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잔소리 공화국’ 만세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대부분의 사회적 주장엔 3단 논법이 숨어 있다. 요즘 경찰이 주폭(酒暴) 척결과 함께 진행 중인 건전 음주문화 캠페인도 그러하다. 술을 많이 마시면 취한다→술에 취하면 잠재된 폭력성이 드러난다→술은 적당히 마셔야 한다. 범죄 수사에 여념이 없을 경찰이 퇴근길 술자리까지 걱정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고마운 건 경찰만이 아니다. 정부는 열흘 전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내수 활성화를 위한 민관 합동토론회를 열었다. 이때 나온 대책인 기업 회식 권장에도 세 개의 계단이 있다. 기업에서 회식을 하면 돈이 풀린다→돈이 풀리면 내수가 살아난다→회식을 자주 해야 한다. 설명 하나가 더 붙는다. “회식은 직원 소통과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 정부의 어젠다는 아직 ‘저녁이 있는 삶’보다 ‘회식이 있는 삶’인 거다.

 그런데 두 개의 3단 논법이 잘못 엉키면 결론이 이상해진다. 회식엔 술이 따른다→술에 취하면 폭력성이 드러난다→회식을 해선 안 된다. 또는 술 마시면 돈이 풀린다→돈이 풀리면 내수가 살아난다→술을 많이 마셔야 한다. 혼란스럽다 해도 길게 고민하지 말자. 회식을 하면서 술 대신 요리를 많이 시키거나 “공깃밥 추가요”를 외치면 된다. 살이 찌면 어쩌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술 마셔도 살은 찐다. 이왕이면 국가 시책에 따라 비만이 되는 게 낫다.

 좋은 뜻을 곡해해 입바른 소리를 하려는 세력은 어디든 있다. 한 경찰서 수사과장은 지난주 페이스북을 통해 경찰이 음주문화 개선에 앞장서는 현실을 비판했다. “법질서 이외의 질서는 경찰의 영역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경찰국가화를 향해 눈 가리고 행군하는 느낌이다.”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선 “경포대에서 술 마시는 것까지 ‘풍기’ ‘윤리’를 들어 단속하려는 것은 오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선배 경찰관들의 찬란한 희생정신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분연히 대나무 자를 들고 거리에 나가 장발족(族), 미니스커트족을 단속했기에 한 시대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있었다. 대학생들 책가방을 뒤져 ‘불온서적’을 솎아냈기에 지식인 사회의 급진 좌경화를 막을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국민도 정부의 계도 노력에 토를 달려는 습성을 버려야 할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나라로 키운 건 정부 확성기에서 울려퍼진 잔소리의 힘이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붙으면 정관수술을 했고,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으로 바뀌면 정관을 풀었다. 경제 5단체를 보라. 내수 활성화 대책이 발표되자 상근부회장 간담회를 갖고 차질 없는 투자와 직원 회식·국내 휴가 장려에 뜻을 모았다. 바로 이런 게 선진 시민의 올바른 자세다.

 한동안 뒷방노인 취급을 받던 국민 계몽의 중요성이 재발견된 건 현 정부 들어서다. 대통령은 어떤 문제든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로 전 국민의 정신적 멘토를 자임했다. 불법 사찰도 공직자와 민간인에게 바람직한 행동거지를 알려주려는 총리실 공무원들의 충정에서 비롯된 실수였다고 나는 믿고 싶다.

 국가 조직이 지나치게 내밀한 부분까지 참견하면 개인이나 기업의 자율성은 어떻게 보장받느냐고? 계도 캠페인을 민간이 해야지, 왜 정부가 나서냐고? 국민을 어린아이로 여기는 것 아니냐고? 그런 얘기는 미국에나 가서 하길 바란다. 미국 연방대법원에 건강보험개혁법이 올라왔을 때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건강보험 강제 가입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십 년간 이 나라 보수와 살아온 때문일까. 국가 정책을 두고 개인과 자유를 말하는 미국식 보수주의가 영 낯설기만 하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가 항상 고민인 나는 정부의 잔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 방향에 맞춰 살면 되니까.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욕심 같아선 ‘건전한 잠자리 문화’ 같은 것도 하달해 줬으면 좋겠다. 그 친절함의 강도로 볼 때 이불 속이라고 못 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