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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승자와 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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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잘나가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이 독일에 일어났다. 독일은 자국을 유럽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잣대로 여겼으며, 이를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12)와 유럽연합(EU) 모두에 적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두 군데 모두에서 독일의 잣대는 거부당했다.

 독일 국가대표팀이 유로 2012 준결승전에서 이탈리아에 패배하던 바로 그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브뤼셀에서 열린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7개국) 정상회의에서 자신의 뜻과 어긋나는 결정을 지켜봐야 했다. ‘상응하는 행동과 관리 없이는 재정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메르켈의 원칙은 아예 협상 테이블에서 치워졌다. 유로존 재정협약은 메르켈이 원하던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축소됐다.

 브뤼셀 협약에는 사실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다. 남유럽의 위기를 극복할 어떠한 전략도 담지 않았는데 이는 유로존에 대한 위협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작은 혁명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유로존 내에서 힘의 균형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여전히 강하지만 유럽 내에서 다른 주요 국가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게 됐다. 독일의 뜻에 반하는 결정이 이젠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가가 독일이 이렇게 됐다는 걸 고소하게 여기고 있지만 연대라는 측면에서 그렇지 않은 걸로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이 유로존 긴급구제 정책에서 요구했던 긴축은 남유럽을 대량의 실업, 경제 불황으로 이어지게 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에 직면했다.

 만일 브뤼셀에서 이뤄진 합의를 처음부터 메르켈이 제안했다면 유럽 재정정책의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뤄질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성공적인 정치가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메르켈은 실패를 맛봤다. 독일이 제안한 정책은 거부당했으며, 독일의 EU에 대한 영향력은 급속도로 감소했다. 이제 유럽중앙은행에서 독일의 영향력은 심각하게 줄어들게 됐으며, 독일 재무장관은 유럽 재무장관회의의 수장을 맡을 수 없게 됐다. 독일은 브뤼셀에서 호되게 당한 것이다.

 하지만 독일도 얻은 게 없지는 않다. 첫째로 독일이 말한 모든 게 틀린 건 아니라는 점이 증명됐다. 위기 국가들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중기 재정합병과 구조개혁은 필요성을 인정받았다. 경제적인 불균형 감소와 유럽 차원의 성장 지원 정책도 마찬가지다.

 둘째로 독일 우파 진영에서 확산하고 있는 정치적인 과다망상증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이다. 외국 모두가 독일의 돈을 바라고 있으며, 앵글로 색슨(영국과 미국) 파트너가 진짜로 바라는 것은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이고, 금융시장은 독일이 모든 재화를 다 투자해 지금까지의 경제적 성공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진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과다망상증 말이다. 독일 신문의 오피니언 난에는 반(反)자본주의가 모습만 바꿔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주로 다른 무엇보다 유럽이나 서구의 통합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물론 독일 우파 진영이 더욱 국가주의적인 색채를 띠어가고는 있지만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독일은 바뀌었고 그 정치적인 환경도 따라서 변화했다.

 이제 유럽 국민은 경제는 물론 정치적 통합까지 이룬 통합된 유럽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상호 의존하는 수준에 머물든지, 아니면 아예 재정까지 공동 관리하든지, 또는 아예 각자 통화체제로 되돌아가든지를 결정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이는 단일 정부나 의회에 힘을 실어주든지 각자 완전 주권국가로 되돌아가든지의 선택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어정쩡한 통합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점이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