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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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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프랑스 파리에는 퇴근길 운전자를 괴롭히는 트럭이 있다. 쓰레기 수거 차량이다. 뒤에 매달린 두세 명의 환경미화원이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면서 집집마다 내놓은 커다란 쓰레기통을 끌고 와 내용물을 트럭에 쏟아 붓고 다시 제자리로 옮겨놓는다. 트럭은 끊임없이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길은 좁은데 이 차량은 커서 추월이 쉽지 않고, 이미 꼬리를 문 차량들 때문에 후진으로 피해가는 것도 대개 불가능하다. 100m 이동에 15분쯤 걸리는 이 골목길 정체에 걸리면 우회로를 만날 때까지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따라가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애를 태워봐야 별 소용이 없다.

 쓰레기 수거는 하필 분주한 저녁 7~9시 사이에 주로 이뤄진다. “차도, 사람도 없는 새벽에 하면 좋을 텐데….”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어 알아보니 의미 있는 사연이 있었다. 수거작업은 오랫동안 자정 이후에 진행됐다. 그런데 환경미화원들이 근무시간 변경을 요구했다. “낮과 밤이 뒤바뀌어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없고 가족까지 피해를 본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도 밤엔 배우자와 함께 자고 싶다”는 구호가 낭만적인 파리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쓰레기 수거 시간이 앞당겨졌다.

 “영국에선 무단횡단해도 되나.” 한국에서 출장 온 지인들에게서 자주 받는 질문이다. 보행자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길을 건너는 바람에 ‘따라가기도 뭣하고, 서 있기도 뭣한’ 뻘쭘한 상황을 이미 겪었음을 뜻한다. “해도 된다. 신호 안 지켜도 되고, 횡단보도 아닌 곳에서 그냥 건너도 된다. 불법도 아니다. 경찰관 앞에서 해도 탈 안 난다. 다만 차량 주행 방향이 한국의 반대이니 양쪽을 잘 살펴봐야 한다”고 답을 해준다. 그러면 보통 “위험하지 않나”라는 후속 질문이 따른다. “선진국 맞나”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사실 영국 교통법에 무단횡단 금지 조항을 넣자는 목소리도 있다. 주로 보험업계 또는 관련 단체들이 “특히 야간에 횡단자 사고가 많아 전체적으로 보험료가 올라간다”며 이런 주장을 한다. 그런데 시민들은 “차가 오지도 않는데 횡단보도까지 길을 둘러가야 하고, 멍하니 신호등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며 콧방귀를 뀐다. “사람이 우선이고 차는 나중이다”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슬로건 ‘사람이 먼저인 세상’, 멋지다. 그런데 그 신세계엔 파리의 쓰레기 수거처럼 불편함과 비효율이 따를 수밖에 없다. 영국의 도로 횡단처럼 사회적 비용이 클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과연 이런 불편·저효율·고비용을 감수할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 좀 의심스럽지만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문 후보의 당락과 무관하게 이 정신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우리도 언젠간 환경미화원의 삶의 질을 진지하게 걱정하는 매력적인 나라가 돼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