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켄 특집] (4) 오리올스의 고독한 영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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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립켄 시니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운이었다. 그는 오리올스 산하의 조직 내에서 30년 동안 묵묵히 자기 일을 충실히 수행한 끝에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했으나, 처음으로 빅리그에서 지휘봉을 잡은 그에게 맡겨진 것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팀이었다. 특히 투수진은 실로 엉망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주니어'의 동생인 2루수 빌리 립켄은 빅리그 승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립켄 시니어는 자신의 아들들을 특별히 우대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천명하였고, 빌리는 일단 트리플A 로체스터에서 1987시즌 개막을 맞이하였다. 그는 결국 시즌이 중반에 접어든 뒤 빅리그에 데뷔하였다. 가족 3명이 한 팀에 몸담게 된 것은 역사상 최초였다.

물론 그들에게 이를 자축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오리올스는 시즌 초반에는 그럭저럭 중위권을 유지했으나, 그 후 급격히 추락하였다. 시즌이 끝났을 때, 동부지구 순위표에서 오리올스의 아래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만이 있었다. '주니어'는 27홈런과 98타점을 올렸지만, 팀의 추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즌이 끝난 뒤, 새로 단장이 된 롤런드 헤먼드는 여러 차례의 트레이드로 팀 쇄신을 시도하였다. 물론 그도 당장 에 우승을 노리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년도의 치욕은 어느 정도 씻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이다.

그러나 1988시즌에 오리올스를 맞이한 것은 '재앙'이었다. 팀이 개막전을 시작으로 내리 6경기에서 패한 뒤, 립켄 시니어는 해임되었고 1960년대 후반 오리올스의 간판스타였던 프랭크 로빈슨이 새로 감독을 맡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오리올스는 개막 후 21경기에서 21패를 당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기록을 남겼다.

'주니어'는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 정도로 악재가 겹치면, 누구든 상황이 더 이상 나빠질 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모든 것이 가면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립켄은 시즌 초반의 부진을 어느 정도 떨쳐내고 23홈런과 81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하였으나, 결국 오리올스는 이 해에 107패를 당하며 최하위를 차지하였다. 립켄은 이 시즌을 마친 뒤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어, 자신에게 성취감을 안겨 줄 수 있는 강한 팀으로 갈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오리올스에 남기로 결정하고 4년간 840만 달러의 조건으로 사인하였다.

1989년 립켄은 21홈런과 93타점을 기록하여, 유격수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8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하였다. 이 해에 오리올스는 전년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며 시즌 중반까지 지구 선두를 유지했으나, 막판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에게 추격을 허용하였고 결국 2게임 차이로 지구 패권을 양보했다.

립켄은 1990년 6월 12일, 과거 1307경기에 연속으로 출장했던 에버릿 스캇을 제치고 이 부문 역대 2위에 올랐다. 팬들은 이제 이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이 해에 95경기 연속 무실책으로 역대 유격수 중 이 부문 최고기록 보유자가 되었고, 시즌을 통틀어 단 3개의 실책만을 범하였다.

1991년 립켄은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는 이 해에 .323의 타율을 올렸으며, 34홈런과 114타점을 기록하여 이 모든 부문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을 수립하였다. 또한 총루타수(토털베이스)에서는 리그 수위에 올랐으며, 로열스의 대니 타터불에 이어 장타율 부문 2위에 올랐다. 그는 수비율에서도 2년 연속으로 아메리칸리그 유격수 중 수위에 올랐으며, 이 해에 처음으로 골든글러버가 되었다.

이 시즌에 오리올스는 부진을 보였지만, BBWAA는 홈런과 타점 부문 타이틀을 모두 거머쥔 타이거스의 세실 필더를 제치고 립켄을 리그 MVP로 뽑았다. 이로써 립켄은 유격수로서 올스타전과 정규시즌의 MVP를 모두 휩쓰는 대기록을 남겼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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