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만 그럴싸한 지식인의 위선,통쾌하게 비웃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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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24면

일본 현대연극사의 신화적 존재 쓰카 고헤이의 대표작 ‘뜨거운 바다’(원제 ‘아타미 살인사건’)가 그의 타계 2주년을 기념해 서울 무대에 올랐다. 재일 한국인 2세로 1970년대 일본 청년문화의 기수 역할을 했던 쓰카는 이 작품으로 73년 일본 최고 권위의 기시다 희곡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85년 쓰카 자신의 연출로 첫 서울 공연을 가진 이래 27년 만에 같은 제목으로 오르는 뜻깊은 무대다.
일본 연극사에 한 획을 긋고 지금껏 꾸준히 사랑받아 온 작품이지만 한국에선 어떨까. 시종일관 소리지르고 뒹굴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4명의 배우. 무엇을 전하기 위해 저토록 뜨겁게 연기하는 걸까? 일본의 70년대라는 시대성의 고려 없이는 그들의 뜨거운 연기를 공감할 수 없다.

연극 ‘뜨거운 바다’, 8월 19일까지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웅장하게 깔리며 막이 오르면 턱시도를 차려입은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누더기 헝겊인형을 끌어안고 있다. 장엄한 음악으로 객석의 감정을 고조시키다 엉터리 무용수가 무대를 휘저으며 실소를 유발하는, 클래식과 키치의 극단을 오가는 패턴은 누더기 같은 진실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허위의식에 대한 도전이다

도쿄 외곽의 관광지 아타미에서 시골 출신 ‘공돌이’와 ‘공순이’의 치정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도쿄 경시청의 권위적인 형사부장 기무라와 그의 애인인 여경 미즈노는 이 저렴한 사건을 한 편의 영화처럼 포장하는 데 열중하고, 시골 도야마에서 공을 세워 갓 부임한 출세 지향의 신참 형사 구마다도 이에 휩쓸린다. 용의자 오야마는 스타 대접을 받으며 등장하고, 형사들은 그를 ‘폐하’라 부르며 극진히 모신다.
이들의 취조 과정은 차라리 해체적이다. 형사들은 진실 추궁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자신들의 뒤틀린 애정문제와 비극적인 가족사를 뮤지컬, 발레, 가라오케를 흉내낸 엉뚱한 장면의 콜라주로 펼쳐보인다. 이 혼란스러운 ‘생쑈’에 멘털이 붕괴된 범인은 결국 홀린 듯 자백을 토해낸다.

밝혀진 전모는 행복을 찾아 도시로 나온 시골청년에게 돌아갈 고향조차 남지 않았다는 남루한 진실이다. 그런데 초라한 사건을 화려하게 포장하려던 기무라의 사랑 역시 촌스러운 비극을 향하기는 마찬가지. 미즈노가 결혼을 위해, 구마다는 어머니를 위해 출세를 포기하고 시골로 향한다는 아이러니한 엔딩에 도달하면 결국 저 엉뚱한 장면들 또한 화려한 도시의 욕망을 좇다 고향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실감으로 수렴됨을 깨닫게 된다.

화려하게 포장된 도시의 신화에 가려진 고향 상실자들의 눈물이라는 역설은 그 형식의 유쾌한 혁명성에 힘입어 시대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이념대립의 시대인 60년대를 지배한 사회성 짙은 앙그라 연극이 이념논쟁이 상실되고 절대적 가치가 붕괴되던 70년대에 들어와 와해의 수순을 밟으면서 일본의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좌표가 절실했다. 범인과 형사, 도시와 시골, 클래식과 키치를 역전시키는 이중 삼중의 아이러니가 생산하는 허탈한 B급 유머로 시대에 대한 환멸을 표현한 쓰카가 새로운 청년문화의 기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지식인의 전유물로 전락했던 무겁고 진지한 연극은 대중에게로 회귀했다. 뒤집어보면 다 똑같은 비루한 인생들이건만 포장만 그럴싸한 지식인의 위선을 이 종잡을 수 없는 연극 한 편이 뜨겁게 비웃어 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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