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도 철거 말아달라는 제주도 2층 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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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중문 해변에 있는 멕시코 거장 리카르도 레고레타의 작품 ‘카사 델 아구아’. 모델하우스와 갤러리 용도로 만든 2층짜리 부속 건물이다. [사진 수류산방]

제주도 서귀포 해안에 지어진 한 ‘임시건물’의 철거 여부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멕시코 정부가 철거에 반대하면서 외교 문제로 떠올랐고, 지난주 국정감사에서도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 당국자 간에 설전이 이어졌다. 서귀포 중문관광단지 국제컨벤션센터 뒤편 언덕에 있는 ‘카사 델 아구아’(스페인어로 ‘물의 집’이란 뜻)가 논란의 대상이다.

레고레타

 카사 델 아구아는 멕시코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인 리카르도 레고레타(1931∼2011)의 유작이다. 이곳에 신축 중인 호텔·레지던스의 설계를 맡은 레고레타가 2009년 3월 모델하우스와 갤러리 용도로 만든 2층짜리 부속 건물이다. 연면적 1279㎡로 1층엔 갤러리를, 2층에는 레지던스의 모델하우스를 배치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큼직큼직한 창으로 중문 해안의 그림 같은 풍경이 들어온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시시각각 건물 안의 빛과 그늘, 색상이 변하게 설계돼 있다. 송이(화산 분출물의 제주도 말)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외벽의 적갈색이 주변 바다의 푸른색과 대조를 이룬다. 워낙 유명한 거장의 작품이다 보니 이 건물 하나를 보기 위해 일부러 제주도를 찾는 건축학도들이 줄을 잇는다는 게 관리인 김성복(58)씨의 설명이다. 17일 현지에서 만난 건축사 김희옥(50·여·서울)씨는 “건물 내부로 풍경을 끌어들인 것과 풍부한 공간, 정교한 디테일이 돋보인다. 빛이 컬러와 함께 떨어지는 느낌이 인상적이다”고 평했다.

 이토록 호평을 받는 이 건물은 법과 규정의 잣대로만 따지면 이미 철거됐어야 할 ‘불법건축물’이다. 해안으로부터 100m 이내에 영구 건축물 설치를 금지한 규정에 따라 처음부터 임시건물로 지어졌고 그 기한은 지난해 6월로 끝난 상태 다. 카사 델 아구아는 해안선에서 35~8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서귀포시와 제주도는 규정에 따라 철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예외를 적용하면 선례가 생겨나 법규가 유명무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또 설계자 도 원래부터 일정 기간 후 철거하는 것을 전제로 세웠다는 논리도 있다. 오정훈 제주도 관광정책과장은 “문제의 건물은 레고레타가 호텔 을 설계할 때 철거 후 조경을 하도록 했던 곳”이라 고 말했다.

 이 건물이 남의 땅 위에 서 있다는 점도 일을 꼬이게 하는 원인 중 하나다. 원래 카사 델 아구아를 지은 ㈜JID는 자금난으로 호텔 사업권을 부영주택에 넘겼다. 부영주택은 건물을 철거하고 부지를 조경공간으로 활용하려 한다. 존치할 경우 카사 델 아구아가 차지하는 면적만큼 호텔·레지던스의 건폐율·용적률이 초과돼 준공검사를 받을 수 없다 .

 제주도와 서귀포시는 이달 초 강제철거를 하려는 방침을 세웠다가 막판에 유보했다. 건축계·문화계가 ‘문화 파괴행위’라며 반발한 데다 멕시코 정부가 보존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이선화 제주도의회 의원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치하려 애쓰는 세계 건축거장의 작품을 법규 만 따져 철거하려 하는 현실이 부끄럽다”며 보존운동을 펼치고 있다. 마르타 오르티스 데 로사스 주한멕시코 대사는 외교통상부와 제주도 현지를 방문해 철거방침의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고심 끝에 제주도는 카사 델 아구아를 레고레타의 설계도 그대로 다른 곳에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이 방안 역시 문화계는 반대하고 있다. 다른 곳에다 옮겨 지을 경우 주변 지형·풍광과 어우러지게 만든 레고레타의 설계 의도가 훼손된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이 건물엔 전기와 수도가 끊긴 상태다. 관리인 김성복씨는 “외국의 건축가나 예술가들도 와 보고 감탄사를 쏟아내는 건물이 아예 철거될지 모른다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리카르도 레고레타(1931∼2011)=환경과 사람·풍토를 반영하는 설계로 유명하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 심사위원을 10년 동안 지냈다. 전미건축가협회 금메달과 국제건축가연맹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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