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20년’이라는 일본, 거침없는 해외 M&A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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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의 늪에서 계속 허우적대고 있지만 요즘 일본 기업들의 행보는 사뭇 다르다. 해외로 나가 기업 사냥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먹잇감이 될 만한 해외 기업이 보일라치면 거침없이 사들인다. 20여 년 전 버블 경제 절정 때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다 낭패를 봤다. 그러나 이번엔 다를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인다. 주요 매수 대상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급매물로 나온 미국과 유럽의 통신·정보기술(IT)·광고·의약품 회사들이다.

 16일 일본 최대의 기업 인수합병(M&A) 컨설팅 회사인 레코프에 따르면 올해 1~9월 일본 기업의 외국 기업 M&A는 364건으로 역대 최대였던 90년 같은 기간의 실적을 앞질렀다. 전날 확정된 소프트뱅크의 미국 3위 무선통신회사 스프린트에 대한 인수까지 합하면 금액으로 6조5609억 엔(약 92조7500억원)에 달한다. 소프트뱅크의 스프린트 인수액은 1조5709억 엔(약 22조원)으로 일본 기업의 M&A 역사에서 셋째로 큰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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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는 2006년 일본다바코산업이 2조2530억 엔에 사들인 영국의 다국적 담배회사 갤러허였고, 2위는 소프트뱅크가 같은 해 1조9172억 엔에 사들인 영국 통신회사 보다폰 일본법인이었다. 지난해에는 다케다(武田)약품공업이 1조1086억 엔에 스위스 제약사 나이코메드를 사들였다.

 이처럼 일본 기업이 기업 사냥을 위해 해외로 자꾸 나가는 것은 저출산·고령화로 일본 내수시장이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 시장을 뚫기에는 현지 기업을 통째로 사들이는 M&A만큼 좋은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프린트 인수 발표 기자회견에서 손정의(55·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도 이런 위기감이 배어난 발언을 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당장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에 나서지 않으면 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때마침 자금 조달 여건이 좋아진 것도 해외 M&A에 날개를 달게 했다. 유럽 재정위기에 따른 급격한 엔고 현상 덕분에 매물로 나온 글로벌 기업들을 사들이는 비용이 크게 줄었다. 게다가 여유 자금이 넘치는 일본의 금융회사들은 해외 M&A에 필요한 실탄을 공급하겠다고 앞다퉈 나서고 있다. 일본은행(BOJ)의 제로금리, 양적 완화 정책에 덕분에 은행들은 연 1%대의 초저금리로 대출 세일을 벌이는 상황이다.

 손 회장도 일본의 3개 대형 은행으로부터 스프린트 인수에 필요한 1조6000억 엔을 어려움 없이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차입에 의존하는 M&A에 대한 경계 목소리도 높다. 소프트뱅크는 스프린트 인수로 부채가 3조9000억 엔(55조원)으로 늘어나는 데 따른 우려로 최근 주가가 20% 정도 폭락하기도 했다. 주가는 16일 반등(9.6%)했지만 신용평가사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바뀌지 않았다. 무디스는 소프트뱅크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할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80년대 일본 기업들이 미국 기업과 부동산을 싹쓸이식으로 사들였다가 큰 손해를 보고 철수했던 실패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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