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빌러비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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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들녘, 1만3천7백원

자신처럼 혹독한 고통을 받게 될까 두려워 딸을 죽인 엄마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게다가 아이를 죽이고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끝내 자기만 살아남았다면.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토니 모리슨(72)의 '빌러비드'(원제 Beloved)는 그 딸과 어머니의 기억과 모진 생을 위로하는 소설이다. 물론 그 엄마는 흑인 노예였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미국 남북전쟁을 전후한 시기다. 노예농장에서 도망친 엄마는 탈출 하룻만에 백인들에게 발각돼 그런 일을 저질렀다.

그런 면에서 '빌러비드'는 현대 미국의 풍요로움 이면에 가득찬 노예제의 처참함을 고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6천만 명 그리고 그 이상"이란 헌사가 첫 장에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88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사건을 나열하고 서술하는 단순한 고발문학을 뛰어넘는다. 노예제의 폭력성과 모성애를 겹쳐 놓음으로써 어느 한 시기에 관한 이야기를 뛰어넘어 인간 고통의 심연에 닿기 때문이다.

소설은 흑인 여성 시이드의 회상과 현재의 삶이 어우러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남북전쟁이 끝난 어느날 시이드는 '계획'이란 말을 입에 되뇌어 본다. 계획이라. 흑인 노예에게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흑인 여성들은 자식을 적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백인 남성의 일상적 강간 아래 아이의 아버지는 매번 달랐다. 아이들은 어느날 이자 대신 건네지고, 죽은 채 강물에서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

생은 어떤 고통보다 더 세게 주변을 흘러갔다. 버려지거나 빼앗기거나 죽임을 당한 아이들 대신 새로 태어난 아이를 키우려면 자식을 더 적게 사랑해야 하는게 그들의 철칙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시이드는 이제 몸 뉘일 방 한 칸을 마련했다. 그러던 어느날 거리를 떠돌던 흑인처녀 '빌러비드'(나의 사랑)가 시이드의 집 앞에 나타난다. 죽은 딸의 환영이듯 꿈처럼.

이제 이들은 한판 씻김굿을 벌이기 시작한다. 웅얼거리는 빌러비드와 과거를 떠올리며 몸을 벌벌 떠는 시이드. 상처의 치유는 기억의 복원에서 시작된다.

흑인들이 겪은 집단적 고통이 하나둘씩 몸을 드러낸다. 그렇게 해서 사랑받지 못한 '빌러비드'는 그 단어 그 뜻 대로의 사랑받은 사람이 됐다. 마찬가지로 시이드는 눈물을 흘렸고 기억을 되찾았다.

그렇듯 토니 모리슨의 시적인 문체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가득차 있기에, 장장 4백50쪽이 넘는 이 소설은 내내 독자들을 전율에 빠뜨린다.

책을 읽고 난 하룻밤새 그 고통을 함께 하고 그 고통보다 더 강한, 삶의 어쩔 수 없음에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또한 6.25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 '빌러비드'는 역사의 질곡을 문학이 어떻게 다뤄야하는가를 정확히 알려준다. 문학은 철학.역사학.사회과학 등 여타 학문과 어떻게 다른가.

철학이 모순을 지양해 절대 진리를 찾아가고 사회과학이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 주목한다면 문학은 삶의 어쩔 수 없음 그 자체를 보듬는다.

아픔 일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아픈 사람 그 자체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인물과 독자 모두의 심장에 더운 피가 흐르게 하고 다시는 상처가 반복돼서는 안된다, 살아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게 된다.

'빌러비드'는 미국의 명 토크쇼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됐다. 또 80년 대 후반에 번역돼 나왔다 절판된 바 있으며 이번에 새로 번역해 재출간됐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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