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女 3명에게… 강한 남자 푸틴의 굴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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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 라이엇’ 멤버 세 명이 지난달 20일 하모브니체스키 법원에서 심리를 기다리고 있다(위쪽 사진). 아래쪽은 이들이 지난 2월 교회에서 기습 공연하고 있는 모습. [모스크바 AFP=연합뉴스, 티매거진 홈페이지]
푸틴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60) 러시아 대통령이 딜레마에 빠졌다. 자신을 비판하는 여성 록 그룹 멤버들을 응징하려다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15일(현지시간) 취임 100일을 맞은 푸틴은 그사이 자신만큼이나 유명해진 ‘푸시 라이엇(Pussy Riot)’에 대한 처분을 두고 진퇴양난에 직면했다.

 사건의 발단은 대선을 앞둔 2월 2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미니스트 펑크 록 그룹 푸시 라이엇 멤버 5명이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중심지 ‘구세주예수그리스도 교회’에 나타났다.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원색 계열의 쫄티와 레깅스를 입은 이들은 사제들만 올라갈 수 있는 신성한 제단에 오르더니 “성모여, 푸틴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하소서”라는 가사의 요란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깜짝 공연은 1분도 안 돼 끝났지만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 수만 명이 보면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경찰은 3월 초 이들 중 신원이 파악된 나데즈다 톨로코니코바(22)·마리야 알료히나(24)·예카테리나 사무체비치(29)를 체포해 구금했다. 이들은 “키릴 총대주교가 노골적으로 푸틴을 지지하는 데 항의하는 정치적 의사 표현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을 ‘종교적 증오에 따른 난폭 행위’ 혐의로 기소했다. 유죄로 인정되면 최고 7년의 징역을 선고받을 수 있는 중죄다.

 그런데 진짜 사건은 그 뒤부터 벌어졌다. 러시아 야권은 물론이고 마돈나와 스팅·비요크 등 글로벌 팝 스타들이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이들을 양심수로 규정했다. 서방 국가들도 인권 탄압이 우려된다고 거들기 시작했다.

 푸틴이 2003년과 2010년 정적인 전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를 탈세 등 혐의로 감옥에 보낼 때도 야당에 정치자금을 댄 데 대한 보복이라는 비판이 나오긴 했지만 지금처럼 거센 반발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국가두마(하원) 부정 선거 의혹으로 불붙은 반푸틴 시위가 중산층의 의식 각성으로 이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러시아 국민이 이 사건을 표현 및 정치적 행동의 자유 탄압으로 인식하고, 정교유착 등 러시아 사회의 고질적 병폐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초점이 이들의 행위에서 이들이 받는 탄압으로 옮겨가면서 여론도 급격히 돌아섰다. 러시아의 독립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가 전국의 성인 남녀 1601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이들에게 징역형이 적당하다는 여론은 3월 46%에서 7월 33%로 줄었고, 징역형이 지나치다는 응답은 35%에서 43%로 늘어났다.

 이런 여론을 의식한 듯 검찰은 7일 결심에서 예상보다 낮은 징역 3년을 구형했다. 법원은 17일 판결을 내릴 계획이다. 그리고 이미 승패는 갈렸다. 유·무죄와 형량을 떠나 결과는 푸틴의 패배다.

 관대한 처벌을 한다면 비판 여론에 굴복한 셈이 된다. 엄정한 처벌로 밀고 나간다면 세계적인 역풍이 예상된다. 또 당장 9월 초로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반푸틴과 친푸틴 진영이 정면충돌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세계에 ‘강한 러시아’를 과시하기는커녕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쓴 푸시 라이엇 지지자 수천 명이 각국 정상을 맞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어떻게든 질 수밖에 없는 푸틴의 상황을 두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것은 푸시 라이엇이 아니라 푸틴 정권”이라고 비꼬았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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