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잤다" 여유있던 김승연, 퇴장땐 발 헛디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16일 오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법정구속된 후 서부 지방법원 앞에서 김 회장 둘째 아들 동원씨(오른쪽에서 둘째)와 임직원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김형수 기자]

김승연(60) 한화그룹 회장은 말끔한 남색 정장에 하늘색 넥타이 차림으로 16일 오전 10시 서울 서부지방법원 형사대법정에 출석했다. 자신의 횡령 혐의 등에 대한 1심 선고가 예정돼 있었지만 심경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선고 끝나고 봅시다”라며 여유롭게 답했다. “잠 잘 잤느냐”는 질문에는 “아주 편안하게 잘 잤다. 기자님들이 잠을 못 잤나보다”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공판이 끝난 뒤 김 회장은 들어간 문으로 나오지 못했다. 서울 남부구치소에 구속수감된 것이다.

 김 회장의 주요 혐의는 그룹 계열사를 동원해 부당한 방법으로 부실 위장 계열사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지급보증 등 방법으로 9000억원대를 불법지원하고 부채 2800억원을 갚아준 혐의(업무상 배임)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김 회장에게 어머니 소유 회사에 240억원을 유상증자하고, 누나와 장남 등 가족에게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팔아 1000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도 적용했다. 380여 개 차명계좌에 10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뒤 주식투자를 하고 세금을 포탈한 혐의도 있다.

 재판부는 이 중 그룹 계열사 돈 2883억원을 동원해 부실 위장 계열사인 한유통·웰롭의 빚을 갚아준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9000억원 불법 지원 혐의는 “계열사들이 실질적인 손해를 보지 않았다”며 무죄를 내렸다. 동일석유 주식을 누나 영혜씨에게 싸게 팔아넘기고 141억원 정도의 손해를 끼친 혐의는 인정됐지만 장남 동관씨에게 한화S&C 주식을 저가 매각한 부분은 무죄가 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임직원 명의로 차명계좌 380여 개를 이용해 1000억원대 비자금을 만들어 주식거래를 하고, 양도소득세 약 15억원을 포탈한 혐의에 김 회장의 가담 정도가 크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김 회장과 변호인 측은 모든 혐의에 대해 “나는 모르고 밑에서 알아서 한 일”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례적으로 검찰이 압수한 문건을 인용해 김 회장 1인 중심의 한화그룹 지배구조와 김 회장의 경영방식 등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한화그룹 본부조직에서는 김승연 회장을 ‘CM(체어맨·Chairman)’이라고 부르면서, CM은 신의 경지이고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이며 본부조직은 CM의 보좌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본부와 계열사 전체가 김 회장 개인을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상명하복의 보고 및 지휘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김 회장 몰래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는 취지다. 이어 “김승연 회장이 사실상 이 사건 책임의 최대 수혜자임에도 불구하고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하는 등 반성하고 있지 않다”며 중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재판장인 서울서부지법 형사12부 서경환 부장판사는 선고 말미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을 적용할 때 형량에 대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고 있어 조금이라도 합리적 의심이 드는 부분은 무죄로 봤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실제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 중 절반 정도를 무죄로 판결했다. 그런데도 형량은 4년의 실형으로 무거웠다. 서 부장판사는 김 회장을 법정구속한 결정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증거를 종합해볼 때 유죄에 대한 확신이 든다면 재판부로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회사 전문경영인들까지 무더기로 중형을 선고한 점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재판부는 피고인 16명 중 14명의 유죄를 인정했다. 이 중 3명은 법정구속했다. 모두 한화그룹 경영기획실 등에서 핵심 업무를 담당해온 임직원들이어서 앞으로 그룹 운영이 어려울 지경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날 김 회장은 피고인석에서 쉽게 일어서지 않았다. 선고를 마친 재판부가 퇴장할 때도 관례를 따르지 않고 혼자 묵묵히 앉아 있었다. 법정 경위가 다가오자 김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회사 관계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입장했던 방청석 쪽 문을 뒤로하고 구속 피고인용 문으로 나가는 순간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한화 그룹 측은 즉시 항소하겠다는 입장이다.

심새롬·이가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