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B ‘치킨게임’ … 함께할 수 없는 두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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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左), 바이트만 독일중앙은행 총재(右)

‘심판의 날(Judgment Day)’. 미국 월가가 오는 6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날 유럽중앙은행(ECB) 통화정책회의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다. ECB가 스페인·이탈리아 국채를 사들일지 여부가 그날 결판난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마리오 드라기(65) 유럽ECB 총재와 옌스 바이트만(44)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 총재의 운명도 그날 회의 결과에 달렸다. 드라기는 국채 매입 찬성을, 바이트만은 반대를 외치며 맞서고 있다. 마주 달리는 열차와 같다. 둘 중 한 사람은 치명상을 입고 자리를 떠날 수도 있다.

 두 사람은 언론을 통해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바이트만은 지난달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드라기의) 국채 매입이 마약만큼 중독성이 강한 정책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또 ‘스페인·이탈리아 국채 금리가 일정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자’는 드라기 제안에 대해 “위경련을 일으킬 만한 아이디어”라고 혹평했다.

 드라기는 발끈했다. 그는 독일 시사주간 디차이트(Die Zeit) 8월 30일자에 ‘유로화의 미래:변화를 통한 안정’이란 기고문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바이트만을 되받아쳤다. 그는 “ECB의 존재 이유인 물가안정을 위해 (위기 순간엔) 파격적인 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독일의 현재 번영이 유로화 덕분이라는 걸 알고 유로 체제의 닻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개 설전은 중앙은행가들 사이에선 아주 드문 일이다. 그들은 ‘돈의 신전’을 지키는 사제라고 자부한다. 논쟁을 벌이더라도 파열음이 세속에 알려지지 않도록 해왔다.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에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기는 전달에 이어 이번 회의서도 국채 매입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양치기 소년’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중앙은행 총재로서 생명만큼이나 귀중한 신뢰와 리더십을 잃는다. 그는 7월 말 영국 런던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유로존 위기를 진정시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8월 정책회의에서 바이트만의 반대 때문에 좌절했다. 이번에도 밀리면 끝장인 셈이다. 드라기는 결전을 대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드라기 지시에 따라 ECB 실무자들이 바이트만이 법규를 들어 반대할 경우를 대비해 현행 법 안에서도 할 수 있는 국채 매입 방안을 만들었다”며 “회의 이틀 전인 4일 바이트만 등 정책위원들에게 전격 발송한다”고 보도했다.

 퇴로가 없기는 바이트만도 마찬가지다. 독일 여론이 ECB의 국채 매입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어서다. 그들은 1920년대 당시 중앙은행인 라히이방크의 국채 매입에서 비롯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분데스방크는 물가 안정에 성공해 독일 국민의 지지를 확보했다. 서방 중앙은행 중 최고의 독립성을 누리는 이유다. 바이트만에게 국채 매입은 국민 지지의 와해를 의미할 정도다.

 드라기가 이기면 “바이트만은 직전 분데스방크 총재인 악셀 베버의 뒤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고 CNBC는 내다봤다. 베버는 지난해 2월 “ECB가 재정위기를 핑계로 지나치게 시장에 개입한다”고 항의하며 사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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