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키즈 보아라 … 박세리, 한 수 지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18번 홀 그린. 박세리(35·KDB산은금융)가 챔피언 퍼트를 홀컵에 떨어뜨렸다. 마지막 홀을 보기로 마친 박세리의 얼굴에 살짝 아쉬운 표정이 스쳐갔다. 하지만 이내 “박세리”를 연호하는 갤러리에게 환한 웃음으로 인사했다.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에게는 동료들이 샴페인이나 맥주를 퍼붓는 세리머니를 한다. 이날도 후배들이 샴페인을 들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박세리의 머리에 샴페인을 붓지 못했다. 모두들 쭈뼛쭈뼛하며 박세리 근처에 샴페인을 흘릴 뿐이었다. 그만큼 후배들에게 박세리는 크고 무서운 존재다. 박세리가 ‘박세리 키즈’에게 한 수 가르쳐 줬다. ‘골프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필드 레슨을 하는 것 같았다.

 박세리가 9년 만에 국내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박세리는 23일 강원도 평창 휘닉스파크골프장(파 72)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KDB 대우증권클래식에서 합계 16언더파로 우승했다. 16언더파는 김하늘 등 3명이 이 골프장에서 기록한 54홀 코스 레코드를 4타나 줄인 신기록이다.

 1타 차 단독 선두(9언더파)로 출발한 박세리는 2번 홀(파5)에서 세 번째 샷을 홀 1m에 붙여 가볍게 버디를 잡아냈다. 4번, 6번 홀에 이어 9번 홀부터 11번 홀까지 5개 홀에서 2m 안팎의 버디를 잡아냈을 만큼 샷감이 좋았다. 드라이브 샷도 위협적이었다. 이미림(22·하나금융)·배희경(20·호반건설)과 동반 라운드를 한 박세리는 매 홀 10야드 이상 드라이브 샷을 더 날려 보냈다. 배희경은 KLPGA 투어 드라이브 샷 비거리 부문 3위(256.18야드), 이미림은 9위(253.58야드)에 올라 있는 장타자들이다.

 퍼트도 독보적이었다. 박세리는 14번 홀에서 6m 정도 되는 멀찍한 버디 퍼트를 넣어 버렸다. 16번 홀에서도 3m짜리 버디를 성공시켰다. 이미림과 배희경은 박세리의 기에 눌려 각각 1타와 4타를 잃고 공동 11위와 공동 14위까지 밀려났다. 이미림은 “샷은 물론 코스 매니지먼트, 멘털 등 모든 것이 놀라웠다”며 “특히 너무 쉽게, 편하게 공을 치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고 했다.

 박세리의 국내 대회 우승은 2003년 5월 MBC 엑스캔버스여자오픈 이후 9년4개월 만이다. KLPGA 투어 통산 8승째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 거침없이 우승했던 박세리는 2004년 슬럼프에 빠진 이후 우승 횟수가 많지 않았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세 차례 더 우승했지만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도 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우승은 의미가 크다. 박세리는 “언제 우승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실력 있는 후배들이 많아져 우승하기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며 “한국 팬들은 화끈하다. 잘할 땐 열성적으로 응원해 주지만 못할 땐 혼을 내기도 한다. 오랜만에 국내 팬들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게 돼 미국에서 우승한 것보다 더 기쁘다”고 했다.

 허윤경(22·현대스위스)은 13언더파로 박세리에게 3타 차 뒤진 준우승을 차지했다. 3주 연속 준우승의 상승세다. 최나연(25·SK텔레콤)은 11언더파 3위로 대회를 마쳤다.

평창=이지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