동안 행정관료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관청과 상대할 일은 대부분 우편으로 처리했다.

그의 회사를 찾아온 세관원도 창고 안의 재고를 조사하러 왔고 기업에 신세를 안지려고 도시락과 커피를 싸가지고 왔다고 한다.

아일랜드도 영국과 비슷하다. 현지에 투자한 외국기업이 겪는 경영애로 사항은 총리집무실로 즉보된다. 애로사항은 담당부서 관리들이 한조가 돼 풀어준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경제위기를 맞기 전까지 노사분규가 극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LG전자 영국법인은 지난해 일부 품목을 감산하면서 이를 노조에 통보했는데 노조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현지 김종훈 판매담당 차장은 "합당한 감산조치는 노조가 나서서 근로자들을 설득한다" 며 "영국 근로자들 사이엔 당장 급여가 줄어드는 것보다 회사가 어려워져 일자리를 잃는 것을 더 걱정한다" 고 설명했다.

특히 영국은 외환위기 이후 노동법을 대폭 뜯어고쳐 근로자들이 일주일에 40시간씩 근무하고 있다. 이는 유럽국가 중 가장 많은 시간이다.

아일랜드는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 노사분규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아일랜드는 87년 임금인상률을 3년 동안 연간 3% 이내로 묶었다. 대신 근로자의 세금을 줄여줬다.

정부는 공공기업의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정부의 예산을 20% 줄이는 등 고통을 분담했다. 이 결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내로라하는 외국 정보기술(IT)기업을 1천2백개 이상 유치해 경제 재건에 성공했다.

최고 17%에 이르렀던 아일랜드의 실업률은 지난해 2%대로 떨어졌다. 실질 경제성장률은 10%를 웃돌았다.

런던 ·더블린 ·홍콩=고윤희 기자 y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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