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작가 보르헤스,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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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호 16면

“1973년 겨울 어느 날 보르헤스가 도서관장으로 일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도서관을 찾아갔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우아한 모습으로 그가 도서관의 돔 지붕 아래서 나를 기다렸다. 그는 ‘당신은 공작, 당신은 신사’(『신곡』 지옥편 2곡 140절)를 읊으며 나를 맞이했다.”이탈리아의 출판인 프랑코 마리아리치의 기록이다. 1973년 그는 무작정 보르헤스를 찾아갔고 이듬해 여름 보르헤스와 함께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의 29권짜리 세계문학 컬렉션을 출판했다. 그러니 몹시 빨리 끝난 일이기도 하고, 몹시 오래 걸린 일이기도 하다. 보르헤스는 마리아리치를 만나고 고작 1년 만에 스물아홉 권짜리 선집을 이룰 작품을 선별하고 해제를 제공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40년 가까이 지난 2012년 4월에 출간됐으니 참으로 오래 걸렸다.

숨은 책 찾기 <10> 바다출판사의 『바벨의 도서관 작품 해제집』

‘바벨의 도서관’은 서구 지성계의 거목인 보르헤스가 기획한 세계문학 컬렉션으로, 그가 사랑한 작가 40인의 보석 같은 작품 164편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독자에게는 생소하지만, 이 작가들은 이미 문학사에서 크나큰 영향력과 독자에 대한 호소력을 지닌 강한 호흡의 작가들이다. SF 소설, 고딕소설, 환상문학, 추리문학, 괴담문학의 시작이자 대표자 격인 작가들을 총망라해 천편일률적인 다른 세계문학 전집과 거의 중첩되지 않는 개성적인 문제작들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들의 작가’라는 보르헤스의 별명답게, 새로운 장르 실험, 형식과 문체의 새로움을 추구한 진정한 문학정신을 갖춘 책들로 엮여 있는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은 그의 걸작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바벨의 도서관’은 보르헤스가 ‘총체적인 한 권의 책’을 죽을 때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장소며 그러한 책이 그 안 어딘가에 꽂혀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바다출판사가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시리즈를 기획하고 완간하기까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리즈 자체를 검토하고, 수록된 작가와 작품이 국내에서 얼마나 유효할지 확인했다.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스페인,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꼴로 출판되었는지를 엿보았다. 각 작품에 꼭 맞는 번역자들을 물색해야 했고, 전권에 실린 보르헤스의 해제를 옮길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났고 드디어 ‘바벨의 도서관’을 완간하게 되었다.

애매하기도 했다. 보르헤스야 물론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작가인 것은 분명한데, 대중적 인지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선집에 실린 작가들 중 10명은 국내에 처음 작품이 소개되는 작가들이기도 했다. 덩치로 밀고 가기에 29권은 적었고, 낱권으로 시장에서 승부하기에는 책이 차지하는 지점이 작았다.
완간을 했으나 워낙 개성이 강한 시리즈라 대규모 마케팅을 하기는 어려웠다. 궁리 끝에 시리즈를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각 작품에 실린 해제만을 모아 책을 한 권 더 꾸렸다. 그것이 이 책 『바벨의 도서관 작품 해제집』이다. 작품 해제를 모은 것이라 하나 실상은 보르헤스가 남긴 ‘작가론’이자 ‘작품론’이다. 보르헤스의 정신과 문학세계를 엿보기에 더없이 훌륭한 텍스트다. 심지어 가격은 2800원이다. 무료 배포가 쉽지 않으니 제작비만 간신히 남기기로 한 것이다.

프랑코 마리아리치가 보르헤스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삼십 대 초반부터 시작된 실명으로 거의 장님과 같은 상태였다. 지팡이와 비서의 부축 없이는 걸을 수도 없었다. 밀라노에서 온 젊은 편집자의 부탁을 듣고 그는 오로지 기억력에만 의존해 마흔 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선별했다. 그리고 그 작품들에 대한 해제를 불러주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말년의 보르헤스가 실명의 어둠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잊지 못했던 작품들을 통해 문학의 원형과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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