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이여! 기본을 지킵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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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위엄을 훼손시키는 졸속적 양산주의, 비문학적 명망 조성을 통해 문학 매상을 실천하는 상업적 탤런트주의,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시를 더욱 알 수 없는 소리로 만드는 것이 소임인 것으로 보이는 혹종의 해설주의, 이런 것들이 얼핏 떠오르는 문학 내부에서의 자해 행위의 유형이다.

이밖에도 많이 있을 터이나 이러한 자해 행위의 실천이나 방조나 찬양 고무에 종사하는 장부들은 시간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

유종호(柳宗鎬.66.사진)씨가 작금의 문학행태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1957년부터 문학 비평 활동을 시작한 유씨는 『동시대의 시와 진실』 『문학의 즐거움』 등의 평론집을 펴내며 문학 작품 스스로 풍기는 깊이와 향기를 되도록 많은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 현역 평론가 중 가장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유씨가 최근 펴낸 평론집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의 대부분을 문학 작품과 평론에 대한 아픈 소리로 채우고 있다. 특히 작품을 문학적 진실, 그 감동과는 동떨어지게 읽고 있는 평론의 실명까지 들며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학 작품 특유의 요체인 서정적 진실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고 있다.

"북관(北關)에 계집은 튼튼하다/북관에 계집은 아름답다/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은 있어서/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어/검정치마에 받쳐입은 것은/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어늬 아침 계집은/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가퍼러운 언덕길을/숨이 차서 올라갔다/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백석의 '절망' 이라는 이 작품은 몇 번 길가에서 마주쳤을 뿐인 젊은 여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기대감이 깨어졌을 때의 심정을 다룬 서정시편이다.

아름답고 튼튼한 여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되었는데 어느날 보니 그녀는 어린애가 딸린 임자 있는 몸이어서 서러웠다는 것이다. 유씨는 이러한 기초적 파악 위에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평문들을 예로 살피고 있다.

위 시에서 간난을 이겨내려는 극복의지나 건강한 생명력, 혹은 가족붕괴 등으로 잘못 해석한 것은 해석자가 미리 짜놓은 가설적 범주나 뼈대에 맞춰 시의 당초 의미와는 무관하게 논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학 연구 논문이나 평론들이 이렇게 개개의 작품을 꼼꼼하게 분석하지 못해 독자들에게 작품에 대한 진정한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 유씨의 지적이다.

우리의 교육 현장이나 문학 현장에서 서정시편의 본래적 경험에 대한 충실을 저버린 채 '내용' 이나 '사상' 만을 끄집어내고 추상적.사회학적 용어로 서정적 이해를 대체함으로써 이해를 자임하는 경향이 만연돼 있다. 그 결과 서정시 읽기의 일차적 목표이자 행복인 진정성의 체험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는 언어예술이요 그러한 한에서는 심미적 향수의 대상이다. 시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시행이 제공하는 경험을 빠뜨림 없이 향수하는 것이다.

시는 말 하나의 차이가 세계의 명멸을 빚어내는 미시적인 감각과 지각의 세계다. 때문에 역사적.사회학적인 거시적 관점으로 이러한 시를 볼 경우 그것은 시세계의 부정으로 나갈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 유씨의 지적이다.

참다운 예술의 특징은 그것이 쉽게 복사될 수도, 쉽게 마련해 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문단에서는 어떤 경향의 작품이 성공하면 졸속적으로 그 아류들이 너무 쏟아져나와 패션화되고 있음을 유씨는 우려했다.

특히 이미 인정받은 문인들의 나태와 태만에서 오는 자기 안주, 혹은 퇴행적 작품도 경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아류나 퇴행적 작품에 엄정한 비판정신을 잃고 박수를 보내는 비평적 관행이 문학의 자멸을 초래하고 있다고 유씨는 이번 평론집에서 개탄하고 있다.

"남의 글에 대해 누가 꼬투리 잡기를 좋아하겠는가. 또 내 평론집에 대해 '늙은 세대의 엄숙주의' 라 타도하는 후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는 작금의 문단 행태가 문학 자체의 위엄을 떨어뜨리며 문학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어 이런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로운 인연이나 출판 상업주의에 얽매이지 말고 평론가들 먼저 작품을 제대로 읽어 문학을 지켜주기 바란다" 는 저자의 고언(苦言)이 평론집 편편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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