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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열풍 발목 잡는 ‘한국형’ 전자금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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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

온라인 상거래를 이용하면 국경을 넘어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다. 이는 곧 ‘훌륭한 사업 아이템을 개발하면 전 세계를 상대로 장사할 기회가 열려 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데 금융위원회는 이런 사업 기회를 철저히 틀어막고 있다. 온라인 상거래의 핵심을 이루는 전자금융거래서비스에 대해 세계에 유례가 없는 규제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소비자에게 날개 돋친 듯 팔릴 사업 품목을 개발한 국내 사업자들의 처지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인터넷으로 판매하려면 전자금융거래를 처리해 주는 결제대행사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국내의 결제대행사들은 ‘한국형’ 공인인증서를 의무적으로 써야 한다. 외국 고객들이 한국의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국내 공인인증기관들이 국제 무대에서 자리를 잡기도 쉽지 않다.

 금융위가 개선책을 내놓기는 했다. 외국 신용카드를 이용하는 구매자들은 공인인증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제거래는 카드만 허용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국내 판매자가 외국의 주문을 받으려고 외국 신용카드사와 일일이 가맹계약을 맺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내 결제대행사는 여전히 공인인증서 사용을 강제당하고 있으니 금융위의 대책은 그야말로 공염불이다. 이런 금융위의 태도는 기술에 대한 무지와 규제 과잉이 뒤범벅된 결과로 나타나는 불행한 모습의 대표적인 예다.

 국내 판매자가 페이팔과 같은 외국 결제대행사를 이용해 제품을 전 세계로 팔면 되지 않을까. 현행 전자금융 규제 체제하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전자금융거래법은 지급결제대행업을 하려면 금융위에 등록해야 하고, 등록하지 않고 지급결제대행업을 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외국회사인 페이팔이 요건을 갖춰 금융위에 등록하면 되지 않을까. 이것도 안 된다. 오로지 국내에 시설과 인력을 갖춘 국내법상 회사만이 지급결제대행업 등록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구매자와 판매자들은 국경을 불문하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만나 자유로이 거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 구매자와 판매자들은 국내의 결제대행업체·보안업계·공인인증업체 위주로 짜인 ‘정보기술(IT) 쇄국 정책’ 때문에 세계 시장으로부터 고립된 ‘한국형’ 거래와 지급방식에 얽매여 있다. 특히 국내 사업자들의 고충이 크다. 요즘 전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K팝을 보자. 아무리 K팝을 좋아하는 외국의 열성 팬이라 한들 노래 한 곡을 구입하기 위해 보안 프로그램 예닐곱 개를 연달아 설치하고, 컴퓨터를 재부팅하고, 웹브라우저를 다시 시작하고, 암호를 몇 번씩이나 키보드로 힘겹게 입력해야 하는 한국의 결제 과정을 견뎌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금융정책기관도 한국처럼 특정 보안기술에 의존해 자국의 산업에 치명타를 가하는 식으로 규제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진솔하고 겸허한 자세로 어떤 방식이 안전하면서도 국내 소비자와 사업자에게 이익인지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할 때다.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