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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불평등’ 어찌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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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요즘 영국 공항에선 한국 젊은이들이 줄지어 나온다. 방학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상당수가 영어 연수를 위해 날아온 대학생이다. 좀 있으면 단체로 영어 캠프로 향하는 초등학생들까지 몰려올 것이다.

 어학 연수 두 달이면 1000만원 정도가 든다. 1년치 대학 등록금에 맞먹는 액수다. 2주짜리 초등학생 영어 캠프 비용은 그 절반가량이다. 연수는 어느새 형편이 넉넉한 가정의 자녀에만 해당되는 게 아닌 일이 됐다. 특히 대학생에겐 필수 과정처럼 돼버렸다. 남아공이나 필리핀까지 영어권이면 어디나 한국 학생이 퍼져 있다.

 보통의 부모에겐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년치 연수 비용은 회사원 평균 연봉에 육박한다. 과외비 열심히 대고 대학 등록금 꼬박꼬박 내주는 게 부모 역할의 끝이 아닌 세상이다. 이 연수 열풍에는 영어를 못하면 취업이 안 되고, 사람 구실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대학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나라이니 어찌 이를 잘못된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지난해 한국에서는 ‘무상급식’ 싸움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 바람에 서울시장이 바뀌기까지 했다. 올해는 ‘반값 등록금’ 논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연말 대선까지 지속될 태세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교육 불평등에 급식비·등록금과 영어 학습 기회 중 어느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지, 보통 소득 수준의 부모에게 등록금과 영어 사교육비 중 어느 것이 더 부담스러운지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낸 보고서를 보면 서울 강남권에선 초등학교 입학생의 25%가 영어 유치원을 나왔다. 강북권에선 이 비율이 1%였다. 보고서엔 부모의 월 소득이 100만원 많아지면 자녀의 수능시험 영어 성적이 2.9점이 올라간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빈부 차이에 따른 학력 격차를 줄이고 부모의 등이 덜 휘게 하려면 ‘반값 등록금’을 주장할 게 아니라 ‘영어 불평등 해소’를 외치는 게 옳다. 물론 영어 학습기회의 편차를 줄이는 것은 등록금을 반으로 뚝 자르는 것처럼 결과가 시원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시행된 영어 실력 불균등 완화 방안 중 가장 현실적인 것은 원어민 보조 교사를 활용한 학교 수업이다. 외국인 강사가 가르치는 학원에 다닐 형편이 안 되는 학생들을 위해 정부가 머리를 싸매고 만든 제도다.

 그런데 서울과 경기도 등의 교육청이 관련 예산을 삭감해 원어민 교사가 점점 줄고 있다. 이들의 월급은 200만~250만원으로 정해져 있다. 그 수준으로는 국민소득 높은 선진국에서 좋은 교사를 불러오기 어려웠는데 예산을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줄여버렸다. 무상급식 비용 탓이기도 하다.

 이번 대선의 주자들은 영어 사교육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길 기대해본다. 이념적 틀에 얽매인 등록금 논쟁보다 보통 가정의 살림과 나라의 미래에 훨씬 보탬이 되는 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